2005년 1학기, 수화를 배우다.

Posted 2008. 8. 21. 16:23, Filed under: Ex-Homepage/Essay

2005년 1학기 교양으로 '수화'수업을 들었다. 흥미를 가지고 접근한 수업이었고 실제 배우고 시험보고 그럴때는 힘든 면도 없진 않았지만 학기가 끝난 지금 돌아보면 참 재미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는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자란 평범한 한국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여러 기대에 부풀어 산다. 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는 꽤 오래된 늦깎이 신입생이지만 비슷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일어나 불어 같은 제2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강신청 기간에 이 수업을 선택했다. 수화가 나 같은 청인에게는 또 다른 제2 외국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수화가 청인과 농인 사이의 제2외국어란 생각을 가지고 접근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수화란 의사소통의 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대한민국에서 조차도 미국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써야만 한다는 우리나라 사람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필요와 국력의 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언어문제에서 수화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를 익혀 서로가 소통할 순 있지만, 농인들과 구두로 소통하기 위해선 청인들이 수화를 배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농인과 ‘농인이 아닌 사람들’로 구성된 이분화 된 사회는 마이너리티로써의 농인의 권리와 의식을 억압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비단 농인과 청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러 기준에 따라 누구나 다수와 소수의 입장에 서게 되니까 말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농인에 대한 청인의 편견이다. 나 역시 그러한 고정관념이 없다고 부정하진 못한다. 이미 청인들만의 세상에서 20년이 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들과 교류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편한 것도 없었고 그래서 무관심했다. 바로 다수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만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농인의 입장에선 이러한 상황이 넘기 힘든 큰 벽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농인을 포함한 많은 장애우들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기엔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는 후진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링컨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위해 내전을 겪어야만 했고, 마틴 루터 킹 박사와 말콤 X는 흑인해방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지만 아직도 인종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종속에서 대등으로의 관계로 진보한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측면에서 기득권층과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갈롯데 대학의 신임총장 선임문제도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이자 선진국의 하나인 미국에서조차 저렇게 걸음이 더딘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과연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일까?


농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소수의 입장에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다. 그것은 농인들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에게 그러한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은 무관심한 청인들에게도 분명 잘못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차 농인 스스로가 그들의 권리를 찾고자 목소리를 높여 간다면, 분명 우리 사회도 변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운동에 청인들 또한 참여해야만 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함께 사는 사회이자 이상적인 공동체에 한발 더 다가가는 모습일 것이다.



 언제나 세상은 청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 역시도 그 사회에서 ‘非농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 면에서 비욘드 사일런스의 라라는 쉽게, 아니 거의 볼 수 없는 특별한 케이스의 생활로, 나에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非농인’이 소수자일 경우에 느낄 수 있는 점을 암시해준 흥미로운 영화였다.


 처음에는 농인의 삶이 우리의 삶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란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평범한 가족의 삶이 펼쳐지는 영화를 보며 농인들은 단지 의사소통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 뿐이며 사회의 제도적이고 능동적인 뒷받침만 있다면 충분히 그들도 ‘우리’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능력이 있으며 단지 사회로부터 배려 받지 못했기에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래 그럼 이제부터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여기고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권리와 의무를 주자..’, 이런 생각을 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조금 여유가 생겨서 였을까? 친구를 만날 때나 혹은 수화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이 포함된 자리에서 가끔 수화로 대화를 해보고 또 수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곤 했다. 사실 대화라 해도 내가 배운 내용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제한된 의사소통만이 가능했지만 그러한 단순한 움직임, 즉 느낌을 최대한 살린 제스처 하나 유추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확실히 우리 사회의 다수가 농인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십중팔구 수화를 보면 마치 신기한 율동을 하는 것처럼 마냥 재미있어만 했다. 그리곤 ‘사랑, 학교, 대한민국’처럼 흔히 사용되는 단어를 수화로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차라리 지문자를 물어봤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그들과의 괴리감이 생긴 것 같아 씁쓸했다. 그들 대부분에게 수화는 단지 ‘율동’에 불과했으며 결정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농인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혈안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힘의 차이에 대한 이런 암묵적인 동의가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선진화된 모습을 배우고 익히는 자세에는 조국 대한민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것에 가장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농인의 역할이 드러난다. 농인을 포함한 많은 장애우들이 세상과는 고립된 상태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이유로부터 연유되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농인들은 계속 사회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인들이 시작해야 한다. 갈로테 대학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약자가 존재한다. 인종, 장애, 국적, 성별 등을 통한 차별에서 가장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위'를 향한 저항일 것이다. (저항이란 말을 쓴 것은 그것이 그만큼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권리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노력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표현이 선행 되어야만 청인사회에서도 그들에게 귀를 기우릴 것이다. 따라서 나는 농인과 청인이 공존하기 위해선 그들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청인이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사실 이 사회를 이루어 온 것은 대부분 청인들의 몫이었으며 특히 소수집단인 파워엘리트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가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사회란 구성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그러므로 구성원 개개인이 가진 권리는 보장해줘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인이 나서서 그들에게 교육과 문화, 취업 등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소외받지 않게 배려를 해줘야만 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직장에서 장애우 들에게 쿼터제를 적용하고 의료기관, 교통시설, 공공기관 이용시 불편함을 최소화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농인과 청인의 유토피아가 만들어 질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벨의 모습과 농인의 입장에서 본 벨의 평가가 큰 이견을 보이듯 지금까지 말했던 방식을 통한 사회통합은 자칫 농인과 청인 사이에 더 굵은 경계를 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청인이 농문화를 먼저 이해하고 나서 동등한 인간으로서 농인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왜 청인만이 농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농인이 청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현재 사회의 주류문화는 농인을 비롯한 비주류에게 가혹할 만큼 무관심하며 이미 농인들이 그 사회로부터 많은 불평등을 겪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농문화가 형성될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청인들이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우리 사회를 합치는 작업 역시 청인들에게 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농문화를 이해하고 또 그들을 이해하며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아무리 양쪽에서 각자 노력한다고 해도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수화를 배운다는 것은 농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언어에 있어서 그들은 객관적인 약자이기 때문에 청인은 수화를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의학, 공학의 발달로 청력장애에 대한 예방과 치료 및 청력개선도 가능하겠지만, 이미 그들의 문화가 형성이 되어있는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수화도 언어로 인정하고 더 많이 보급할 제도적인 장치와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그 다음으로 그들도 청인과 같다는 ‘동등성’에 대한 인정이 농문화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선 저런 면들을 볼 수 없다. 농인들도 여전히 웅크리고 있으며 청인사회도 무관심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란 영화나 ‘리얼’이란 일본만화 등 장애우들의 삶을 다룬 문화 컨텐츠가 늘어, 일반인의 농인을 포함한 장애우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시금석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먼저 서로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니 내가 한 학기동안 수화를 배우며 겪은 세 가지 단계가 있었다. 처음에는 수화를 통한 농인과의 유창한 대화가 가능할 정도까지 수화를 익히고 싶었다. 나름대로 노력도 하면서 수화를 익혔지만 냉철하게 지금의 내 수화실력을 평가해보면 필수적인 회화를 조금 할 수 있고 농인이 (의도적으로 천천히) 수화를 해준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인 것 같다. 이렇게 처음 생각에 약간 모자랐던 두 번째 단계를 거치며 다음 레벨을 생각해 봤다. 그것은 아마 학기 초에 가졌던 수화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습관화 하여 앞으로 계속 그것을 익혀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화도 언어로 인정을 한다면 그건 한학기 동안 내가 수화를 마스터 할 수는 없다는, 즉 살아가면서 쭉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화를 배움에 있어 딱히 의도적인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외국어에 관심이 있는 여느 친구들처럼 단지 수화에 대한 관심, 농인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하고 나면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지금까지 살면서 무관심 했었는지 반성해 본다. 또 내가 배우는 수화가 농인과의 의사소통 수단만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농인과 내가 친구가 되기 위한 단순한 다가섬이며 그들이 아직까지는 청인의 ‘말’을 들을 수 없기에 내가 당연히 ‘수화’를 배워야 하는 거라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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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널드화와 어플루엔자

Posted 2008. 8. 21. 16:22, Filed under: Ex-Homepage/Essay

*이글은 2004년도 교양수업 '미국문화와 예술'을 들을때 쓴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입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란 책과 '어플루엔자'라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두 책은 모두 미국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저자들이 비인간화 및 소비중독에 대한 현재 사회의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수업 이후에 제 나름대로 패스트푸드와 여러가지 쓰잘데기없는 낭비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데요.....실제로 알면 보인다고, 그렇게 생활패턴을 조금씩 바꿔가니 돈도 절약되고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일석이조였습니다. ^^ 내용이 그렇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 글을 읽어보시면 자신의 귀한 자산인 시간과 '돈'이 조금씩 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바꿔보는건 어떨까요?




 3월에 개강을 하면서부터 집에 있는 시간이 부쩍 줄었다. 같은 서울 안에 있지만 학교가 꽤나 먼곳에 있는 이유로 아침에 집을 나오면 밤 늦은 시간에나 집에 돌아간다. 당연히 집은 종종 비게 되는데 그때 가장 귀찮은 문제는 택배를 받을때 생긴다. 언제부턴가 나는 발품을 파는 수고를 덜고 가격 면에서도 조금 싸게 살 수 있는 온라인 쇼핑몰을 자주 이용하곤 한다. 그런데 택배는 도착하는 날짜를 알 수는 있지만 정확한 배달시간을 알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오기로 한 날은 물건을 받기 직전까지 매우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물건을 사면 살수록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한가지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새로운 종류의 스트레스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물건을 왜 산것일까? 내가 소비를 하는 이유는 그 물품이 꼭 필요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필요를 넘어서는 지출을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행복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물건을 산다. 그러면 정말 그것을 사니까 행복한것일까? 굳이 물건의 전달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문제점들이나 의미없이 쇼핑몰을 방황할 때 생기는 시간적인 소모를 들추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구입해서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꽤나 깐깐한 고객이라고 자부하지만 한두번만 더 캐물어 볼때 나는 쓸데없이 돈을 낭비한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없었다면 모든 문제들 그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골치덩어리의 여러 속성과 발생 과정 등을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와 ‘어플루엔자’, 이 두책은 내용면에서는 가볍게 여길만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다른 사회과학서적들과는 달리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많은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는 맥도날드화를 일종의 비정상적인 합리화의 패러다임이라고 정의한다. 처음 읽을 당시에는 이름 자체부터 쉬워보인 맥도날드화였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그리 만만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맥도날드화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적으로 합리화가 가지고 있는 효율성 등의 장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 사회와 그 밖의 세계의 많은 부문에서 현대문명의 ‘악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맥도날드화는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방식으로 번지는데 그는 그것을 합리화 과정에서의 한 단계로 보고 있다. 그는 합리화의 궁극의 모습이 관료제라고 여겼던 막스베버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얼핏 생각하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나치의 유대인대학살,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 포드의 컨베이어시스템, 레비타운, 쇼핑몰 등을 차례대로 설명하면서 그러한 것들이 현재의 맥도날드화가 나타난 배경이자 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합리화 단계의 할아버지격인 관료제를 언급할때는 베버가 우려했던 ‘철장감옥(Iron Cage)'이라는 합리화의 부정적인 언급하며 현재의 맥도날드화가 그때 그 시절의 철장감옥의 변형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철장감옥이 의미했던 것은 사회 전체가 합리적 제도로 이루어진 빈틈이 없이 견고한 그물망, 즉 감옥이라는 것인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현대인들은 더욱 단단해진 감옥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교육, 스포츠, 정치, 종교 등의 사회 전 범위에 걸쳐 있다니 이건 감옥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교도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얼핏 생각해보면 ‘합리’라는 말이 그리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으로는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를 많이 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우리와 우리 사회가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 책을 읽을때는 곳곳에서 거부감이 들거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주장들을 볼수 있었는데 그것 또한 습관처럼 일상을 살아온 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합리화의 오류는 무엇일까?

 우선 저자는 합리화 자체는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만들지는 몰라도 사람 자체는 바보로 만든다고 한다. 에코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야만이 그 지배가 수월하다고 했는데, 합리화는 어딘가에 숨어있는 빅브라더들이 인간을 지배하기 용이하도록 해준다. 합리성과 관련하여 조금 더 맥도날드화의 특성을 분류해 본다면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그리고 통제라고 볼수 있다. 형식적 합리성의 전제조건인 효율성과 ‘양=질’이라는 희한한 등식을 성립시키는 계산가능성 및 시스템적인 자동화로 고객을 통제하는 일 등은 각기 나름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고 있다.

 맥도날드화는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덩달아 패스트푸드점에 익숙해진 살마들은 그들의 삶에 모든 분야에서 또한 효율성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효율적’이라는 말 자체의 어감은 현대인을 좀더 세련되고 살아가는데 적합한 인간형이라는 뉘앙스를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질에는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묻는다면 또 궁금적인 효율 모델만을 찾아 올라갔을때 그 결말이 어떤 모습일지를 묻는다면 우리의 합리화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알수 있다. 뿐만아니라 효율이라는 미명아래 감추어진 지극히 잘못된(그러나 쉽게 인식할 수는 없는) 비효율적인 사항들, 예를 들자면 고객의 선택의 폭을 좁게 만들고 또 그들로 하여금 부수적인 일등을 하게 시키는 따위의 일들을 현대인이 당연한 듯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효율성 자체에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큰 장점만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셀프서비스는 마치 우리의 의무가 그 서비스의 과정에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단지 상황에 익숙한 소비자들이 무감각해서 그렇지 따지고보면 이미 우리가 지불한 돈에는 서비스에 대한 비용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소비의 주체인 고객의 권리와 의무가 혼동되기 쉽다. 그러면 가장 기본적인 소비자의 권리인 ‘만족’이 침해를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인간은 사회시스템에 종속되어간다. 맥도날드화를 우려하는 글쓴이는 그러한 폐해가 대학사회, 의료기관, 오락 등 어느 분야에서도 예외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효율성은 비인간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고객이나 종업원을 대할때는 한 가족처럼 여겼던 예전의 개념이 사라졌다. 자동화에 따른 단순노동직의 증가와 비정규직의 증가, 저임금 체계의 만연은 지금도 문제이지만 종국적으로는 소유자에 의한 인간지배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뿐만아니라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이 사라지면서 가정의 붕괴 조짐이 나타난다. TV만을 보며 식사를 하고 바쁜 생활 속에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는 일상에서는 가정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창의성,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적이고 무덤덤한 것들만이 활개를 치는, 인간은 그 와중에 숨이 막히고 있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해도 원가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만들때 들어가는 정성, 즉 질의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패스트푸드의 가격이 슬로우푸드의 값과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은 합리화의 인간통제 가능성과 ‘합리의 불합리’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맥도날드화의 철장감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책의 저자는 그 원인을 돈, 가치 그리고 적응력에 두고 있다. 실제적으로 들어오는 단편적인 경제수익과 맥도날드화 자체를 목적시하는 미국의 문화 및 사회에 자체적으로 적응해가는 맥도날드화의 본유적인 속성 등이 우리를 계속 묶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후기산업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합리화에서 탈피해보려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시기 내에서 조차도 맥도날드화는 변형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즉 사라지기에는 너무 오래되고 전체적으로 퍼져버린 암세포같은 맥도날드화는, 영화 가타카에서 경고했던 유전자조작에 의한 하이테크임신이나 자동화된 장례상품 등 합리화란 단어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것만 같았던 삶과 죽음의 영역에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가 사회의 구속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면 ‘어플루엔자’는 우리가 왜 돈과 물질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잘 설명해 준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세대가 물질적으로 계속 풍족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경제적 팽창에 대한 강박적인 욕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현상을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라고 이름지었다.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한 가장 큰 문제점은 공동체, 즉 이웃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에 있다. 예부터 내려온 지역 모임에 대한 소속감이나 이웃간의 화목함은 사라지고 있다. 이웃사촌끼리는 집안의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던 우리 선조들의 미덕은 각박한 현실과 경제의 행정시스템에 묻쳐 찾아보기 힘들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단지 소비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 자신을 돌보지는 않는 것처럼 분명히 누군가 언젠간 치러야할 번영의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은채 앞으로만 나아간다. GDP는 늘어나면서도 사회건강지수는 오히려 감소하고 아동학대와 청년실업은 증가하는 부작용은 곧 곪아서 터질 사회의 부조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풍요병에 의한 정신적인 타격 역시 큰 문제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기에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며 자괴감에 시달린다. 또 사회적으로도 풍요의 모습 뒤에 숨겨진 극심한 빈부격차와 같은 불공평한 모습들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얼마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질병을 유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프리카에는 매일 기아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지구촌 한편에서는 과소비와 남는 음식물처리가 문제가 되는 남북문제는 원인에 대한 분석 뿐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자원이 고갈될 수도 있다는 경고는 아마도 가장 현실에 와닿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모든 물자가 어느 하나 자연에서 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의 재생능력을 심하게 벗어날 정도로까지 지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들의 가치를 잘 안다면, 아마 지금처럼 많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당연한 듯이 이것 뿐 아니라 저것마저 소유하려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의 욕심이 생물종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며 점차 자원의 전체량을 줄인다. ‘환경의 역습’이라는 연초의 TV프로그램에서 경고했듯이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과 새집증후군의 원인물질인 포름알데히드 등은 모두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의 움직임은 제품의 비용에 환경세를 추가하고 여러 시민단체에서 가시적인 개선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 너무 익숙해진 편리함에 우리는 쉽게 기존의 방식을 고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라는 공익광고처럼 좀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자원의 많은 부분을 사용하는 선진국들의 작태도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퇴치하는데 큰 걸림돌이다. 미국, 중국이나 러시아는 겉으로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며 세계의 평화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여러 가지 협약이나 규정을 무시하고 있다. 리우환경회의 등에서 시작한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이산화탄소규제에 대한 안건도 몇몇 강대국의 로비와 횡포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힘을 앞세워 자기들만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국제, 정치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면에서 브루스커밍스의 글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반세기에 걸쳐 남북한 양측에 얼마나 잘못된 권리를 행사해 왔는지 알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구소련의 해체와 독일의 통일을 기점으로 이미 이념의 시대는 가고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구촌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한다. 물론 냉전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면이런 글 자체를 볼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겠지만 현재가 있다고 해서 과거가 모두 용서가 되고 인정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지금의 우리 세대도 이런 글을 통해 무엇이 진실에 가깝고 또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하는지를 생각해 볼수 있었다.

 내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얼마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핵읜 존재는 미국이나 또는 우리나라에 대한 선제공격이나 위협용이라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의 제도권교육이나 군대시절, 여러 매스컴을 통한 교육의 결과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브루스커밍스는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핵이라는 것은 누구를 먼저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한 방위전략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북한이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전쟁억제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핵개발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정말 미국이 핵무기가 폐기되어야만 한다고 북한에게 요구한다면 왜 그들은 먼저 그들의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는 것이며, 북한이 공개적으로 요구한 IAEA의 미국내 감사는 어째서 수용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이 글 하나만을 가지고 정말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며 북한은 시간이 꽤나 흐르기는 했어도 남침을 했던 과거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내재적인 위험요소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경찰국가 미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미국은 매년 ‘악의 축’이란 이름을 단 적대국가 명단을 발표한다. 물론 북한은 그 명단의 단골 손님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명단의 다른 국가들은 현재 어떤 상황일까? 알다시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침략으로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시리아, 쿠바, 북한 등 다른 나라들도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는 ‘악’이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인권에 대한 문제와 독재정치 등 잘못된 점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미국이 무슨 권리로 다른 주권국가에 대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인가? 이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에 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북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미국은 안하무인격으로 자신들의 힘을 남용했다. 대선 당시 항상 떠도는 소문에 이미 한국의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정해놓은 것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미국은 분명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분명 미국은 우리나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의 힘든 상황에서 미국을 중심으로한 원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만들기까지 좀더 긴 시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 특히 90년대부터 시작된 탈냉전시대의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분명히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독주를 시작한 미국의 태도는 전세계적으로 너무나 독단적이었고 특히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는 마치 북한은 악의 근원이며 남한은 미국의 51번째 주인양 행세해 온 것이다.

 아직도 남북한이 대치해 있는 분단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이라는 두 국가를 비교하며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국이 보이고 있는 세계 여러 곳에서의 행태들, 특히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한 오만한 행동들은 분명히 월권행사이다. 그럴 수 있는 자격은 어느 단일국가에도 없다. 굳이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러한 권한은 UN에 있는 것이고 UN의 모든 구성원들은 평등한 주권을 가진다는 UN헌장의 말처럼 북한도 엄연한 한 국가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UN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모습을 볼때 혀재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파워게임이 얼마나 무력의 사용이 없이 지속될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그것은 어느 누가 유리하고 또 누가 누구의 편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애시당초 게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이런 식으로 북한에 대해 요구를 하고 간섭을 한다면, 미국은 동네깡패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우리 부모님 세대분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초콜렛의 단맛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한두개쯤은 가지고 계신다. 그만큼 힘든 상황에서 미국은 분명히 대한민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면 관계 또한 변화를 주어야 한다. 다시말해 한미간의 새로운 관계의 틀을 모색해 보아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미군 장갑차 사건에 대한 촛불시위가 벌어질 당시에 미국의 정가에서는 혈맹국가인 한국에 대해 강한 불만과 서운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국가간의 관계란 것은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권을 서로가 인정해 준다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것이며 미국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현재 한국과의 관계에서 잘못 설정이 되어 있는 SOFA규정 등의 불평등한 조약들을 개정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그동안 미국식 자본주의를 여과없이 받아들이며 부정적인 면 또한 그대로 수용하고 숭배해온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나 ‘어플루엔자’에 나오는 사례들은 주로 90년대 초중반의 미국사회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이미 그런 징후들이 사회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선진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의 올바른 기준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극단적인 말이 아니라 지킬 것은 지키며 진정한 발전을 도모해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화가 문제라고 하여 사회에 뿌리박힌 그 시스템 자체를 한번에 없애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선된 모습으로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환경 친화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면을 가미한 개성있는 시스템을 사회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의 문제는 당연한 권리 또한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인데 흔히 말하는 클레임성 고객 또한 다른 관점에서는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권리를 지켜가야 한다. 우리는 합리화된 사회구조 및 물질의 홍수 속에서 우리와 우리 자손들 및 전세계의 인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따져보며 생활할 의무 또한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유도함으로 인해 자신에게 생기는 ‘변화’를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의 노력에 못지않게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지원 또한 필수이다. 인간의 욕심도 무한한 것이며 또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구조 내에서는 개인의 노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환경, 교육, 복지 등의 여러 조건들을 포괄할 수 있는 국가차원의 개선 노력도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단순히 소비세를 늘리거나 소비를 제한하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어릴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가질수 있게 가정과 학교에서 똑바로 배울 수 있다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학생과 시민단체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그 모은 뜻을 행정적인 측면과 연계시킬 수 있는 장치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앞으로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온 모델은 미국식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장점들 뒤에 숨겨진 많은 폐해가 있다. 그러한 부정적인 면을 고려한 우리 나름대로의 새로운 사회, 문화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고 단순하게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합리화는 무엇을 위한 합리화인지, 우리 모두가 한배를 타고 순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혼자만 잘 살면 아무런 재미도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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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화와 예술 수업을 마치며

Posted 2008. 8. 21. 16:21, Filed under: Ex-Homepage/Essay

 감기는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수 있는 병중 하나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퍼지는 감기의 경우에는 그 원인바이러스의 변종이 워낙에 다양해서 완전한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병에 걸려도 금방 건강을 회복할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국민병’이라고 불릴 만큼 흔한 병인 것이다. 문제는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차츰 감기를 당연한 듯이 여기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어플루엔자’란 책의 제목을 봤을때 들었던 생각도 같은 맥락에서 책의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덧붙이자면 두책 모두 내용적인 면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수긍하면서 읽을 수는 없었다. 여지껏 내가 단지 ‘소비주체’로만 머물렀던 탓도 있지만, 내가 배웠던 많은 것들로부터 이미 난 합리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는 책의 제목이 흥미로웠지만 그 내용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합리’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하는 좋은 자극이었다.)

 웰빙족이라는 말이 얼마전부터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여러 ‘족’들을 상기해 볼때 그 트렌드의 한계는 명확하지만, 적어도 잘(well) 살아(being)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했다는 점만은 정치,사회,경제적 조류에 치우치던 예전의 ‘족’들과는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그러고보면 유사한 부류의 말들이 꽤나 많아졌다. 다운쉬프트, 참선, 느림의 미학, 그린연대 등의 문화코드들은 모두 인간에게 양보다는 질을, 달리기보다는 산보를 추천한다. 그렇지만 이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것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그 의미를 정말 알고는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실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에 본 물건중에 컴퓨터에 꽂아쓰는 ‘USB 음이온 발생기’가 있었다. 제품 설명을 보니 그것을 컴퓨터에 간단히 장착하면 방안의 탁한 공기와 담배연기, 전자파 등을 제거해 준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획기적인 아이디어인가? 그렇지만 곧 씁쓸했다. ‘제주도 맑은 공기 스프레이’를 사서 뿌리는 도시인과 다를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구 바깥의 외계인들이 보면 지금 지구인들이 생쑈를 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를 그런 물건들을 난 종종 구입하곤 했다.

 세상은 포화되어간다. 흔히 인문과학의 발전 속도가 자연과학의 발전속도에 뒤쳐진다고 우려하지만 어떻게 보면 어떤 방향으로든 양자 모두가 세상을 배탈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람들은 공허함을, 지구는 고갈을 느끼는 것이다. 어플루엔자의 저자는 그런 현상을 ‘의미의 결여로 인한 통증’이라고 표현했다. 물적으로는 풍요로워 졌음에도 영혼은 가난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또 여전히 국가간, 사회계층간 자원 배분문제의 불평등함이 난무함을 꼬집으며 여러 자원들의 절대량이 결코 무한한 것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잊기 쉬운 명제를 끄집어 낸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의 산업혁명, 과학혁명과 소비혁명은 그 시대에는 세상을 멋지게 바꿀 수 있는 좋은 패러다임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그들은 당시 보이던 발전에 따른 부작용의 징후들 조차도 똑같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으며, 그  팽창의 중심에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몇몇 나라가 있었다. 물론 그러한 발전 단계에서 사람들은 많은 편리함을 얻었다. 과학기술자들은 조금 더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는 사람들을 시간적으로 해방시키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합리성에 의한 불합리함을 간과한 나머지 발전이 ‘지속 불가능한’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가질만큼 가졌다’는 인식으로의 전환이다.(우리는 너무 가지고 싶어한다. 범주를 좁혀 그 대상을 물질에만 한정해 봐도 인간은 너무 만족할 줄 모른다. 단지 아이디어 계획안만이 발표된 시점에 벌써 그 제품을 리뷰하는 얼리어뎁터라는 신부류의 사람들도 있는 마당이니 인간이 얼마나 호기심이 많고 또 이기적인지 알수 있다.) 개인적으로 군대에서의 경험은 나에게도 있던 그런 잘못된 생각들을 어느 정도는 깨쳐주었다. 예를 들어 야외에서 일주일정도 훈련을 할때는 기본적인 세면과 수면시간 등이 보장되지 않을때가 많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화도 났지만 차츰 훈련에 익숙해지자 그런 모든 것이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배가 아플때는 반드시 약을 먹어야 한다고 여겼었지만, 약을 굳이 먹지 않아도 곧 복통은 사라진다는 것을 배웠다. 그곳이 꼭 군대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내가 해왔던 또는 하고 싶은 몇몇 일들(주로 ‘소비’)은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그리고 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여러 사회단체나 매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문제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자신과 연관하여 자각을 한다는 일이 쉽지는 않는 것 같다. 너무 그런 생활들에 익숙한 나머지 타성에 젖어버린 탓이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더 많은 부분의 교육에서는 20세기 초반부터 걸어왔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불리는 여러 방식들을 그 주제로 삼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배우는 전공과목 중 경영공학에서는 테일러와 포드로부터 시작하는 효율적인 생산시스템을 합리적 생산공정의 시초로 보고 있다. 사회적 가치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녔지만 제도권의 교육에서는 한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더 높은 비판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깨달았으면 행동해야 한다. 글쓴이들은 우리가 하는 일이 개인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도 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에 언급했던 여러 사회문화운동들이 목표로 하는 것의 본질도 결국은 어느 정도 ‘소비병의 타파’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자발적 단순성’만이 어플루엔자를 치료하기 위한 가장 근본인만큼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항상 ‘생각좀 해보고’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또 경영공학 수업의 기말레포트는 일종의 기업컨설팅에 관련된 것인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평가 기준 중에 사내복지와 사회공헌도 파트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것도 요즘 추세와 무관하지만은 않는 것같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생활속에 늘어나는 인간소외, 질을 고려하지 않은 합리성과 효율성의 결과는 결국 우리 자신과 사회로 고스란히 돌아온 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결국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근본적인 기준은 인간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개발이 있고 소비가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남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는 그러므로 인간을 위해서 쓰여져야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이며 풍요일 것이다. ‘빅맥’세트를 먹으면서 ‘어플루엔자’바이러스에 걸린채 허걱거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곧 대다수 현대인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회복할 수 없을만큼 사람과 환경이 변해버려, ‘행복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후회할 날이 올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에 신문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서울시가 영어 공용화를 추진하려다가 강한 반발에 부딪혀서 없던 이야기가 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조기영어교육 열풍에 어린이들에게 영어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 혀수술을 해줄 정도의 극성인 정도이니, 영어는 벌써 준 공용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영어가 세계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쓰여지는 언어이기에 그것을 외국어로써 받아들인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미국의 문화는 오직 소위 말하는 선진문화, 즉 좋은문화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한국의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것을 빨리 수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화시대에 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흔히 미국의 정신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개척정신’이나 ‘도전정신’이라고들 한다. 그것은 미국의 초기시대때의 모습을 표현한 Frontierism을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여기에는 흔히 착각하기 쉬운 오류가 숨어있다. ‘개척’이라는 말은 ‘미개척지’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하는 것인데 당시 미국의 사람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무지한 존재로 간주했으며 그들의 토지를 약탈했던 것이다. 그러나 땅의 소유개념은 예로부터 기존의 거주자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이고 대대로 그 땅에 살아왔던 원주민들이야말로 그 지역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미국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개척과 도전의 이름으로 미화해 왔었다.

 그후 이어진 두차례의 세계대전, 경제공황, 냉전시대 등의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며 미국은 더욱 거대한 괴물이 되어갔다. 미국의 서부‘팽창’시대부터 이어져온 그들의 팽창주의는 이제 거대한 미국의 침공으로까지 불리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는 한국 전쟁을 연결점으로 지금까지도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물결에 더욱 크게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시작된 노무현 정부에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세대간의 이념적 갈등 또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두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경험과 그 안에서 혼합적으로 작용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감이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어릴때부터 미국문화를 접하며 자랐다. 우리 사회는 이미 서구화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다 못해 추종까지 하는 풍토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미국중심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 매우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전쟁을 모르는’세대 임과 동시에 전세계의 사람은 천부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동남아 사람들을 은연중에 무시하듯, 국적이나 인종에 따른 차별의 문제는 그 사람이 속한 나라의 힘이나 피부색에 대한 편견에 따라 흔히 발생한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세계의 문화, 정치,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한 조류 특히 미국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각 개별 국가나 문명의 문화의 다양성과 공존성을 무시한채 자국의 문화만을 강요하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는 결국 맥도날드화되어가는 사회와 급증하는 풍요병에 걸린 사람들의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의 장점을 부각시키며 들어온 미국문화는 인간성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며 또한 문화사대주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문화는 한 사람을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병이 들었다고,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잘못된 문화때문이었다고 그 나라 탓만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문호를 개방할 당시 역사적인 판단 착오에서부터 시작된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어진 냉전시대를 거치며 우리 스스로를 돌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여유가 부족했던 100여년의 시기에 미국은 분명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도 많이 주었다. 그러나 구소련의 붕괴 이후 시작된 미국의 독주체제에서 미국이 보이는 여러 모습은 예전보다도 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급변하는 사회에서 미국의 팽창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우선 지금 우리의 상태는 어떠한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미국문화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화를 완전히 차단하고 국수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선별하여 받아 들이고 또 개선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예를들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자연 친화적인 건축물을 합리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합리’일 것이다. 또한 점점 교묘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미국식 세계화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반세계화운동과 이라크전에 대한 반전운동 등은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문화침투의 경우에는 더욱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개개인의 뜻을 모아 시민운동이나 서명운동 등의 방식으로 표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을 지키고 또 그들의 잘못을 막을 수 있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본 잭 니컬슨의 영화는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이었으며 그 전에는 ‘어바웃 슈미트’가 기억이 난다. 물론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연기자이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는 항상 모랄까 개구쟁이와 같은 그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년의 모습, 즉 중후한 연기를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오래전 젊은 시절의 그의 연기 또한 지금보다 얼굴의 주름살만 조금 없을 뿐이지 그때도 매우 개성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역시 유명배우의 명성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그가 열연한 맥 머피는 범죄자인데 그는 교도소 생활이 싫어 일부러 미친 척을 하고 정신병원으로 온다. 아마도 그는 감방보다는 병원이 낫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편 병원의 환자들은 부인과의 갈등문제, 말을 더듬는 문제, 말을 안하는 문제 등 마음의 병을 한두 개 정도씩 가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서 머피는 정상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곧 주간호사의 주도로 행해지는 집단상담 시간과 투약 시간에 머피는 환자들 자신의 문제가 아닌 병원의 치료 시스템과 병원관계자들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 등이 오히려 환자들을 더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지 않은 그 모든 환경에서 머피는 마치 ‘정상인’인양 그러한 부조리들을 헤쳐 나가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병원의 동료환자들도 역시 그러한 머피의 행동에 동조를 해나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머피의 행동은 여태껏 그들이 해왔던 일상적인 삶과 억압된 병동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억울함 같은 것을 직접적으로 파헤쳐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구중계방송을 보지 못 하게하는 병원의 모습과 그러한 상황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그것이 당연한 대우인 것인 양 받아들이는 군중의 모습에서 나는 과연 우리 사회의 여러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생활해 나가는지 반성해 보았다.

 사회의 제도란 것은 참 잔인한 도구이다. 왜냐하면 제도에 맞추어 살아가고 또 제도에 알맞은 모습으로만 살아가면 그 틀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도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무뎌지게 한다. 그건 익숙해짐의 문제인데, 우리는 이미 그것에 종속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제도가 맞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능력을 마치 병원의 환자들처럼 상실한 것이다. 내가 지금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가지면서도 선뜻 그 대상을 떠올릴 수 없는 것 또한 타성에 젖어 버린 내 모습일 것이다. 세상의 모습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아웃사이더이자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문제라면 무시해 버리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에서, 친구들에게 낚시를 해볼 수 있게 해주고 같이 운동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려 노력하는 머피의 행동은 박애라는 개념을 떠나 ‘과연 나는 이 제도 안에서 얼마나 무지했던가..’라고 생각해 보니 억울하고 조금 짜증이 났다. 한마디로 정상처럼 보였던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 비정상적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정상인 사람일까?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난 모던타임즈에서의 찰리채플린의 모습에서 그 일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 이름을 많이 들어봤던 유명한 영화 모던타임즈를 보고난 소감은 교수님께서 상영 전에 언급하신 것처럼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깨달음을 주는 영화란 것이다. 기계화에 대한 언급과 여러 시대적 배경 등 지금과 달라 보이는 영화 속의 많은 모습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에 의한 암묵적인 지배현상은 여전하다는 점이다. 초반의 우스꽝스런 광대의 모습을 보며 웃다가 순간 웃음이 가신 것은 그가 허공에 대고 너트질을 해대는 장면을 보았을 때였다. 단지 그의 모습이 우습다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저 상황에서 저 작업을 맡고 있었다면 과연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란 생각이 들자 문득 찰리채플린의 공장 동료들이 싫어지고 무섭기까지도 했다. 물론 그들 역시 당하는 입장이고 거기서는 영화의 초반에서 유일하게 말을 하는 공장장 아저씨가 ‘악의 축’으로 설정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회사의 기계화나 비인간적인 모습에 흡수되어가는 우리 모두가 공범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만큼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영화를 봐도 크게 감동을 받는 것은, 역시 찰리채플린 개인의 역량도 역량이지만 그때부터 대두되었던 문제들 중에는 여전히 현대사회에도 잔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현재 상황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것은 바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의 목을 죄어오는 사회의 틀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물질의 노예로 살고 있다. 그것은 돈과 같은 재화일 수도 있으며 또는 시간이라는 무형의 올가미일 수도 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창조되어진 그러한 개념들조차도 결국에는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이 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시간과 돈이 인간을 재촉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좀더 빠른 교통수단을 찾고 싶어 했으며 좀더 빨리 일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 물론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제도 역시 그러한 현상을 부추겼다. ‘효율’이란 원래 ‘통제’의 개념을 그 기반으로 깔고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 하나하나가 그러고 보면 다 불만이다. 매점에서 기다리기 위해 번호표를 받으면 기분이 나쁘고 그 뒤에 받아든 조잡한 햄버거세트에 또 기분이 나쁘고...   

 찰리채플린은 사슴처럼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물론 영화에서 그가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아니다. 단지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던 안타까웠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지금의 너희들은 어떤가?’하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영화상으로 그가 처했던 하나하나의 상황은 모두가 그의 의도였던 것은 없었다. 단지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외의 여러 가지 사건들, 예를 들어 자동급식기계에 당하고 자기도 모르게 시위행렬에 끼어들게 되고 노래가사가 없어 즉흥적으로 쇼를 하는 일 등은 모두 그가 얼마나 수동적으로 치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찰리채플린과 맥머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각각 바보와 범죄자라는 객관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사회적 약자의 시각에서 잘못된 사회에 다가간다. 그들의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눈을 통해 비추어지는 그 시대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에서의 그들의 진짜 역할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모던타임즈는 정말 깔끔한 구성을 보여준다.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결국에는 행복이 올 것이니 끝까지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되다는 교훈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뻐꾸기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참한 결말을 맺는다. 의학적인 입장에서의 환자란 당연히 보호를 받으며 치료를 받아야 타당하겠지만 그 외의 잘못된 병원시스템이나 간호원들은 어떤 개인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고쳐질 수는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은 거라고 말한다. 즉 나는 찰리채플린이 그렇게 강조했던 ‘희망’도 현대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우울한 기분으로 다시 병원에 들어선 머피를 볼 수밖에 없었다.(그렇다고 모던타임즈에서 찰리채플린이 싸움에서 승리했다란 뜻은 아니다. 단지 그는 희망을 안고 떠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두 영화에서는 모두 정신병원이 나온다. 정신병원이라는 어감에는 나는 정상이지만 너는 정신이 이상하니 그곳에 있는 거다라는 선입견을 먼저 가지게 된다. 그런데 누가 정말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는 우리의 후대 사람들이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류의 정신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급증하는 부류에는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플루엔자와 같은 현대의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또는 생성되는 것을 방조한 탓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면 또 우리는 다시 병원을 찾아 심적 고통을 줄이고 싶어 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는 것이다. 아마 정신병원이 등장한 이유에는 그러한 뜻도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병을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발현이 되느냐가 관건이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병의 종류도 다양해졌지만 증세도 더 심해지는 경향이 빨라지고 있다. 그것은 철창감옥과도 같은 위압감으로 우리를 제압하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예전처럼 수수방관하는 입장만 아니라면 찰리채플린이나 맥머피와같이 우리와 우리 사회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그런 시도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란 점에서 이번 영화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P.S. 수업 후기....

  이 수업을 들으면서 실제로 미국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여기서 말한 ‘설명’이란 것은 정말 외적인 내용들 그리고 가시적인 현상들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수업계획서에 있는 볼꺼리 중에 ‘보이즈 인더 후드’란 다큐멘터리영화를 수업시간에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 왜냐하면 군에 있을때 그것을 보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자막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흑인들이 그 비디오테이프 자체를 하나의 생활필수품처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당사자의 입으로 들었을때 그때까지 눈에 보이는 흑인 음악이나 NBA같은 문화예술이 전부인양 알았던 내 마음은 조금은 중립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수업시간에 나누었던 여러 사회문화적인 문제점들이 대부분은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국가로부터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때, 그런 것들을 폭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며 우리를 반성해 볼수 있었다는 사실은 진정한 문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어느 면까지를 포괄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 내내 강조되었던 ‘그럼 나는 어떤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자칫 시대나 유행의 흐름에 휩싸여 자기도 모르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그런 소중한 것들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사실 마음속에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문자화하기란 쉽지 않은 얼마 전의 ‘내’가 가지고 있던 나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이나마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물론 지금의 ‘나’는 그것을 바탕으로 좀더 탄탄하고 바른 방향으로 내 스스로를 이끌어 갈 것이다.





 

Response : ,

미국문화와 예술 수업의 쪽글 모음

Posted 2008. 8. 21. 16:20, Filed under: Ex-Homepage/Essay

*2004년도 1학기에 들은 미국문화와 예술 수업시간에 적은 쪽글들입니다.

수업시간에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비판적인 글쓰기(!)가 쪽글의 주된 방향

이었습니다...미국문화와 예술이란 과목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수업은 아니

었지만 꽤나 괜찮았답니다. 쪽글은 일종의 간단한 리포트와 비슷한 형식이

었구요....아마도 쪽글모음을 읽어보시면 이 수업이 어떻게 진행이 되었구나

란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교수님의 이야기도 듣고, 관련영화도 보고, 학교

뒷산도 올라가보고....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을 알고 싶은 것은 굳이 연애를 할 때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이 ‘미국 문화와 예술’이란 수업을 들으려 했을 때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얼핏 강의의 타이틀을 보면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류의 수업이 아님을 처음 강의 시간 때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는 희소식이었을 뿐이다. 일반인으로서의 보편적인 미국인의 모습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에게는 그들의 단편적인 모습과 문화의 현상보다는 오히려 좀더 구체적으로 미국 문화의 시작과 연원,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음으로 인하여 그것을 나를 포함한 우리의 문화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사실은 내가 이 수업에 대해 바라던 바와 유사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어떠한 운동에도 직접 참여하지도 않는 방관자적 입장에 있으면서도, 현재의 내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현실 상황에 대해서는 항상 불만에 차있는 이중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그때부터 항상 마음 한구석에 내 주변의 삶, 친구,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접근은 실패했었다. 그것은 당연히 그때 그때의 내 자신의 역량이 부족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현상을 관찰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한 자기 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인 이상 무언가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중립적인 마음가짐으로 그 사물을 바라 봐야 만이 진정한 깨침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나라는 존재는 이 넓은 세계에서 어느 위치에 어떤 비중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개인적으로는 자랑스러운 그 국명 앞에서도 알게 모르게 약소국의 한 국민으로서의 자괴감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괴감이란 것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비교란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들을 굳이 가늠해 보려고 할 때 은근히 나타나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2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스스로가 제도권의 교육과정과 그 안에서의 여러 체험을 통해 주입해온 그러한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내가 아는 친구들 중에 A라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여대에 다니는 학생이며 나보다는 4살이 어리다. 그러나 그가 행해온 여러 가지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난 항상 ‘부끄러워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어떠한 주제, 그것이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나 인권, 미국의 팽창주의에 대한 저항 등에 대한 그녀와 그녀의 소속 집단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무관심하게 바라봤었다. 한편 그런 와중에 내가 이 수업을 들으면서 집요하게 내 자신에 대해 물어본 사항은 바로 이것이다. 과연 너는...지금까지 네 자신에 대한 탐구만 끈덕지게 해온 네가 이 여러 가지 문화적 사항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비판적인 눈을 견지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렇다. 아직까지 몇 년에 걸쳐서 나름대로 행해오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탐구가 계속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과연 나란 사람이 어떤 다른 주제에 관해 수용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지금껏 제도화된 사회에서 살아오며 심하게 억눌려온 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한 학기 동안 그러한 것들을 타파하고 적어도 이 수업이 끝날 때 즈음하여 좀더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 강좌를 수강한 보람이 있을 것 같다고 여긴다.


 구체적으로 내가 미국 문화란 것에 대해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KATUSA라는 군 생활을 통해서였다. 입대하기 전부터 여러 가지 소문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또 나름대로는 군 생활을 통해서 좋은 경험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아는 미국문화, 나아가 공식적으로도 세계를 이끌어 간다는 거대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내 생활의 일부로써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수용’의 개념이 아닌 일종의 ‘주입’이었다 고나 할까? 더구나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그들간의  인종과 계급의 장벽은 미국이 기회의 나라일 수도 있지만 차별의 나라일 수도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나의 군 생활은 운이 좋게도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가지고 있던 미국문화에 대한 선입견에 새로운 내용들을 추가해 주었다. 흔히들 미군문화는 미국 사회의 최하위층 문화의 일부라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미군에 자원한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고, 그들과의 생활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점은 그들이 정말 풍문처럼 ‘쓰레기’들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언어란 것은 참 무서운 것이다. 그것과 관련된 수많은 속담과 격언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란 존재가 얼마나 그것에 휘둘려 왔는지 생각해보면 정말 참담할 뿐이다.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을 느낄 때 난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느껴 왔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사상들과 감정들, 그리고 얄팍한 지식들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온 것인가? 바로 말이다. 그것이 수단이 되어서 의도하지 않으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을 지배해오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교과서와 참고서로부터 읽은 내용, 그리고 인터넷과 소문으로 들은 내용들로 인해 은연중에 세계문화와 그 핵심을 차지한 미국문화에 대해 세뇌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의문이 든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맥도널드의 햄버거를 먹으며 잡다한 그들의 슬랭을 지껄이는 내 자신을 보면 부끄러울 때가 있다.


 문화란 것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음악, 문학 등의 어떤 분류에 의해서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그곳에 뛰어 들어 그들과 부대끼며 살아봐야 만이 진정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속한 곳은 공과대학이란 곳이지만 나 역시 그들의 문화에 대해 호기심이 있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신입생도 아니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조금 쑥스럽기는 하지만 대학이란 곳이 자신의 전공만 공부하고 학점만 잘 받아서 취직을 잘 하기 위한 전초기지만은 아닌 것이다. 난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며 살았었던가...그리고 얼마나 그것에 무관심하며 살았었던가 지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번 강좌에 기대를 하며 다짐을 해본다. 내가 가진 생각들로부터 얼마나 벗어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나의 발전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대학에 와서 무엇을 배워갈 수 있을까? 단순히 컴퓨터의 작동원리와 작업을 배우고 싶었다면 좀더 저렴한 학원에 등록을 했을 것이다. 공과대학에 다니면서도 교양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종합대학인 연세대에 지원을 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실용 그 이외의 것에 대한 갈구에도 그 까닭이 있었다. 난 그것을 위해 이번 강좌를 수강한 것이며 내 스스로도 그것, 즉 내 자신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적용한 세계의 이해를 위해 고민해 볼 것이다. 지금껏 몇 년 동안 그래왔지만 이번 한 학기에는 좀더 집요하게 그것을 탐구해 볼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본다. 그리고, 내가 알아가는 것은 무엇인지도 또한 궁금하다. 나는 왜 사는 것일까? ‘행복해지고 싶어서’란 대답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답변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나의 생활에 대해 행복하냐고 다시 물어본다.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나도 잘 모르겠다’란 어정쩡한 변명이 조심스럽게 나와 부끄럽다.

 나는 너무 모른다. 나는 부끄럽게도 친구 A가 왜 사회단체운동을 하는지도 잘 모르고, B형이 왜 조교를 하다 학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난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여느 대학생들처럼 내게도 몇 번의 기회, 즉 내 자신을 알아갈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이 있었다. 무엇을 알아간다는 것과 관련해 그 대상에 명확한 우선 순위를 매기는 것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나를 파악하려고 했던 첫 번째 시기는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해진 틀에서만 활동해오던 나에게 당시의 반장선거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의지와 그에 따른 행동들은 매우 딱딱했었고 그랬기 때문에 쉽게 부러지고 난 아팠다. 무언가 다른 방식의 가치관이 절실했었고 어느 정도는 개선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잠시 뿐이었고, 난 다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 되었다. 입시에 대한 생각은 그 근본이 너무 강해서 어느 누구도, 또 어느 시기에도 그 위압적인 면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나름대로는 그 안에서의 문화랍시고 간간이 밴드활동이나 농구동아리 같은 소극적인 일탈행동들도 일으켰었지만 역시 ‘대학입시’는 자성이 매우 강한 자석과도 같았기에 난 나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이곳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한편 내 스스로에 대한 두 번째 고뇌는 고3 말에 찾아왔다. 이상과 현실의 자괴감, 그리고 이미 현실화된 사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아져버린 내 마음 등이 문제가 되어 98년부터 2년여를 내적으로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참 고마운 것은 그때 난 나름대로 많은 기준을 세울 수 있었고 그것에 맞춰서 쉽게 좌절하지 않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윤리시간에 배운 추상적인 선악의 ‘구별’이 아닌 개인적인 가치관의 ‘선호’가 많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또 그 와중에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

 군에 가기 전에 2가지 목표를 잡았다. 첫째는 나란 놈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는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던 목표였고, 하나는 나중에 무엇을 업으로 삼을 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는 백미터 달리기처럼 딱 부러지게 끊어지지는 않는 것이란 걸 잘 몰랐던 탓일까? 예비역이 된 지금도 저 두 물음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2004년이 시작되던 날, 매년 초에는 늘 그러하듯 ‘올해의 목표’를 잡았다. 이번에는 ‘내 자신에 대한 탐구’를 뺐다. 대신에 HUP라는 고심 끝에 나온 프로젝트명 아래 야심에 찬 계획을 하나 세웠다. 그냥 나를 알아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HUP의 지향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과거행적을 알아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자아탐구가 완전히 배재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이 수업도 그 계획의 여러 분야들 가운데 나의 군 생활과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폭, 새로운 문화에 대한 나의 입장과 반응 등에 관련한 파트에 대해 하나의 지침서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수강신청을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이 강의가 좀더 많은 부분을 포괄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A에게는 그의 입장에서 본 나의 겉모습이 너무나 안일해 보였었나 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남자란 성별을 가지고 태어나(그는 여자이다), 연세대‘씩’이나 다니며 왠지 경제적으로는 별로 쪼들리지 않게 살아온 것 같고, 그 편하다는 카투사로 군대를 다녀왔겠다..무엇하나 남부럽지 않은 편한 삶만을 살아왔다고 오해했던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그 속모습의 일치란 가치의 문제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지만 난 이점 하나만은 인정한다. 나는 너무 정해진 길로만 다녔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시선을 돌려 주위를 바라보며 들판의 꽃들과 넓은 하늘, 때로는 죽은 고양이 시체 따위도 바라볼 수 있는 그 여유에 대한 의지가 내게는 거의 없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그러므로 올 한해, 특히 이번 한 학기동안에는 집중적으로 나를 공격할 것이다. 몽롱해진 머리 한 구석의 환각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286 컴퓨터를 가지고서 했던 오락 중에 ‘남북전쟁’이란 것이 있었다. 일종의 전략시물레이션 게임의 원조격인 오락인데 화면의 조잡함에도 당시에는 마땅히 할만한 게임도 없었고, 컴퓨터의 사양도 따라가지 못해 한동안 그것에 빠져 지냈던 기억이 난다. 게임의 진행법은 단순했다. 나와 상대방이 각각 남군, 북군의 진영을 차지하고 미국 지도모양의 게임 판에서 몇몇 기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땅을 늘려 가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미 상대가 가지고 있는 땅(지도에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군 병력의 규모 따위가 ‘귀여운’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었다)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군사를 이용해 상대방과 전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 게임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그 정도가 어린 시절에 내가 처음으로 접한 남북전쟁의 전부라 할 만큼, 난 그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 후로도 영화나 소설 등의 간접경험을 통해 북쪽의 사람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남부지방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켜 준 것이 남북전쟁이라는 이미지 또한 어렴풋이 가질 뿐이었지 그 싸움의 본질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남북의 경제 주체사이의 이익 충돌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남북전쟁은 그나마 조금 관심이 있던 것이었고, 서부개척하면 존 웨인의 이름도 모르는 영화의 장면들과 미국의 제국주의는 고등학교 국사시간때 배운 제너럴셔먼호 사건 밖에는 생각해 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역사에는 무관심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이란 나라가 급변하면서 겪은,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부작용들이 비단 미국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서구적 팽창 과정의 전형적인 모델일 수도 있는 ‘내적 개발과 과식, 그에 따른 외부로의 팽창 및 제국주의적 만행’에서 미국이 다르게 접근한 부분은 딱 한가지이다. 이번에 읽은 글에서는 그것을 ‘평화주의로 접근하여 간섭을 확대해가는 경찰력의 행사’라고 밝혔다. 사실이 그렇다. 조금 다른 방법을 썼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자칭하는 ‘후진국의 개발’이란 가면 뒤로 수많은 현지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이 억압되고 묵살되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경찰이 이미 존재해 있는 엄연한 한 나라에서 새로운 경찰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라크에서 경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에 속했던 시아파에서도 요 며칠 사이에 들고 일어선 것을 보면 미국은 여전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제국주의의 블랙홀에서 그나마 일찍 비껴갈 수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인의 ‘전통적인 패배자에 대한 동정심과 내부적으로는 물적 풍요로움으로 인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한다. 매우 역설적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지금의 미국의 이미지를 만드는데도 그때의 여러 사건들이 한몫을 거둔 것은 맞는 말 같다. (한편으로는 ‘영토에 대한 적응도’의 차이도 미국식 제국주의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산업발달로 인한 경제적 부의 증가는 여느 나라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미국이 가진 ‘개척된 새땅’에 대한 관념과 ‘제2의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 싶어 혈안이 된 영국의 영토 개념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한발 앞서 제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가 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부적인 인종, 계급, 성별 등의 차별문제에 있어서는 은연중에 지배 세력이 굳어지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세계경찰’을 자임하고 있다. 마틴 루터킹 목사 사건과 LA 폭동, 그리고 ‘하이어 러닝’과 같은 몇몇 영화에서 비춰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20세기 후반부에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이 그들이 표방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있었던 일들을 사실위주로 그대로 보는 것과 현시대인의 주관이 개입되어 ‘해석된 사건’을 보는 것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주로 후자를 보고 배웠다. 세계사를 제도권 교육을 통해 피상적으로 접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상 다큐멘터리 보다는 드라마를 더 흥미 있어하는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영화, 음악, 문학 등의 대중문화로 포장되어 다가오는 ‘아름다운 나라’이야기는 의식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미국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문화의 수요자로만 머물었던 나에게 이번에 읽은 글은 그들의 피에 물든 초기 발달 모습을 알게 해주었으며, 미국의 본질과 미국인의 마음 한 구석에 깔려있는 속내를 조금 더 볼 수 있게 해준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물론 그때의 모습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들이 강대국인 것은 사실이며 비판받아야 할 점들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점이 더 많은 것도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부터 한 세기를 거쳐 오면서 미국도 내외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지금의 미국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또 냉전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나라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 건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가지고 미국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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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HUP 2탄; 신앙생활에 있어

Posted 2008. 8. 21. 16:19, Filed under: Ex-Homepage/Essay

Q: 나는 원래 신의 존재를 믿었었던가?


  그렇다. 중고등학교의 생활 기록부에도 또 군

입대할 때의 문서상에도 난 모태신앙의 크리스

챤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항상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오직 그와의 대화 수단은 기도 뿐이라는

생각을 지닌, 한편으론 교회란 곳에 회의감을 느끼

는 사람중에 한명이다. 물론 내가 절실한 신자인

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나의 신앙 생활은 1기와 2기로 나눌 수 있다. 1기

는 그 시작이 언제인지부터 불투명한 옛날부터

대학 1~2년의 시기까지였다. 남들만큼 성경을 읽

고 찬송도 불렀으며 교회일에도 적극적이었지만

교회 생활이 일종의 사회활동의 의미 외에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진 못했다. 그때의 영향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윤리적 측면, 정서적 측면

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

다. 미숙했던 나에게 종교란 것 자체는 가슴으로

와닿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각 종교들은 너무나 배

타적이었다. 그나마 불교나 천주교가 기독교 보다는

나았었고...) 어느 종교를 신봉하더라도 결국 스스로

하는 질문의 귀결은 절대자와의 조우인데, 그때의 나

는 그런 일체의 것들은 인지하지도 못했고 인정하려는

마음조차 갖지 못했었지만 말이다.

 

  2번째의 변화는 그와 나 사이에서 모종의 계약이 끊

어졌을 때 일어났다. 그것은 사실 계약이라기 보다는 나

만의 독단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과의 관계란 것은 절대자와 복종자가 아닌 친구 사이의

그것과 다름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념과 관

련된 문제인데 내가 그의 발에 엎드리지 않는 한 내 마음

깊은 곳의 '나'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이건 최근에

와서 확실해진 것이다. 제 2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잘 몰

랐었던 것이기도 하며) 결과적으로 내가 입은 상처는 계

속 내 자신으로 인해 곪아갔고, '신=친구'라는 개념조차도

차 멀어져갔다. 물론 내 외양적인 생활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미 기본적인 프로그램은 제 1기에서 몸으로 익혔

었고 굳이 종교란 카테고리 말고도 삶을 조종하는 부분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2003년 말까지 나의 내면 생활에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왔다. 98~00년 까지는 말이 별로 없었다. 약간은

회의적이고 시니컬한 생각을 가졌었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한 측면이 컸다. 난 믿었던 친구인 신에게 배신을 당했

었다고 혼자 믿었으며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험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일종의 조산이었는데, 나름

대로는 최선책이라 믿고 대응했지만 결과적으로 너무나 힘

든 시기였었다.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느낄 법만

한 외톨이가 된 느낌...(물론 친구들이 있지만 그들의 존재

란 당시의 내게는 진통제의 의미였을 뿐이다)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 밑바닥부터 흔들렸었기에 나의 내/외부의

모든 것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확신도 가질 수 없었던

날들이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었다.


  다행히도 어떠한 거부에도 꿋꿋하게 남아있던 것은

내 머리 속의 잡동사니들이었다. 극단으로 가지 않고서

는 두절될 수 없는 바로 내 자신에 대한 애증이 그때만

큼 강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뒤늦

게 시작된 개똥철학이 나를 꽤나 괴롭혔지만 다행히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나를 만들어 가고 있어서

고맙게 여긴다. 여기서 '관람객' 사람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99년 겨울에 모뎀 접속을 통해 접했던 네츠고의

여러 동호회들과 네츠고 관람객은 그 성격상 처음부터

달랐다. 컴퓨터를 배운다거나 음악을 다운받는다는 등

의 객관적인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모임이 아니었다. 그

저 우연히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전의 나를 아는 사람들

은 누구나 놀라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다. 심지어는 나의

어머니께서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실 정도이니까. 당시

의 내게 있어 관람객의 사람들은 진통제 이상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고맙다. 같은 선상에서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적어도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곳에 매달렸다. 어떠한 관계를 쌓음에 있어 초창

기에의 과도한 열정은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지만, 자칫 먼

지가 들어갈 만한 틈 하나로도 갈등이 생길 수 있는 것 같다.

결국은 모두가 사람일 뿐이니까...지금까지도 관람객은 좋

은 사람들의 모임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난 나름대로 그 지

속성을 최대한 길게 끌고 가고 싶은 마음을 항상 가지고 살

아간다.


  01~02년은 군대에서의 생활이었다....

그때의 삶은 나에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귀중한 교훈을 가르

쳐 주었다. 군대란 곳에는 나의 위가 있고 나의 아래가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위계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결

국 나의 기준으로 좁게만 아래쪽을 조절하려고 하기 때문이

다. 내가 잘하면 위에서 봤을 때는 훌륭한 하참이지만, 내가

나의 기준까지 일방적으로 아래 사람에게 요구한다면 나쁜

고참이 되어 버리는 곳이 군대인 것이다. 어쨌거나 군에서

의 외적으로 절제된 생활은 내적으로도 활기를 불어 넣어 주

었으며 상대적으로 많이 '밝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말

267 화학중대에서 나와 함께해준 이들에게 고맙다. 한편

이때 당시에 왜관교회란 곳에 잠시 다녔었는데, 그것이 내 종

교관에 영향을 준 것은 별로 없다. 청년부의 예배 방식이 신

선했고, 젊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도 상당히 '청년의 사회생

활'에 있어 유익했지만 여전히 종교의 핵심인 '신과 나'의

관계에는 별다른 자극이 없었다. 주보에 끄적인 잡다한

생각들은 나를 단련시켰지만 멀어진 친구는 보이지 않았

었다. (그러고보면 난 너무 어리석다. 그는 친구이며 친구일

수 없다. 주인이면서 친구인 것처럼...)


  03년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02년 12월 31일의 신년예배때

난 가장 현실적으로 기도드렸다. 분명 믿음이 있었겠지만 그

경중은 잘 모르겠다. 정형화된 기도란 완벽한 외형,즉 가식

만을 나타내줄 뿐이다. 그리고 작년 내내 신과의 교우는 그

가식조차도 거의 없었다. 애정이 식은 듯 했었다...

그러한 행위에는 결국 독단의 그늘이 지운다는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A의 고통을 떨쳐 버리자고 은연 중에

그렇게 다짐하고 또 자신했으면서도 그와 비슷한 경로를

밟는 것인가? 난 그 이유를 '나와 신'과의 관계에서 구했던 것

이다....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 말부터 올 1월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많은

것들을 지웠다. 예전과 달리 눈물이 나지 않음은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겠지...무언가를 지운다는 것은 참 힘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후회없는 한판이었다. 한 대 맞기는

했지만, 또 게임은 그렇게 끝났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만족

한다. 그리고 다시 준비를 한다. 인생의 게임은 여러 종류가

있고 또 인간에게 평생 적어도 3번의 게임은 온다고 그렇지

않았던가...

 

  이렇게 내 신앙생활의 2기는 종교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 그

런 탕자와 같이 바쁘고, 특이한 삶의 연속이었다. 내가

올해를 변화의 해라고 규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 좀

더 거창하게 말해 '절대자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인간의 삶

에는 매우 큰 문제가 생겨 버린다. 바로 '신념'에 대한 것

이다. 제 1기에서의 맹목적임도 일종의 신념이라면 신념이다.

일종의 '땡깡'의 의미가 강하긴 하지만. 제 2기에서도 각 시기

마다 한두 개의 마음가짐을 달고 살았었다. 그런데 절대자를

잊게되고 (단적으로 형식상이라지만 매일밤에 자기전에 했던

기도도 거의 않하게 되었다. 잊었던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니 무언가 너무나 허전하다. 또 조금은 두렵다. 내가 당

분간 맞부딪쳐야 할 게임은 그 단위가 점점 커지는 것들인데

거기에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들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2월초부터 검도장에 다닌다. 새벽반에 등록해서 조금은 육

체적으로 피곤하다. 차차 나아지겠지...A의 조언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고 싶어서 검도를 결심

했다. 그랬더니 더욱 절대자와의 관계 모색이 절실했다. 종

교에 대한 고민과 검도를 배움에 있어 뭐가 먼저인지는 중

요하지 않다. 나름대로 정의해보면 검도를 할 때 난 거울

속의 나를 직시하며 내 껍질을 파괴하는 것이다. 난 좀 맞

아야 한다. 흐릿한 먹물의 뭉치처럼 가슴 한 켠에 있는 못된

바이러스를 격퇴하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그렇게 해서 정화

된 나를 안정시켜 주는 것이 절대자이자 그에 대한 나의 간

구함인 것이다. 그러니 신을 나의 일부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과 검도의 연관관계에 대해선 심심할 때마다

생각해본다)


  제 3기의 시작은 작년 말에 내 머리 내부의 몇몇 기억을 지

울때 부터이다. 그리고 2004년 한해를 그렇게 멋진 해로 바꿀

생각도 그때 했었다. 이 결과가 언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

른다. 내년에는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기겠지만 올해의 HUP를

몸에 장착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나를 따라 다닐 것이다. 우

선은 실천단계로 이걸 생각해 보았다.


1. 매일 아침 Monthly Manna를 읽으며 오늘 하루를 위해 기

   도한다.

2. 매일 밤 오늘 하루와 내일을 위해 기도한다.

3. 주일에는 어느 성전이라도 가서 기도한다.


 ...1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잠깐 실행했었지만 여간해서는 열

흘을 넘긴 적이 없다. 그렇지만 검도와 함께라면 시간상 좀더

엄격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 2는 반성의 의미와 중장

기적인 의미에서의 기원도 포함한다. 3은 예배의 포맷보다는

내 자신과 신의 대면에 있어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의지한

다는 측면에 신경을 쓸 것이다.


  글을 써서 다짐해 보지만 내 자신은 너무나 약한 존재일 뿐

이다. 그러나 크눌프처럼 죽기 직전에 그것을 깨닫고 싶지는

않다. 어느 것을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정진하는 것처럼

그를 믿고 나를 다스릴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그것이 2004

HUP를 떠올린 계기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노력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고정화

되어있는, 분류되어있는 내안의 내가 너무나 많고 또 굳세다.

하지만 알은 깨고 나와야만 한다. 맛있는 계란을 먹기 위해

서는 반쯤 깨진 달걀, 그래서 내막은 찢어지지 않은 기분이

약간은 드러운 그런 과정들을 극복해야만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다 그렇고 그런거니까....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의

데미안 그룹의 리더를 '신'으로 설정했다.




07 Feb 04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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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HUP 1탄; 인정에 관하여

Posted 2008. 8. 21. 16:18, Filed under: Ex-Homepage/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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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 지구관찰자

Posted 2008. 8. 21. 15:58, Filed under: Ex-Homepage/Essay

만약에 지구를 관찰하는 제3의 무언가가 있다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누던 상대방이 갑자기 죽어버린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지하철을 타고 가다 옆에 앉았던 사람이 졸던 중에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상황을 생각해 보신 적은? 항상 육신은 존재하지만 영혼은 사라지는 것, 그것은 눈에 보이는 어떠한 것들 보다도 섬뜻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나에게 의미가 있어집니다. 개인의 이기심이 작용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결국 관계 이전까지는 단지 그 자체의 껍데기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의 '꽃' 中

<AM 0427 - 방>

 오늘도 어김없이 ㉠에게 아침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그가 물구슬같은 새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아직 등뒤의 땀을 닦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 무언가 심상치 않은 꺼리가 다가온다는 인간 본능의 경고 때문이었다. 벌써 열흘째 계속되는 악몽이다.

 BOX-I은 난감했다. 메뉴얼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분명히 했는데도 이번판은 클리어(clear)가 되지 않는다. 어서 다음 단계인 Ga-3 II 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Mi-e에서 제자리 걸음이었다. BOX-I가 여지껏 그래왔듯이 행성시-2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그 캐릭터의 아바타를 자신의 보관함에 정리하고 다음 무대로  캐릭터를 이동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어찌도니 영문인지 아바타를 조종하기가 쉽지 않았다. BOX-III와 경쟁 중인 그에게 이런 지체란 달갑지 않을 수 밖에...

 " 혹시? 이게 BOX-XI가 말한...?"

 그에 따르면, Mi-e에서는 아주 가끔 시스템 에러가 발생한다고 했다. 행성시-47G에 있었던 일명 '스테라크소'란 아바타가 일으켰던 사건이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캐릭터 이동의 전권은 분명 우리에게 있었지만 가끔, 아주 가끔씩은 아바타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된다거나 하면 게임 프로그램 자체에 오류가 생기게 되고 그 스테라크소때 역시 서버가 다운이 되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었다. 그때는 결국 행성시-1이 지났을 무렵 BOX-XI는 BOX-VI의 아바타의 도움으로 겨우 Mi-e단계를 끝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 제길...쉽지 않겠는걸?"

 그 사건 이후로 '체니, 르트르사'와 같은 다른 아바타들의 산발적인 랙이 걸리기도 했지만 그 빈도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TV/폭력/마약 등의 백신 처방으로 거의 대부분은 무난히 Mi-e지역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바이러스는 단순한 종전의 백신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었기에 BOX-I에게는 짜증나는 일이었다.

 " 결국 재부팅인가?"

<PM 2311 - 옥상>

 ㉠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지난 열흘간의 삶은 고통이었을 뿐이다. 머리가 깨질듯 저려온다. 인간은 불완전한 현실로 인해 완전한 다른 상태를 그리워하는 존재이지만 ㉠에게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불분명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있는거지?"

 그는 추락중이다. ㉠은 사라져간다.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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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 화려한 시절

Posted 2008. 8. 21. 15:58, Filed under: Ex-Homepage/Essay

  이것은 2003년 겨울..'시계밖의 시간'이라는 조금은 황당한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예전에 모모를 읽었던 기억을 되살려
정말 말그대로 심/심/해/서 써본 소설입니다....재미도 별로 없고
구성이 약간은 조잡하지만 교훈적인(!)내용입니다. 하하하...

  바쁘게 살았었는데 잠깐 휴식중이군요(2003년 말부터 지금인
04년 1월중순까지...) 나도 멋진 글을 쓰고 싶은데..가장 시급한
문제는 맘에 드는 문체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독서와 수양이 필요한듯~

  이상 내공이 부족한 사람으로부터....!!


[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에 대한 믿음보다 더 확고한 것은 없다.] - 몽테뉴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금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이 혹독한 전쟁터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주 오래 전에도 우리의 조상들 역시 바랐던 것이며, 승리하지 못한 이 싸움으로부터 여러분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바로 그것, 자유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것을 마음 깊숙하게 느끼며 그로 인해 흥분하기를 바랍니다. 이 메시지는 곧 있을 그리니치 습격에 앞서 우리의 유언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았던 우리의 선조 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실패할 것이지만 그로 인해 지금의 이 사태가 조금이라도 지연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서기 2999년,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999년, 그리고 1999년처럼 올 한해 동안에도 세상은 온통 종말에 대한 두려움과 3000년부터 시작될 새로운 날들에 대한 기대감에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12월이 되자 세계의 각 도시를 중심으로 새해맞이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고 한쪽에서는 신년 기도회와 같은 차분하고 뜨거운 대비가 이루어졌다.
 
 A와 그의 소대원들에게도 이번 12월은 의미가 컸다. 그들의 주장이 무엇이든 곧 있을 그들의 행동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오늘' 역시 '어제'와 다르지 않은 똑같은 시간임에도 '특별한 시간'으로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라 불리는 오늘을 위해 오랫동안 연습을 해왔고 그때마다 실전처럼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실제 상황에 한 발씩 다가간다.

 '분명 우리들의 생각, 아니 주장을 담은 비디오테이프가 세계 각국의 방송매체를 통해 인류에게 전달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감동적인 장면을 볼 수 없을 테지만...'


[오직 각 종의 선에 의해서 그리고 선을 위해서  자연의 선택은 작동하기 때문에 모든 신체적, 정신적인 천부적 자질은 완성을 지향하며 진보해 나갈 것이다.] - 찰스 다윈
 
 그들의 목표인 그리니치 사무소는 '시간'을 팔아 그 이윤을 먹고사는 회사이다. 사실 먹고산다고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특이하게도 그 회사에는 구성원이란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시간을 지배하고 그렇게 함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오메가'라는 무형의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A에게도 무형의 적이란 어쩌면 애초부터 상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메가로 인하여 나의 가족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당하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간과할 수만은 없었던 시민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A는 남들처럼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그는 TLL(Time Liberty Line, 시간해방전선)에 입단했다.

 사실 오메가의 인류파괴 음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풍요롭고 점점 더 편리해지기만 한 것 같은 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진보한다고 말해왔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차이가 있었다. 단지 기술적 발전으로 인한 발달만이 있을 뿐, 인간에게 진정한 진보란 유토피아와 같은 개념이었다. 오메가의 시간지배는 점점 그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법을 알게 되었고 결국 속도전쟁으로 치달으며 하루하루 그 한계점에 도달해갔다. 심지어는 인간의 언어 역시 정보교환의 수단으로 전락해가면서 차차 단어화/기호화되어갔다. 대뇌의 신경과 직접 연결되어있는 발성장치는 사람이 단어 하나를 떠올리는 순간 스스로 관련된 언어 형식을 확률적으로 창출해 내어 표현했다.(사실 이 메커니즘은 처음 개발되었을 당시에는 과학의 놀라운 유용성과 인간의 지적 성과의 결과라는 찬사를 받았었다. 말을 줄이는 것과 생각의 단위가 문장에서 단어로 작아진다는 사실은 속도 경쟁의 시대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월한 입장에 선다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문제가 터졌다. 말의 뉘앙스가 사라지고 대화의 묘미는 사라졌다. 물론 이웃과의 대화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눔을 통한 웃음과 울음의 공유정신은 증발했다. 대신 좀더 자극적이고 빠른, 그래야 만이 불안을 느낄 시간조차 줄일 수 있어서 외롭지 않고 행복(사실은 덜 불행한 것이지만)할 수 있는 정신적으로 황폐한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인류가 살 터전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문제점에 대처해 왔다고는 하나 그것은 마치 최고 높이를 향해 올라가는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그것이 정점에 다다르기까지는 조금씩 속력이 줄어들지만 결국에는 운명처럼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소모적인 대체 문명의 발달경쟁 속에서 지구는 그 끝을 향해 황폐해져 갔다. 그리고 그 근원에는 역시 인간의 탐욕과 그것을 지배하는 '시간의 괴물'인 오메가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1년이 생기고 1달이 생겼다. 그리고 '하루'라는 말로 한 달은 30등분되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점차 세분화되어 인간의 지각능력으로는 그 정도를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고, 그것은 곧 시간이 인간을 지배해 나감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며 살아갔다. 시간은 그들에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뛰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사람들 역시 언론과 사상, 그리고 관습이란 탈을 쓴 오메가의 유혹과 협박에 길들어져 왔다. 공원에서 맡는 꽃의 향기와 촉감보다는 거기서 찍어온 사진 속의 꽃이 더 꽃답다고 불리는 상황은 분명 정상적이 못했다.

 비밀 조직의 형태로 결성된 단체인 TLL은 그러한 오메가의 음모에 대항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들의 목표는 '시계 없는 사회의 도래'에 있었다. 그들은 인류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도 태양과 달은 있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때와 지금의 자연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시간이 그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으며 지금은 아예 지구를 파멸의 길로 유도한다고 여겼다. A가 리더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화려한 시절'이란 것이 있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자 TLL이 이루고자하는 최종 목표입니다."

"하지만 저는 집이나 학교에서 그러한 곳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이미 세계의 기득권 층은 오메가에게 물들어버렸습니다. 이제 이
 '과거체험 마스크'를 쓰고 한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확실히 무엇이 진실
 인지가 밝혀질 것입니다."

 A도 마스크에 대해 알고는 있었다. 과거체험마스크란 일종의 개인영상정보 전달장치였다. 마스크를 쓰면 자신의 새로운 아바타가 화면에 등장하여 본인이 원하는 단계로 시공간을 이동하게 해주는 도구였다. TLL에서는 항상 신입 대원들에게 기존의 고정관념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아이모자'라는 아이템을 아바타에 입력한 후에 편견이 사라진 눈으로 인류의 과거를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진정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또 왜 그러한 신념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조직원들이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했다.

 오늘 A는 본인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려 TLL에 들어왔지만 아직까지도 무엇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없었다. 그가 자라왔던 모든 환경은 아직까지도 TLL을 위험하고 극단적인 테러단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의 부모님세대도, 또 할아버지의 세대도 각 시대마다 정해진 제도와 규범을 잘 지키며 살다간 '모범부류'였었고 적어도 어린 A의 생각에 그들은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일종의 불안감과 회의감을 뒤로한 채 A는 마스크를 작동시켰다.

 '나의 아바타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것은 약간은 투명해 보이는 마네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리더가 말한 아이모자라고 여겨지는 작은 모자를 하나 쓰고 있는 것을 제외하곤 다른 옷이라든가 액세서리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무슨 숲 속의 길 같은데 처음 와본 곳이다. 확실한 것은 저 인형 같은 놈이 나의 생각대로 움직인다는 점뿐이다. 나의 뇌가 저 사이보그 같은 놈의 머리 속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니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아바타는 어디론가 움직였다. 아마 입력된 코스로 가는 것이리라. 반갑게도 얼마 가지 않아 작은 건물이 보였다.'

 {TLL 과거 회복실 - A군을 환영합니다!}

 조그만 문 위에는 다음처럼 쓰여있었다. A는 리더가 일러준 대로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모든 면이 하얀 벽면으로 칠해져있고 방 한가운데에 있는 원형 띠처럼 생긴 캡슐들만 없었더라면 한번쯤은 살아보고 싶은 방처럼 느껴졌다. 캡슐로 가까이 가보니 모든 통마다 자신의 이름과 해당 연도가 적혀있었다.

 'A-2987은 2987년도의 내가 있다는 말인가..?'

 그는 자연스레 올해의 연도인 2999년이 쓰여진 캡슐을 열었다. A는 스포츠카의 좌석같이 생긴 구조로 된 의자에 앉아 캡슐의 문을 닫았다. 그와 동시에 주위는 어두워졌다. 그리곤 원통형 화면에 영화처럼 들판이 보이는 듯 싶더니 A의 주위가 온통 스크린으로 변해버렸다. 더욱 황당하건 A의 아바타가 그 장면 속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맙소사.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건가? 그런데 여긴 어디지?"

 "안녕하십니까."

누군가의 목소리에 A는 뒤를 봤다.

 "저는 여기서 당신을 기다려온 Wait-Er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저는 당신이 안전하게 이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시중을 들것입니다."

 "누구의 부탁이죠?"

 "저 역시 TLL소속의 대원이며 제 역할은 신입대원들에게 우리의 이상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만들어 주는 겁니다. 이제 당신도 우리의 일원이 되었지만 아직은 지금까지의 현실에 대해 잘 모르고 혼란스러워 하기 때문에, 저는 지금부터 당신을 도와 우리가 원하는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겠습니다."

 방식은 매우 간단했다. 현재(2999년)의 캡슐을 탄 A는 자유롭게 원형의 캡슐들을 따라 가고자 하는 연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해를 떠올리기만 하면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이었다.

 "먼저 언제로 가야합니까?"

 "그건 당신의 주관에 달려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상황보다 나빴던 상황은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었지만 그래도 저는 18C를 추천해 드립니다.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겠지만 조금 있으면 적응이 될 겁니다."
 
'역사시간에 배웠던 18C는 'P(Paradise)'라고 불리는 시기였다. 그림 속에서만 보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이거 위험하지는 않겠지요? 당신도 함께 갑니까?"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은 A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바타의 여행에 불과하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해서 안전하기만 한 것 역시 아닙니다. 단 한가지만 명심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아바타는 그 시대를 이동하면서 살수 있지만 당신의 머리 속에 든 생각 그 자체는 2999년의 그것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한 명의 관람객으로서 그 시기를 느껴야지 당신의 관념이 그 시기의 주체가 되려고 한다면 프로그램이 다운될 수 있습니다. 이점만 유의한다면 당신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함께 가지 않습니다. 저의 역할은 단지 여행의 시작과 끝을 인도할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나오는 문 옆에 대기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내 생각에 훌륭한 삶이란 것은 행복한 삶이다.] - 버틀란드 러셀

 A가 처음 도착한 곳은 한 인디언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어떤 부락이었다. A가 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처음 그의 걱정과는 달리 A의 아바타는 벌써 인디언의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언어와 생활방식도 벌써 아바타에게 입력이 되어있는 듯 했다. 그의 아바타는 마치 인디언들과 오랜 생활을 함께 한 듯 쉽게 사회에 적응했다. 그들에게는 TV나 자동차는 물론 기계적인 시계도 없었다. 그러나 A의 생각과는 달리 어느 누구도 불편해 하지 않았다.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풍요롭게 생활하는 그네들의 모습을 보자 어느덧 A도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는 낮과 밤이 확연히 존재했다. A가 살던 때에는 밤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태양과 그것을 본 따서 만든 발전기로 24시간은 온통 대낮처럼 밝았다. 그들에게 어둠이란 영화관처럼 특수한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임의적인 것일 뿐이었다. 인디언 마을은 달랐다. 장작불을 피우는 마을 입구의 몇몇 군데를 제외하면 온통 어둠이 깔리고 정적이 맴돌 뿐이다. 물론 그 고요함은 A가 지냈던 곳의 적막과는 거리가 있었다. 기계, 자동차 소리와 네온불빛에 찌들은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이 온몸을 감쌌던 것이다.

 해가 뜨는 것이 아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인 A에게, 닭의 울음소리와 새의 지저귐 또한 아침의 신호일 수 있다는 점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시계의 숫자가 가리키는 정도에 따라 하루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눴던 그의 사회였다. 아니 그것은 자연을 효율성이란 명목으로 죽인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A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됐던 경쟁과 분란은 찾아볼 수 없었기 또 한번 놀랐다. 대신 서로에 대한 인정과 공유하는 마음이 일반적인 인디언들의 모습에 배어있었다. 그들에게도 똑같이 열정과 욕망이 있고,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전체의 양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누구하나 제몫 때문에 이기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여러 생활방식이나 음식물 등이 불편했지만 편견을 사라지게 만드는 아이모자 덕분인지 예전의 편안했던 기억은 쉽게 잊혀졌다. 

'그렇군. 내가 편했던 것은 모두 상대적이었어. 이들은 너무나 행복하지 않은가!'

 심지어 인디언들은 A시대의 사람들처럼 영원한 삶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근본부터 다른 믿음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영원이란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고 소멸이란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믿고 있었다. A가 항상 들어왔던 것은 인간의 불멸에 대한 꿈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 문화적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A는 인디언 마을에서 1년여를 지내며 그가 그토록 찾던 화려한 날들이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즉, 이곳에 온 이래로 처음 A는 TLL의 목표가 '왜' 정당한지에 대해서도 확실히 인정하게 된 것이다. 외부의 빨라짐이 그들 내면의 평화를 파괴했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는 이제 다시 현재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생각과 함께 배경은 바뀌었다. 

 "잘 확인하셨나요?"

Wait-Er는 A가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서있었다.

 "내가 얼마동안 여행을 한거죠?"
 
 "당신이 그곳에서 있었던 시간의 총량은 2999년 기준으로 3분 23.41초가 흐른 것입니다."

 "그렇군요. 꽤나 많은 일을 하다가 온 줄 알았는데..."
 
 "그 당시는 아날로그 단위였지만 지금은 모두 디지털화 하여 시간의 양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어쨌든 다른 때도 확인을 해보시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이걸로 충분합니다."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라. 그러면 그대의 믿음이 그것이 사실이 되도록 도와줄 것이다.] - 윌리엄 제임스

 A는 그때부터 조직에서 많은 훈련을 받으며 단련했다. 오메가는 세계의 곳곳에 퍼져있었기 때문에 모든 지점을 동시에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TLL에서는 분점마다 우선 순위를 매겨 두었고 오늘 바로 A의 팀이 '그리니치 사무소'를 습격하는 날이 온 것이다.

  '그래 이건 상징적인 저항일 뿐이야. 하지만 조금은, 조금은 인류의 파멸이 늦춰지겠지.'

 다짐을 되새기며 A는 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연말이라 그런지 경비원들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에 근처 술집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간혹 보이는 경비들도 A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실장님, 메리크리스마습니다! 올해도 잘 보내시고 언제 술이나 한번 하시죠?"

  A는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애써 자신의 속내를 감추려고 했다. 오메가에게 매수된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쌍한 친구들이여. 내가 오늘 자네들을, 아니 온 인류의 삶을 한 걸음 나아가게 하겠네'

 제한구역의 CC-TV에 A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비복 차림의 A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의례 있어 왔던 자정순찰을 할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A는 곧 세계표준시의 기준이 되는 시계가 보관되어 있는 방 앞까지 접근했다. 그곳은 순찰도 허용되지 않는 통제구역이었지만 이미 지문카드와 망막복사렌즈를 준비해 두었기에 순식간에 방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 저 친구 저기서 모하는 거지?"

동료들과 카드놀이를 하던 경비원 김씨는 무심결에 본 폐쇄회로 화면에서 A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자기 시계 맞추는 거 아냐? 거참 사람하곤 빨리 카드를 내기나 하게."

 "가만있어봐. 뭘 꺼내는데? 모지? 럭비공인가?"
 
 "어? 저 구역 마이크 좀 연결해봐."

꽝...

 A의 기억은 희미해져간다. 모든 것이 한번에 돌아올 수는 없지만 이것으로 화려한 시절이의 도래가 조금은 앞당겨 질 것이다. 부모님의 얼굴, 애인의 얼굴, 그리고 TLL에서의 잊지 못할 경험까지 모든 장면이 한순간에 쏟아져 내렸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뉴스속보를 알려드립니다. 오늘 23시 59분 57.12초에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폭발사고가 있었습니다. 비상 근무 중이던 경비병들에 따르면 그곳에서 10년간 근무해 왔던 경비원 A실장이 접근 금지 지역에 무단으로 들어간 뒤에 가슴에서 폭탄을 꺼내 터뜨리고 자신도 그곳에서 숨졌다고 합니다. 한편 경찰은 입수된 폐쇄회로 화면을 분석하여 내일 09시 00분 00.00초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번 그리니치 천문대의 폭발 사고는 1999년에 한번 있은 후에 1000년만에 다시 발생한 일로 테러의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점으로 보아 수사당국은 우선 개인적인 정신 이상자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하기로 했습니다."

TLL본부...

 "또 실패군요."
 
 "역시 한번에 소탕하지 못하면 인간은 계속 당할 겁니다."

 "설사 우리가 그렇게 해준다고 해도 인간들에게 그러한 혼돈을 견딜만한 능력이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역시 A의 시도도 실패했고 오늘 TLL의 미팅 역시 침울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얼마 후면 그들이 대항조차 못할 정도로 오메가의 세력이 커져버리는 날이 올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게 그냥 애초에 준대로 살면 될 것을...쯧쯧"
 
 "그런데 우리가 꼭 이렇게까지 나서야 하는 겁니까?"
 
 "우리가 만들었으니 책임은 져야겠지요."

 그들은 새로운 전사를 찾아 나섰다.


[미래가 어떤 것을 가져다 줄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데모스데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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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의 기억

Posted 2008. 8. 21. 15:57, Filed under: Ex-Homepage/Essay

2002년 12월 9일..


내가 누구게!?
 
나는 가장 제대한지 쪼금된 관람객 [기다림]이야..
 
진짜진짜 재미없는 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관람객
 
예비역 한명만 대봐! 1...2...3! 왜 반응이 없어? 예
 
비역이 몬지 모른다고? 현역이 제대하면 그게 예
 
비역이래..나도 몰랐어! 나와보니 나보고 그러더군!
 
좋아 썰을 풀기 전에 맛보기좀 보여주지,
 
  지금 옆에 개가 있다...아는 사람은 다 알지! 그 개
 
이름은 미미야! 나쁜 쫑이 집나간지 하루만에 맨
 
날 우는 우리 형제가 시끄러웠던지 아랫집에서 바
 
로 줬던 개가 바로 미미야! 벌써 14년 전이야!
 
아버지께서 그러셨지! 개나이는 환산법이 틀리다
 
고! 미미 나이는 75살이야...5배를 곱해야지 진짜
 
나이가 나오지! 좋아 그럼 본격적으로 미미 야기를
 
해볼께!
 
  군대 있을때 알다시피 집에 몇번 왔다 가끔!..그
 
런데 그당시 미미도 가끔 정신이 왔다갔다 했어! 첨엔
 
놀랐어! 왜냐고? 한번 개를 길러봐 기르던 개가
 
침을 막 흘리면서 몸을 못가눠서 쓰러질때 어떤
 
기분일지! 그럴때마다 난 아니 우리 식군! 열심히
 
간호했다! 왜냐고? 미미도 우리 식구거든! 그럼 금
 
방 돌아왔다~!
 
 머야 벌써 분위기 다운된거야? 좀만 참어 금방 끝난다!
 
 시간이 흘러 벌써 제대했다. 누군 '벌써'지만 누군 '드
 
디어'야! 군대는 관람객이야! 가입하고 생까는 사람도
 
있지만 한달에 31번 오는 사람도 있지. 장단은 생각하기
 
나름이야. 각설하고~
 
  요즘의 미미는 주말이야! 일주일에 두번은 꼭 쓰러져.
 
나도 몰랐는데 최근에 알았지..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야! 저녁에 와보니 어머니와 미미가 화장실에 계
 
시고, 있었지~! 그래서 내가 말했지, "왓 해픈드!?"
 
아버지께서 그러시던군.. 또 꼴까닥했다고! 꼴까닥이
 
모냐고? 우리집에선 그렇게 불러!! 그러려니 했어!
 
곧 어머니께서 나오셨지. 그런데 미미는 계속 화장실
 
에 있었다! 정신을 못차렸거든!~ 그런데 아는 사람은
 
안다! 개 정신나가는건 학창시절에 날라리되는거야!
 
빨리 돌아올수록 더 좋은거지. 아무런 손도 못썼다!
 
그냥 미미는 화장실에 갇혀 있었어.
 
 좀전에 마루에 나갔드랬지. 어머니께서 안방으로 가
 
시면서 소파밑에 있는 미미를 콜하셨다! 그런데 미미
 
가 으르릉 거렸어! 그런 일은 난 첨봤드랬어 15년동
 
안! 상황이 으르릉 거리는 상황이 아니었거든! 불을
 
키고 당신과 난 아래를 살폈어! 무슨 일이 있었게~?
 
놀라지마! 미미가 지가 쏟은 오바이트를 다시 먹고
 
있었어! 더럽다고? 더럽지! 근데 원래 개는 지가 쏟
 
은거 다시는 안먹는데! 지금까지 미미도, 쫑도, 마루
 
도 그래왔어! 왜 그랬을까? 상상가는 이유는 많은데
 
쓰면 길어진다! 어쨌든 그냥 놔뒀더랬어~!
 
  시간이 늦었지! 그래서 잘라고 화장실에 다녀오던
 
길이었지. 미미가 쫄랑쫄랑 따라왔어! 5분만에 다 먹
 
고 좀 정상이더군. 우리집은 철칙이 있어! 개가 좀 이
 
상하거나 죄를 지으면 절대 혼숙하지 않는다! 사실
 
미미는 내 방에 잘 들어오진 않아! 자다가 침대에서
 
나한테 차여서 몇번 떨어졌거든!! 그런데 이게 오늘
 
은 따라오는데 비틀비틀 거리더군..정상처럼 보이지
 
만! 정상이 아직은 아닌모양이야!
 
  갑자기 옆에 있는 미미를 보니 글이 쓰고 싶어졌어! 작
 
년 7월 8일에 마루가 하늘나라로 갔어! 심장사상충이
 
었는데 링겔맞고 버텼어! 걸리면 죽는 병이었다더군!
 
근데 그놈의 수의사는 피로누적이랬지! 링겔 꽂고 마루
 
가 뭔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열이 받더군. 죽은 담에 보
 
니 다른 병원에선 대자보를 다 붙였더군! "심장 사상충 무
 
료접종" 알어!? 그렇게 죽고나니 그런것만 보이더군~!
 
  에니웨이! 그뒤로 미미 혼자 남았다! 몇번 강아지 한두
 
마리 더 데려왔었지만 그냥 돌려보냈더랬지! 여기도
 
이유 풀면 한보따린 된다!
 
  미미를 보니 서글퍼 졌지!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미미는 타이머야! 시간되면 또 꼴깍하겠지 그리고 다
 
시 리셋하면 다시 첨부터 타이머 시간이 가겠지. 그런
 
데 이제 시계약이 거의 떨어져가는 것 같더군! 그래서
 
열받았다 좀전에..
 
  맛배기가 넘 길어지면서 졸리기 시작했어! 살짝 미미야
 
기 해줄라고 했는데 솔직히 겁난다! 이거 넘 길어서 다
 
읽기는 할까? 사실은 이거 더블스페이스에 세로로도 반쪽
 
이야! 합쳐보면 얼마 안될껄!  좀만 참어 다 끝났어!
 
  개 몇마리 키워봤는데 내가 볼때 죽은 개는 아직 없었지!
 
그런데 아마 미미가 첫번째가 될것 같다! 나도 알고 있어, 우
 
리 작은 고모네 푸들은 20년 살았더랬지..어쨌거나 요즘 미
 
미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그래서 오늘도 내방에서 재울 생각
 
이지!
 
  마지막으로 이말이 하고 싶어! 개를 키울때 제일 좋은 점이
 
모~!게~!? 좀전에 떠올랐어. 강아지는 하염없이 주기만 해!
 
내가 말하는건 다 들어주지! 한마디도 안하면서 듣기만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내가 편해지거든! 아마 이말에 동감하는
 
사람 많을거야!! 끝이다!~
 
P.S. 오늘 눈이 많이 왔더랬지! 2층에서 봤더니 함박눈이 내
 
리더군! 그런데 밖에 나와보니 어둠속엔 녹아버린 빗방울이
 
더티하게 쌓여있더랬지! 그래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결
 
론은 하나였지! 빨랑 집에 가서 발닦고 잠이나 자자..내 글은
 
항상 이런식이야! 주제가 몬지 찾을라면 허무해지지~!! 담엔
 
글쓸때 재미있게 써서 당신을 기쁘게 해줄께! 오늘은 이만 간다!


2003년 11월 12일..

  아침 6시 20분, 어제는 비가 내렸고...오늘 역시 구름이 짙게 깔렸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마당 한 귀퉁이에 구멍을 파고 있었다. 그것은 미미의 공간...하긴 미미는 우리와 10년 넘게 함께해온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 정도의 공간을 차지할 자격은 충분하다.

 오늘 새벽 1시경부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4시 30분쯤 어머니께서 나를 깨우셨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채 멍한 듯 잠들었던 나는 마치 당연한 일을 확인하듯 부엌으로 갔다. 거의 눈을 감고 있는 미미..요 근래 너무나 고통스러워 했었기에 심지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기에 오늘 저녁 동네 동물병원에서 안락사를 시키려 했었던 미미가...엄마의 원대로 집에서 조용히 수면사한 것이다. 뛰지 않는 심장과 들리지 않는 숨소리, 서서히 굳어가는 앞뒤발과는 달리 체온은 아직 따뜻했다...

 1992년은 의미있는 해였다. 강아지로서 최초로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던 쫑이 집을 나간 해가 92년이었고..연달아 쫑의 대타로 미미가 들어온 것 역시 그해의 일로 기억한다. 쫑이 나간후 우리 형제는 동네방네 포스터를 붙였고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같다. 그럴수록 더욱 커져가는 쫑에대한 상실감에 미미의 입양은 집안을 밝히는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툭하면 가출을 기도했던 쫑과는 달리 미미는 암캐라 그런지 집안에서 좀체 나갈 생각을 안했다. 물론 우리 가족들이 신경도 많이 썼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마 중학교 2학년때였을 것이다. 미미가 사라진 것이다. 또다시 우리 형제의 '개찾기 포스터'붙임이 있었고 아주아주 다행스럽게도 연락이 왔다. 내 초등학교 동창인 어느 여자아이었는데(그녀의 이름은 원영란이었다..) 개를 좋아하기로 소문이 나있던 아이었다. 그런데 미미가 집밖 구경?나갔다가 근린공원에서 헤매고 있던 것을 데리고 보살펴왔던 것이다. 포스터도 포스터지만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미미를 찾을 수 있었고 너무너무 기뻤다...그친구가 너무나 고마웠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미미와 나의 관계는 매너리즘에 빠졌다. 나는 대학입시에 대한 압박감에 정신이 팔려있었고...또 집에 있는 시간조차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미에게 그다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강아지란 이런 것이어서 주인의 무관심에도 여전한 사랑을 보낸 미미였다. 내가 기쁠때 슬플때 함께 웃고 울었다면 믿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랬었다. 그리고 여전히 미미는 건강히 몇 년을 보냈다..

  고3때 집이 근처로 이사를 했고 곧 도베르만 새끼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놈은 수컷이었는데 처음에는 집안에서 키우다 3개월정도 뒤에 무지 커져서 마당으로 내놓았다. 그 집안에서의 3개월때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미미의 우울증이었다.(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원래 개란 동물이 샘이 많아서 자기보다 더 사랑받는것, 돼지건 개이건 고양이건,...그것이 나타나면 안달이 나서 가만히 못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미미는 별다른 반응없이 조용했다. 마치 '그놈은 곧 마당으로 갈거'란 사실을 알았다는 듯 말이다.

 대학입시가 끝나고 한량이 되었을 때 미미와 무척이나 친하게 지냈다. 집에만 주로 있다보니 역시 제일 만만한 것이 개였기 때문이다. 주로 우리의 관계는 미미가 내가하는 말을 듣는 관계였였고 중간에 졸거나 그러면 내가 흔들어서 깨우는..그런 식이었다. 몇 달간 나의 넋두리를 들어야만 했던 미미의 고통기였다고나 할까? 나에겐 그런 존재가 너무나 필요했었던 시기였다...

 대학에 갔고...미미와는 다시 소원해졌다. 바쁜 탓도 있었지만 마루(도베르만)와 더 친했던 이유도 있다. 그러던 어느날 미미가 발작으로 쓰러졌다. 깜짝놀란 우리 가족은 동물병원으로 미미를 데리고 갔다. 역시 그것은 점차 시작되는 노환의 증세였다. 그후 지속적인 운동(마당달리기)으로 건강을 어느정도 회복했지만 나이가 있어서인지 가끔씩 벌어지던 발작 현상도 벌어지는 주기가 짧아져 갔다. 내가 부대에 있는 2년동안도 간간히 그 소식이 들려왔지만 용케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던 것을 보면 개는 역시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먹고 산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렇게 쭉 이어오던 생활 중에 미미가 점차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었고 음식도 잘 먹지 못하게 된 것이.. 약 15일 전의 일이다. 미미가 고기밥을 마다한 것이다. 사실 개가 고기반찬을 거부한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는 개를 길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엄마의 말씀은 미미가 목욕중에 어금니가 하나 빠졌는데 그것이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하셨다. 이빨빠진 호랑이는 아니지만...개역시 이빨은 컸나보다. 어쨌든 가지가지의 실험 끝에 고구마와 카스테라를 씹어주면, 그냥도 아니고 잘 으깨서 주면 간신히 먹는다는 것을 파악했지만 그것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모든 음식을 거부하게(사실은 못먹은 것이다..)된 미미는 나날히 야위어 갔고 어느덧 뼈만 보이게 되었다. 심지어는 물조차 먹고 토를 했으니...그래서 결국 4일전에 동네 병원에 갔었다.

  혈액검사 끝에 나온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노환에 의한 합병증이 심했는데 특히 간의 수치가 정상치보다 1500배정도 높다고 했다. 또 의사역시 수술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그날 저녁부터 진지하게 안락사를 시키는 것에 대한 고려를 했고 다음날 저녁에 병원에 전화를 했다. 그것이 어제다. 그러나 다행히 의사가 병원에 없었고 어머니께서 또다시 부엌에서 미미를 데리고 주무셨다.

 그저께 밤부터 미미가 집안의 불을 모두 끄면 안방이든 형방이든 내방이든 어딘가로 가려고 했는데 서있을 힘조차 없어서 지 집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것이 보기 안쓰러워 당신께서 부엌에 간이로 불을 키시고 미미를 데리고 계셨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밤 미미는 죽었다. 오늘 새벽의 일이다...예전에 내가 두려워했던 천덕스런 죽음도 안요...고통속의 죽음도 아닌...그렇게 편하게 조용히 자다가 간 것이다. Peace

 사실 쫑이 나갔을 때와 마루가 병으로 갑작스레 죽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수의사의 말 그대로 미미는 개로치면 무병장수한 것이고 또 어머니의 바람대로 안락사가 아닌 집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은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애완견을 새끼때부터 길러서 나이먹어서 쓰러질때까지 키운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인데 그래서 역시 미미의 죽음이 시원섭섭한 것 같다. 이제 당분간 집안에서 기르는 개는 안 키울 생각인데 참 신기한 것은 좋아진 건지 나빠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개가 없어도 그다지 아쉽거나 그러지 않다는 것이다. 뜨겁게 생을 살다가도 가끔은 냉정하게 세상에 익숙해지는 법을 조금은 알게해 준것 같아 미미에게 마지막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Good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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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일기

Posted 2008. 8. 21. 15:56, Filed under: Ex-Homepage/Essay

 리포트 디스켓 안에 끼어있네요..무모하게도 수십권의 일기장을
하나하나 다 타이핑 하려고 했었다니..-_-;; 아마도 스캔을 하게될듯
싶군요..얼마전에 스캐너도 샀거든요~! 그렇다고 다는 아니고요..

                                                                           05 Dec 03

 



 이것은 내가 예전부터 썼던 일기를 전산화(?) 하는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라이터를 하나 사서, 씨디로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아니..내가 아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보여주고 싶다. 원본은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올린다. 단 띄어쓰기는 되도록 바르게 하려고 했다.

                                           ---1999년 4월 16일 밤 10시 38분...


1988년도의 일기는 매우 많다. 왜냐하면 다 이것은 송파국민학교 3학년때 담임선생님이시던

이보경 선생님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거의 매일 일기 검사를 하셨고, 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정말 무서운 일명 쌍따귀를 때리셨다. 나도 겁에 질려 거의 억지로 일기를 쓰게 되었다.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을 해보니 그 선생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정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1988/3/11                   수영


오늘은 수영을 가는 날이다. 그렇지만 어머니께서 이빨이 아프셔서 수영을 못가게 되었다.

나는 기분이 나뻤다. 어머니께서는 더욱 화가 나신 것 같았다. 그 이유는 형이 피아노도 않가고 수영도 안 갔기 때문이다. 형은 기뿐 모양인지 웃으면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 피아노 소리는 엉망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안 게시니 맘이 편한가 보다. 나는 벌써 피아노를 갔다가 왔다. 나도 화가 많이 났다. 또 형은 소나티내를 이렇게 쳤다. 잘 안쳐지면 아무 건반이나 꽝꽝하고 쳤다. 기분이 나쁜 날이다.


1988/3/12  맑음                       왕눈이


  오늘 동네에서 왕눈이 놀이를 하였다. 나는 전보대, d동, a동 등 많이 달려서 숨이 찼다. 상민이 형과 태현이 형이 방해를 놓았다. 상민이 형은 도희누나를 울렸다. 그때 도희누나의 오빠가 왔다. 상민이 형은 많이 혼났다.


1988/3/14  비오다 갬                  조회


  학교에서 조회를 하였다. 방학이 끝나고는 처음으로 조회를 하였다. 반장 부반장에게는 임명장을 주었다. 반장이 먼저 나갔다. 그때마다 박수가 터졌다. 다음은 부반장이 나갔다. 그때도 박수가 터졌다. 나도 박수를 받았다. 이렇게 많이에게 박수를 받은 것은 처음이다.


1988/3/15  맑음                       공부


  오늘 공부를 하였다. 재미있게 노는데 형이 나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도망칠라고 애를 썼지만 그렇게 않되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들어와 공부를 하였다. 공부는 재미가 없다.


1988/3/16                          수영장


  오늘은 수영을 갔다. 너무 늦어서 이모가 차로 태워 주셨다. 그렇지만 이모께서 차를 천천히 몰아 주셨다. 나는 화가 났다. 수영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부리나케 뛰어 들어갔다. 수영장에 들어가 보니 모두 수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부대를 잡고 수영을 하였다. 수영을 하고 나오니 몸이 시원하였다. 나는 성질이 너무 급하다.


  선생님: 승민이는 똑똑하구나. 자기의 성질이 급한 걸 아니까 고치도록 노력도 해 보아야 겠지


1988/3/19                     롯데 자이언츠


  학교를 다녀와서 롯데 자이언츠을 회원하려고 그랜드 백화점으로 갔다. 거기에 있는 롯데리아점으로 갔다. 물어보니 다 끝났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화가 나셨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그랜드 백화점에 온 김으로 저녁을 먹고 가자고 하셨다. 나는 양식집으로 가서 돈까스를 먹었다. 형은 비후까스를 먹었다. 집에 오다가 문방구에서 만들기도 구경했다.


1988/3/20                     공작


  교회에서 공작을 하였다. 유년1,2반은 준비물이 크레파스고 유년 3반과 초등1,2,3반은 가위, 풀, 그레파스 이다. 오후 예배때 준비물을 가지고 갔다. 나는 너무 바빠서 가위대신 칼을 가지고 갔다. 제일 먼저 와 있었다. 조금 후에 박지훈이 왔다. 예배도 드렸다. 2부 순서에 공작을 하였다. 나는 칼을 가지고 오기를 잘했다. 그 이유는 칼로 잘라야 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이 끝났다. 전도사님이 낼꺼냐고 물어 보셨다. 잠깐 생각하다가 집으로 가지고 간다고 말했다. 나는 집으로 혼자 돌아왔다. 형이랑 갇이 올 것 그랬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밖에 정재훈이 있었다. 야구공을 가지고 나는 나갔다. 정재훈이 야구 배트를 가지고 왔다. 내가 가위, 바위, 보를 졌다. 정재훈이 먼저 배트를 잡았다. 나는 야구공을 던졌다. 정재훈이 아주 세게 번트를 했다. 그 공이 하필이면 도희누나 오빠가 맞았다. 그 형이 화가 나서 공을 던져버려 잃어 버렸다. 화가 났다. 집에 들어와서 생각해보니 오늘은 공부를 하나도 안했다. 할려고 하니 저녁이라서 못했다. 다음부터는 일찍 공부를 하겠다.


   선생님: 도희한테 사과는 안했니?


1988/3/21 월요일                  이항복


  이항복이 어렸을 때다. 항복이네는 여자 머슴이 한 명 있는데 욕심이 많았다. 어느날 항복이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밖에 나가셨다. 인제 집에 남은 것은 항복이와 머슴 밖이 안 남았다. 항복이는 이때 머슴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밖에 나가는 척 했다가 집안에 숨었다. 머슴은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광쪽으로 가서 쌀 한가마를 가지고 왔다. 이때, 항복이가 와서 왜 쌀을 가지고 오냐고 물으니까 머슴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쌀을 훔쳤습니다."

그러자 항복이는

  "거지에게, 쌀을 주려고?"

머슴은 아니다고 말하며 계속 하던 말을 되풀이 했다. 이때 머슴은 주인이 알고도 그런다는 것을 알자 울음을 터뜨리고 그 못된 욕심도 뉘우쳤다는 이야기다.

  나도 항복이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겠고, 또 머슴처럼 욕심을 안 내며, 설마 욕심이 있어도 뉘우 치겠다.


  선생님: 잘 썼어요


1988/3/24                      카레라이스


  오늘 저녁은 카레라이스로 먹었다. 어머니께서 정성들여 만드신 카레라이스는 정말 맛있었다. 양파, 감자, 홍당무를 겯들어 먹으니 더 맛있었다. 그런데, 엄마께서 안 잡수시기 때문에 조금 쓸쓸하였다.


  선생님: 침이 꼴깍.....


1988/3/26                    콜트25


  아버지를 따라서 차를 탔다. 차는 씽씽 달렸다. 아버지께서 장난감을 사주신다기에 둔촌 종합상가를 가는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어머니께서는 수영장에 들어 가셨다.어머니도 사회체육센타 회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들어가신지 조금 후에 아버지와 함께 상가로 들어 갔다. 먼저 이층으로 올라 갔다. 이층에는 완구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오천원 한 장을 주시면서 2500원씩 나누어 쓰랬다. 나는 콜트 25를 샀다. 형은 돈이 모자란다면서 아무것도 안 샀다. 나 혼자만 사니 쓸쓸했다.


1988/3/27                  할아버지 추도식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일산 공원묘지에 갔다. 먼저 예배를 보고 준비해간 먹을 것을 먹었다. 은별이네 가족도 왔다. 은별이는 두 살인데 길을 가다가 자주 넘어지면서도 좋아 했다. 집에 돌아올때는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러 가다가 함께 냉면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니까 할머니께서 큰 오렌지 두 개를 주셨다. 집에 와서 먹어보니 달콤하면서도 씁쓸했다. 오늘은 참 보람있는 날이었다.


1988/3/29                 생일잔치


  생일잔치에 갔다. 병선이의 생일이다. 우리가 갔을때는 병선이가 없었다. 나는 최관순과 같이 기다리다가 황명호네 집으로 갔다. 명호는 서둘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페리칸 문구에서 연필 한타스를 샀다. 공짜로 아저씨가 포장을 하여 주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1988/3/30              금도끼은도끼


  옛날에 가난한 나무꾼이 살았는데 깊은 산속에 나무를 하러 들어갔다. 나무를 하는데 잘못해서 도끼가 연못속에 들어가서 울고 있을 때 산신령이 나타나 외 울고 있냐고 묻자 처음일부터 있었던 일을 말했다. 산신령은 많은 도끼를 가지고 왔다. 정직한 나무꾼이 쇠도끼를 고르자 산신령은 정직하다면서 도끼를 모두 주었다. 나무꾼의 앞집에는 욕심장이 할아범이 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도 나무를 하러 들어갔다. 나무꾼과 똑같이 울고 있는데 여러도끼를 들고 올라왔다. 어느 도끼가 너것이냐고 묻자 할아범은 금도끼가 자기 것이라고 하였다. 산신령은 연못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정직한 나뭇꾼처럼 되고 싶다.


1988/3/31                풍진


  학교에서 풍진 예방주사를 맞았다. 처음에는 정의정이 맞았다. 정의정은 '아야'하고 소리쳤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아플 것 같았다. 나는 다른데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주사를 다 맞았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1988/4/2             금으로 만든 손


  다림이는 여름인데도 장갑을 끼고 다녔다. 다림의 친구들은 다림이를 마구 놀렸다. 다림은 친구들과 싸웠다. 어느 친구 한명이 다림의 장갑을 뺐다. 다림의 손은 마구 이그러저 있었다. 다림은 울면서 집으로 갔다. 다림은 어떳게 된 것이냐고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말해 주었다. 다림이는 손이 자랑스럽다고 인제 부터는 장갑을 안끼고 다닌다고 하였다. 나도 다림이처럼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1988/4/4            돈까스


  오늘 저녁은 돈까스로 먹었다. 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돈까스는 맛있었다. 거기다가 A1소오스를 쳐서 먹었다. 스우푸도 먹었다. 케찹도 먹었다. 어머니는 이런 것을 양식이라 말씀하셨다.


1988/4/5          괴산


  오늘 괴산에 가서 쑥을 땄다. 아버지께서는 군용삽으로 풀을 뿌리채 뽑으셨다. 할미꽃도 한송이 뽑았다. 오는 길에는 냇물에서 개구리 한 마리를 잡을라고 했는데 놓쳤다. 갈대도 뽑았다. 차를 타고 오는데 군인의 탱크와 헬리콥터도 봤다. 총도 봤다. 집에 돌아오니 잠이 왔다.


1988/4/7            학교


  학교에서 민석이가 거짓말을 해서 약 17명이 선생님께 혼이 났다. 민석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혼났다. 선생님께서는 직접 듣지 못한 이야기는 퍼뜨리지도 말고 믿지도 말라고 하셨다. 오늘은 도덕을 못했지만 큰 것을 배웠다.


1988/4/9  토요일             생일


  조윤의 생일이라서 조윤네집에 갔다. 음식도 많이 주었다. 비디오로 '이소룡'도 보았다. 딱부리 놀이도 하였다. 사진도 찍었다. 케잌도 먹었다. 재미있게 놀다가 집으로 왔다.


1988/4/10                   만수탕


  오늘은 만수탕에 갔다. 석원이형, 승협이형, 나 이렇게 셋이 갔다.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들어갔다.그런데 어떤 할아버지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화가 났다. 또, 목욕탕에서는 빨래를 못하게 되어 있는데 그 할아버지는 빨래를 하였다. 나는 오늘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봤다. 나는 규칙을 어기지 않겠다.


  선생님: 나부터라도 지켜야지요?


1988/4/12                준비물


  오늘은 아침에 준비물을 샀다. 준비물은 모형온도계였다. 여러군데 다녔지만 없었다. 나는 멀리까지 가서 샀다. 50원이었다. 아주머니께서는 다음부터 많이 오라고 하셨다. 집에 돌아오니 8시 15분이었다. 나는 이제 미리 준비하겠다.


  선생님: 저녁에....


1988/4/13 수요일                   현장학습준비


  내일은 행주산성으로 현장학습을 간다. 나는 오늘부터 배낭에 먹을 것을 많이 챙겨 넣었다. 어머니께서는 멀미약을 알아보신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내일 김밥을 싸주신다고 하셨다. 귀미테는 반쪽만 붙여도 부작용이 심하여 먹는 약을 사주신다고 하였다. 내일이 기다려 진다.


1988/4/14 목요일              현장학습


  행주산성에는 대첨기념관이 있었다. 그 곳에는 옛날에 쓰던 무기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권율장군의 동산도 참 멋있었다. 또, 귄율 장군의 초상화도 보았다. 숲풀이 우거진 것을 보고 나는 '이제 나무가 자라나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개나리와 진달래도 피어 있었다. 점심을 먹고 간식을 먹었다. 집에 돌아올때는 한강물이 참 깨끗하였다. 차 안에서는 마이크를 데고 노래도 불렀다. 학교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더욱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성이 있는 지는 몰랐다.


  선생님: 잘썼어요


1988/4/17                청소


  아침에 우리 앞 마당을 쓸었다. 처음쓰니까 조금 힘이 들었다. 연탄재가 마당에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거기부터 쓸었다. 쓸고 보니 연탄재가 없어서 깨끗하였다. 다른데도 쓸었다. 다 쓸고 보니까 상쾌하였다. 또 줄넘기 연습도 하였다.


1988/4/18                      짝바꾼 것


  학교에 한종일이라는 아이가 전학 왔다.그래서 선생님은 자리를 바꾼다고 하셨다. 여자는 여자끼리 앉고 남자는 남자끼리 앉았다. 나는 황명호와 짝이 되었다. 황명호와 앉으니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2학년때부터 같은 반 이기 때문이다.


1988/4/19                     비온날


  비가 왔다. 소낙비는 아니고 보슬보슬 내렸다. 학교에서 3째 시간이 끝났다. 선생님께서 관순이와 같이 백엽상에 가서 온도를 재어 오라고 하셨다. 나가보니 비는 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진흙탕은 그대로 있었다.


  선생님: 일기를 조금 더 많이씩 써보렴...


1988/4/20                  벌받은일


  학교에서 단체 기합을 받았다. 음악시간인데 아이들이 떠들고 음악책도 안 끄냈기 때문에 단체 기합을 받았다. 머리를 뒤로 져치고 팔을 들고 투명의자를 하여서 정말 힘들었다. 코가 막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리도 아프고 팔도 아팠다. 음악책을 안 끄낸 사람은 앞에 나와서 더 심한 벌을 받았다. 그 때 우리는 일어서서 눈만 감고 있었다. 선생님은 다 우리 때문에 벌은 받은다고 하셨다. 다음부터는 빨리빨리 음악준비를 빨리 하겠다.


1988/4/21                   체육시간


  체육이 오늘 들었다. 후프를 가져오라고 선생님께서 미리 알림장에 써 주셨다. 학교에 오니 아이들은 복도에서 후프를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다른 과목을 할 때 마다 체육시간이 기다려 졌다. 드디어 체육시간이 되었다. 줄을 스고 간단한 체조를 한다음 후프놀이를 하였다. 줄넘기 굴 지나가기 , 후프돌리기 등 많이 하였다. 후프돌리기는 잘 안되었다. 나는 당번이라서 체육시간이 다 끝나고 들어가 청소를 하였다.


1988/4/22                    나무심기


  오늘은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를 갔는데 오늘은 체육이 들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나무를 심기 때문에 체육책으로 공부를 하였다. 선생님은 나무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나무 심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1988/4/23                       시험공부


  오늘은 시험공부를 하였다. 시험공부라 더 하였다. 시험 공부는 싫었다. 엄마는 틀린 것은 혼을 내주셨다. 부반장이 모범을 보여야지 하면서 더 혼난적이 많다. 나는 부반장이다. 나는 우리반에서 모범을 보이도록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


1988/4/24                  내일을 향해 달려라


  병태라는 축구를 잘 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다리가 다쳤기 때문에 운동을 할 수 없었다. 소년 체전 대회는 몇 주일 않남았는데 다리는 낫지 않았다. 경기가 있는 날 병원에 쪽지를 남겨놓고 경기장에 갔다. 거기에 가서 축구대회를 이겼다. 나도 어려운 일을 당해도 병호처럼 노력하여서 꼭 성공하겠다.


1988/4/26                    시험공부


  아침에 아버지께서 공부 시간표를 짜라고 하셨다. 오늘은 마침 공휴일이라서 아버지께서 집에 계셨다. 학교에 안 가니 집에서 공부를 하였다. 공부는 8시간동안 계속 되었다. 1시간에 10분씩 쉬기도 하였다.


1988/4/27                    시험(1차)


  오늘은 시험이다. 나는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연필을 잡았다. 긴장해서 글씨도 잘 못볼 지경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배운 것을 내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자꾸 가슴이 두근 거렸다. 나는 문제가 다 맞았는지 틀렸는지 궁금하였다.


1988/4/28                   시험(2차)


  오늘은 시험을 보았다. 2차 시험이었다. 어제보다 더 조마조마하고 긴장되었다. 나는 꼭 다 틀릴것만 같았다. 나는 모르는 문제도 나왔다. 선생님은 산수에서 하나가 틀렸다고 하셨다. 나는 실망이 컸다.


1988/4/29                  시험지 나나준일


  선생님께서 시험지를 나눠 주셨다. 나는 7개나 틀렸다. 다 7개 이상 틀렸다. 선생님은 화가난 목소리로 "7개가 뭐냐!" 하고 화를 내셨다.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엄마, 아빠한데서 꾸중을 들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찔끗했다. 다음부터는 잘 보겠다.


1988/4/30                 형과 아우


  돌이와 솔이가 살았다. 어느날, 아버지께서 선물을 사오셨다. 돌이는 연필깎기이고 솔이는 로봇였다. 그런데 솔이는 로봇을 안빌려주었다. 돌이와 솔이는 싸움을 했다. 어느날 솔이가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 돌이는 작은 손가방에 장난감을 넣고 병원에 가 솔이와 재미있게 놀았다. 나는 형과 사이가 나쁘지 않겠다.


1988/5/1                    청소


  오늘 이진황과 함께 근린공원에 가서 줄넘기도 하면서 청소도 했다. 쓰레기통 주위에는 유리조각이 많았다. 다 뾰족하였다. 모래밭에는 종이쪽지가 많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치웠다. 기분이 상쾌하였다.


  선생님: 힘은 들지만.....


1988/5/3                 작은고모댁


  오늘 7시경에 작은 고모낵에 갔다. 할머니께서 외국에 가셔서 거기에 갔다. 레몬쥬스도 먹었다. 거기에 있는 씨도 먹었다. 배가 이상하였다. 할머니께서 외국에 가시니 쓸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1988/5/5/목요일                 어린이날


  어린이 날이다. 석우와 석원이형이 왔다. 석우와 나는 집에서 있겠데는데 석원이형과 승협이 형이 가재서 63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제목은 나이아가라라이다. 꼭 폭포에서 우리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재미있으면서도 무서웠다. 영화를 다보고 한강시민 공원에 가서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것도 보았다. 점심도 먹었다. 참 재미있었다.


1988/5/6/금요일                 체육


  학교에서 4째시간에 운동을 했다. 원래 도지볼을 해야 되는데 수위아저씨가 운동장에 물을 뿌려서 다른 운동을 하였다. 막상 해보니 재미있었다.


1988/5/8                     이모네 댁


  오늘은 어버이 날이다. 그래서 이모네댁에 갔다.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외할머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할머니가 계시다. 석우도 있었다. 석우와 형과 나는 피구를 하였다. 그러다가 석우와 내가 싸움을 하였다. 내가 잘못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다.


1988/5/10/화요일             야구


  학교에 갔다와서 아랫집 재훈이와 야구를 하였다. 재훈이가 던진 공을 내가 쳤다. 그 공은 높이 떠서 멀리 날아갔다. 나는 1루에 갔다가 다시 홈으로 왔다. 7대 0이 되었을 때 재훈이 팀에서 1점을 얻었다. 그래도 7대 1로 우리팀이 이겼다. 기분이 좋았다.


1988/5/12                     놀이


  오늘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놀았다. 지훈이도 갔치 놀았다. 총싸움도 하였다. 재미있었다. 아버지가 앉은 스케이트 보드를 밀기도 하였다. 기분이 좋았다.


1988/5/15/일요일                청소


  오늘 아침에 어머니 심부름을 하고, 돌아오다가 마당을 조금 쓸었다. 별로 상쾌하지 않았다. 먼지도 많이 남았다. 다음부터는 마당을 많이 쓸겠다.


1988/5/17                        놀이


  오늘은 밖에서 태용이, 배찬희, 재훈이와 같이 놀았다. 제기 차기도 하였다. 총싸움도 하였다. 거이다 재훈이가 졌다.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 부반장답게 좀 더 많이씩 쓰렴....


1988/5/18                      날씨


  오늘은 날씨가 매우 더웠다. 오늘은 체육이 들었는데 매우 더워서 땀도 났다. 오늘은 거의다 신체검사를 했다. 도시락을 먹고 1시 25분 동안 운동장에서 놀았다. 놀기도 힘이 들었다.

'괜히 긴팔을 입고 왔나 보다.' 하고 생각도 했다.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오니 시원하였다.

 

1988/5/19                     체육시간


  오늘도 체육시간이 들어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줄을 안 서서 다시 들어왔다. 반장 부반장들은 더 혼났다. 다리가 아팠다. 학교에 들어가 복도에도 서 있었다. 힘이 들었다.

    힘이 든

    체육시간


    할려다가 혼나는

    체육시간


1988/5/23                   석가탄신일


  오늘은 석가탄신일이다. 또한 승협이 형 생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형은 5월 14일날 생일을 하였다. 우리 식구는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절 같은데에 가지 않았다. 집에 앉아서 텔레비젼이나 보았다. 특히 손오공이 해서 신이 났다. 아이스크림도 같이 먹었다. 점심은 국수로 먹었다. 맛이 있었다. 텔레비젼을 다 보고 손오공 놀이도 했다.

      석가탄신일


   아침부터 웅성웅성

   텔레비젼 키고

   따르륵, 다르륵

   몇 번을 볼까?


  모두다 아침부터

  절절절 뿐이니

  차라리 안보지.


  "손오공 할려면

   1시간이 남았는데...."


  에라 모르겠다

  1시간동안

  배드민턴이나 치자.


1988/5/24/화요일             수박


  학교에 갔다 오고 한참 후 어머니께서 큼직한 수박을 한덩이 사오셨다. 먹고 싶어 졸르다가 야단을 맞지만 기분이 좋아서 생긋 웃음 꽃이 핀다. 수박을 먹을 때 형은 10분쯤에 맛있는 수박을 5개나 먹었다. 나도 빨리 먹다가 씨를 10개쯤 삼켰다.


   수박


  수박은 장난꾸러기

  자기가 잘 익었나

  못 익었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알지?

  때려볼까?

  들어볼까?

  구별하기

  정말 힘드네


  선생님: 재미있는 시구나. '나의 문집'에 써보렴


1988/5/25/수요일               할머니


  오늘은 20일 전에 유럽에 가셨던 할머니께서 돌아 오시는 날이다. 우리 식구는 공항을 갔다. 사람도 많이 있었다. 입구에서는 자동차 트렁크와 엔진이 들어 있는 곳을 경찰 아저씨가 조사하였다. 안에 들어갈때도 여자 경찰관과 남자 경찰관이 몸을 조사했다. 외국인들도 많이 나왔다. 할머니가 나오셔서 나는 기뻤다.


   공항


공항은

전투모함

비행기는 많다.


공항은

외국인들의

자동차


탑승구에서

할머니들어가면

서운하지만...


탑승구에서

할머니 나오면

너무 기뻐서


할머니~할머니~

부르며 탐승구로

뛰어 갔지


1988/5/26/목요일                     놀이


  오늘 저녁에 저녁밥을 먹고 조금 쉬면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콩미니 탱크로 장애물 경주도 하였다. 형과 나와 아버지는 자주 엔진을 고친다고 돌아이바를 자주 꺼내어 나사를 풀고는 했다. 그러다가 형이 덤블링 오토바이 장난감을 꺼내어 가지고 놀았다. 그것은 5월 23일날 형생일이라고 아버지 어머니가 그것을 사주신 것이다. 나도 얼른 생일이 됬으면 좋겠다.


     장난감


장난감은 아침에

죽어있고,


점심때는 활기차게

움직이고


밤에는 장난감

바구니에서,

잠을 자지


거기가

집인가봐.


  선생님: 동시가 재미있어요. '나의 문집'에.....


1988/5/28/토요일              까치와 구렁이


 어느 선비가 한양에 가는데 나뭇잎의 새집에는 새끼 까치가 있었다. 선비가 잠깐 보는 사이에 나무 위로 구렁이가 올라가서 새끼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선비가 활로 쏴 죽였다. 다시 길을 가는데 밤이 되어서 불빛이 나는데로 가 보았다. 거기서 잠을 자는데 일어나 보니 구렁이가 자기 몸을 감싸고 있어서 살려달라니까 높은 곳에 있는 종을 3번 울리라고 했는데 못 울려서 죽을라고 할 때 종이 울려서 살았다. 그 아래로 가보니 까치 수백마리가 머리가 깨져서 있는 것을 묻어 주었다. 나도 은혜를 받으면 꼭 보답하겠다.


1988/5/29/일요일                         늦잠


  오늘은 늦잠을 잤다. 어제 밤에 동창회에서 12쯤에 와서 오늘은 9시 30분에 일어났다. 그래서 교회를 못갔다. 아버지께서는 "8시 30분에 깨어줄라고 했는데..." 하고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얼른 가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예배는 9시에 시작해서 가지 못하였다. 어쩐지 힘이 빠져서 힘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겠다.


  늦잠


늦게 잤다가

늦게 일어나는

늦잠


늦잠을 않잘려고

해도 왜 이러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늦잠인 것 같다.


1988/5/31      화요일          분수에 맞는 생활


슬기는 오늘 보람이와 같이 학교를 가는데 또 슬기는 샤프펜슬 하나를 사러 보람이를 끌고 문방구로 들어갔다. 보람이는 "슬기야 고장안나고 튼튼하면 되지 꼭 새것을 또 사야되니?"

하고 핀잔을 주자 슬기는 화를 냈다. 거스른 돈이 남자 보람이를 데리고 오락실을 갔다. 학교 조회시간때, 한샘이와 구슬이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푼돈을 모아 지난 토요일 마을 경로당에 담배, 과자, 과일을 사갔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보람이와 슬기는 교실에서 부끄러워 얼굴도 못 쳐들었다. 나는 슬기처럼 낭비를 하지 않겠다.


쉴틈없이

들리는

호르라기

소리


힘들어 팔을

천천히

돌리면


꼬르륵 꼬르륵

가라앉지요


1988/6/6 월요일          현충일


오늘은 현충일이다. 10시에 사이렌 소리와 함께 1분간 묵념을 하였다. 10시 30분에는 만화'해돌이의 모험'을보았다. 해돌이의 아버지는 북괴군에게 끌려갔는데, 해돌이와 천사 예삐가 아버지를 구한 이야기다. 웃긴데도 있고 슬픈데도 있으며, 아슬아슬한 곳도 있었다.또 할머니댁에 가서 재미있게 놀았다.


현충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의 넋을

위로 하는 날


죽은 우리

용감한 군인

들의 가족을

위로하는날


10시에 싸이렌

이 울리면,

1분간 묵념하는 날



1988/6/7화요일                    자습


오늘 학교에서 일요일 신문을 점심때쯤에 나누어 주어서 한문을 못썼다.내가 장난을 쳐서 다 못썼다고 생각도 되며 한편은 시간이 너무 조금이어서 못썼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늦게 썼어도 지금까지는 하나도 않밀렸었는데 오늘 하루만 밀렸다. 다음부터는 밀리지 않겠다.


자습


아침부터

조용히

한다.

무슨일 일까?


모두들 신문에서

한문문제를 띠어

자습을 한다.



198/6/8 수요일                '금바위야 미안해'를 읽고


체육시간에 축구 경기를 하였다. 두 팀다 열심히 경기를 했다. 금바위가 공을 몰고 가는데 은바위가 발을 걸어서 싸움이 일어났다.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 싸움을 말렸다. 그래서 선생님은 축구 경기가 중단돼었다.교실에 들어가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은바위는 금바위에게 사과를 했다. 나는 은바위처럼 남을 일부로 걸지 않고 규칙을 잘 지키겠다.


동화책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책


재미가 있고

흥미를 느끼는

동화책


우리가

열심히 읽으면,


그 동화책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이지


낄낄거리는

만화책보다


심심할 때

읽는

동화책이 훨씬더

재미있지


1988/6/9 목요일             리코더


오늘 학교에서 리코더를 불렀다. 음악시간에는 삐삐소리가 울렸다. 오늘은 도시라솔파미레도까지 다 배웠다. 선생님은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하셨다. 나는 도시라솔파미까지는 잘 하는데 레도가 잘 않된다. 선생님은 하루에 10번씩 연습을 하라고 하셨다. 연습을 하겠다.


리코더


4번째 시간

음악시간


우리는

리코더를

만지작, 만지작


선생님의

눈이 내 리코더

를 가리킬까봐


서랍속에

숨기지


1988/6/11                  마법사


옛날 어느 나라에 가난한 부부 한 명이 임금님이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남편은 마법사로 꾸미고 대궐에 갔다. 그때 마침 임금님이 보석들이 모두 없어졌다. 그래서 임금님은 마법사에게 찾아달라고 했다. 마법사는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진짜 보물을 찾았다. 그래서 왕은 그 부부에게 큰 상을 내렸다. 나는 그 남편처럼 머리를 써가지고 나에게 이로움을 받겠다.


마법사


마법사란

진짜 있는

것 인가?


아니면 가짜

인가?


나는 가짜

로 생각한다


1988/6/12         김만철씨


오늘 만나교회에서 김만철씨의 간증을 들었다. 마이크를 데고 하는데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거이가 북한 동포, 북한의 괴로움 이야기 같았다. 나는 김만철씨가 사투리를 하는 것 같았다. 너무 작아서 잠도 왔다. 그래서 김만철씨를 본지 20분도 않되서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갔다.


김만철씨


불쌍한 우리

이북 사람들


김만철씨는

목숨을 걸고

탈출을 했다.


공산당이 싫어서

탈출한 것 같다.


선생님: 참 좋은 느낌을 적었구나.


1988/6/14                   생일


오늘은 이정만의 생일이다. 나는 학용품을 사가지고 갔는데 집을 몰랐다. 나는 강석민이 근처를 알으켜 주어서 겨우 찾았다. 거기는 '방현종, 이진황, 이상현, 또 1명'이 있었다. 보물찾기를 했는데 이진황이 연필 1자루를 탔다. 아까왔다.먹을 것도 많이 먹었다. 개도 2마리 있는데 자꾸 '멍멍'거렸다. 생일이라도 몇 명 않왔다. 재미있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생일


이정만 생일

즐겁게 놀자


이정말 생일

보물을 찾자


이정만 생일

맛있게 먹자


선생님:나의 문집에...


1988/6/15 수요일                    민방위 훈련


학교에서 끝시간인 도덕시간때 싸이렌이 교실에 '에에엥'하고 울렸다.우리는 얼른 책상밑으로 들어갔다. 스피커에서는 한참 목소리가 울렸다. 공습경보가 경계경보로 바뀌었다. 공습경보는 한 40분 쯤 울렸다. 스피커에서는 말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아이들은 계속 떠들기만 하였다. 선생님은 화가 나셔서 여자만 나가게 하고 우리들은 계속 있으라고 하셨다. 아이들은 무서운지 갑자기 조용해 졌다. 공습경보가 끝나자 우리도 나갔다.


민방위 훈련


'에에에에앵'

들리는

스피커 소리


우리들은

책상속에

얼른 숨어서,


끝날때까지

숨어있지


1988/6/16 목요일                     체육시간


오늘 마지막시간은 체육시간이다. 체육시간에는 달리기를 하였다. 나는 일등으로 달리다가 점점 뒤쳐져서 4등을 하였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 힘이 들었다. 우리 학교 운동장을 2바퀴 반을 도니까 걷기도 힘이 들었다. 나는 여자들이 하는 걸 보니까 2바퀴만 돌았다. 남자는 '장남오'가 1등, '최관순'이 2등을 하였다. 나는 '장남오'와 '박지영'이 달리면 누가 이기는지 모르겠다.


체육시간


체육시간이

왔다.


달리기하는

체육시간이

왔다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체육시간이

왔다.


선생님:잘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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