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널드화와 어플루엔자
Posted 2008. 8. 21. 16:22, Filed under: Ex-Homepage/Essay*이글은 2004년도 교양수업 '미국문화와 예술'을 들을때 쓴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입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란 책과 '어플루엔자'라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두 책은 모두 미국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저자들이 비인간화 및 소비중독에 대한 현재 사회의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수업 이후에 제 나름대로 패스트푸드와 여러가지 쓰잘데기없는 낭비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데요.....실제로 알면 보인다고, 그렇게 생활패턴을 조금씩 바꿔가니 돈도 절약되고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일석이조였습니다. ^^ 내용이 그렇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 글을 읽어보시면 자신의 귀한 자산인 시간과 '돈'이 조금씩 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바꿔보는건 어떨까요?
3월에 개강을 하면서부터 집에 있는 시간이 부쩍 줄었다. 같은 서울 안에 있지만 학교가 꽤나 먼곳에 있는 이유로 아침에 집을 나오면 밤 늦은 시간에나 집에 돌아간다. 당연히 집은 종종 비게 되는데 그때 가장 귀찮은 문제는 택배를 받을때 생긴다. 언제부턴가 나는 발품을 파는 수고를 덜고 가격 면에서도 조금 싸게 살 수 있는 온라인 쇼핑몰을 자주 이용하곤 한다. 그런데 택배는 도착하는 날짜를 알 수는 있지만 정확한 배달시간을 알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오기로 한 날은 물건을 받기 직전까지 매우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물건을 사면 살수록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한가지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새로운 종류의 스트레스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물건을 왜 산것일까? 내가 소비를 하는 이유는 그 물품이 꼭 필요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필요를 넘어서는 지출을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행복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물건을 산다. 그러면 정말 그것을 사니까 행복한것일까? 굳이 물건의 전달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문제점들이나 의미없이 쇼핑몰을 방황할 때 생기는 시간적인 소모를 들추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구입해서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꽤나 깐깐한 고객이라고 자부하지만 한두번만 더 캐물어 볼때 나는 쓸데없이 돈을 낭비한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없었다면 모든 문제들 그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골치덩어리의 여러 속성과 발생 과정 등을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와 ‘어플루엔자’, 이 두책은 내용면에서는 가볍게 여길만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다른 사회과학서적들과는 달리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많은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는 맥도날드화를 일종의 비정상적인 합리화의 패러다임이라고 정의한다. 처음 읽을 당시에는 이름 자체부터 쉬워보인 맥도날드화였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그리 만만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맥도날드화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적으로 합리화가 가지고 있는 효율성 등의 장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 사회와 그 밖의 세계의 많은 부문에서 현대문명의 ‘악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맥도날드화는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방식으로 번지는데 그는 그것을 합리화 과정에서의 한 단계로 보고 있다. 그는 합리화의 궁극의 모습이 관료제라고 여겼던 막스베버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얼핏 생각하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나치의 유대인대학살,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 포드의 컨베이어시스템, 레비타운, 쇼핑몰 등을 차례대로 설명하면서 그러한 것들이 현재의 맥도날드화가 나타난 배경이자 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합리화 단계의 할아버지격인 관료제를 언급할때는 베버가 우려했던 ‘철장감옥(Iron Cage)'이라는 합리화의 부정적인 언급하며 현재의 맥도날드화가 그때 그 시절의 철장감옥의 변형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철장감옥이 의미했던 것은 사회 전체가 합리적 제도로 이루어진 빈틈이 없이 견고한 그물망, 즉 감옥이라는 것인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현대인들은 더욱 단단해진 감옥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교육, 스포츠, 정치, 종교 등의 사회 전 범위에 걸쳐 있다니 이건 감옥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교도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얼핏 생각해보면 ‘합리’라는 말이 그리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으로는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를 많이 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우리와 우리 사회가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 책을 읽을때는 곳곳에서 거부감이 들거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주장들을 볼수 있었는데 그것 또한 습관처럼 일상을 살아온 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합리화의 오류는 무엇일까?
우선 저자는 합리화 자체는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만들지는 몰라도 사람 자체는 바보로 만든다고 한다. 에코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야만이 그 지배가 수월하다고 했는데, 합리화는 어딘가에 숨어있는 빅브라더들이 인간을 지배하기 용이하도록 해준다. 합리성과 관련하여 조금 더 맥도날드화의 특성을 분류해 본다면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그리고 통제라고 볼수 있다. 형식적 합리성의 전제조건인 효율성과 ‘양=질’이라는 희한한 등식을 성립시키는 계산가능성 및 시스템적인 자동화로 고객을 통제하는 일 등은 각기 나름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고 있다.
맥도날드화는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덩달아 패스트푸드점에 익숙해진 살마들은 그들의 삶에 모든 분야에서 또한 효율성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효율적’이라는 말 자체의 어감은 현대인을 좀더 세련되고 살아가는데 적합한 인간형이라는 뉘앙스를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질에는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묻는다면 또 궁금적인 효율 모델만을 찾아 올라갔을때 그 결말이 어떤 모습일지를 묻는다면 우리의 합리화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알수 있다. 뿐만아니라 효율이라는 미명아래 감추어진 지극히 잘못된(그러나 쉽게 인식할 수는 없는) 비효율적인 사항들, 예를 들자면 고객의 선택의 폭을 좁게 만들고 또 그들로 하여금 부수적인 일등을 하게 시키는 따위의 일들을 현대인이 당연한 듯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효율성 자체에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큰 장점만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셀프서비스는 마치 우리의 의무가 그 서비스의 과정에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단지 상황에 익숙한 소비자들이 무감각해서 그렇지 따지고보면 이미 우리가 지불한 돈에는 서비스에 대한 비용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소비의 주체인 고객의 권리와 의무가 혼동되기 쉽다. 그러면 가장 기본적인 소비자의 권리인 ‘만족’이 침해를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인간은 사회시스템에 종속되어간다. 맥도날드화를 우려하는 글쓴이는 그러한 폐해가 대학사회, 의료기관, 오락 등 어느 분야에서도 예외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효율성은 비인간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고객이나 종업원을 대할때는 한 가족처럼 여겼던 예전의 개념이 사라졌다. 자동화에 따른 단순노동직의 증가와 비정규직의 증가, 저임금 체계의 만연은 지금도 문제이지만 종국적으로는 소유자에 의한 인간지배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뿐만아니라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이 사라지면서 가정의 붕괴 조짐이 나타난다. TV만을 보며 식사를 하고 바쁜 생활 속에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는 일상에서는 가정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창의성,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적이고 무덤덤한 것들만이 활개를 치는, 인간은 그 와중에 숨이 막히고 있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해도 원가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만들때 들어가는 정성, 즉 질의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패스트푸드의 가격이 슬로우푸드의 값과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은 합리화의 인간통제 가능성과 ‘합리의 불합리’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맥도날드화의 철장감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책의 저자는 그 원인을 돈, 가치 그리고 적응력에 두고 있다. 실제적으로 들어오는 단편적인 경제수익과 맥도날드화 자체를 목적시하는 미국의 문화 및 사회에 자체적으로 적응해가는 맥도날드화의 본유적인 속성 등이 우리를 계속 묶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후기산업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합리화에서 탈피해보려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시기 내에서 조차도 맥도날드화는 변형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즉 사라지기에는 너무 오래되고 전체적으로 퍼져버린 암세포같은 맥도날드화는, 영화 가타카에서 경고했던 유전자조작에 의한 하이테크임신이나 자동화된 장례상품 등 합리화란 단어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것만 같았던 삶과 죽음의 영역에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가 사회의 구속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면 ‘어플루엔자’는 우리가 왜 돈과 물질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잘 설명해 준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세대가 물질적으로 계속 풍족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경제적 팽창에 대한 강박적인 욕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현상을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라고 이름지었다.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한 가장 큰 문제점은 공동체, 즉 이웃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에 있다. 예부터 내려온 지역 모임에 대한 소속감이나 이웃간의 화목함은 사라지고 있다. 이웃사촌끼리는 집안의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던 우리 선조들의 미덕은 각박한 현실과 경제의 행정시스템에 묻쳐 찾아보기 힘들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단지 소비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 자신을 돌보지는 않는 것처럼 분명히 누군가 언젠간 치러야할 번영의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은채 앞으로만 나아간다. GDP는 늘어나면서도 사회건강지수는 오히려 감소하고 아동학대와 청년실업은 증가하는 부작용은 곧 곪아서 터질 사회의 부조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풍요병에 의한 정신적인 타격 역시 큰 문제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기에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며 자괴감에 시달린다. 또 사회적으로도 풍요의 모습 뒤에 숨겨진 극심한 빈부격차와 같은 불공평한 모습들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얼마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질병을 유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프리카에는 매일 기아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지구촌 한편에서는 과소비와 남는 음식물처리가 문제가 되는 남북문제는 원인에 대한 분석 뿐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자원이 고갈될 수도 있다는 경고는 아마도 가장 현실에 와닿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모든 물자가 어느 하나 자연에서 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의 재생능력을 심하게 벗어날 정도로까지 지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들의 가치를 잘 안다면, 아마 지금처럼 많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당연한 듯이 이것 뿐 아니라 저것마저 소유하려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의 욕심이 생물종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며 점차 자원의 전체량을 줄인다. ‘환경의 역습’이라는 연초의 TV프로그램에서 경고했듯이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과 새집증후군의 원인물질인 포름알데히드 등은 모두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의 움직임은 제품의 비용에 환경세를 추가하고 여러 시민단체에서 가시적인 개선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 너무 익숙해진 편리함에 우리는 쉽게 기존의 방식을 고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라는 공익광고처럼 좀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자원의 많은 부분을 사용하는 선진국들의 작태도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퇴치하는데 큰 걸림돌이다. 미국, 중국이나 러시아는 겉으로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며 세계의 평화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여러 가지 협약이나 규정을 무시하고 있다. 리우환경회의 등에서 시작한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이산화탄소규제에 대한 안건도 몇몇 강대국의 로비와 횡포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힘을 앞세워 자기들만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국제, 정치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면에서 브루스커밍스의 글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반세기에 걸쳐 남북한 양측에 얼마나 잘못된 권리를 행사해 왔는지 알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구소련의 해체와 독일의 통일을 기점으로 이미 이념의 시대는 가고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구촌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한다. 물론 냉전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면이런 글 자체를 볼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겠지만 현재가 있다고 해서 과거가 모두 용서가 되고 인정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지금의 우리 세대도 이런 글을 통해 무엇이 진실에 가깝고 또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하는지를 생각해 볼수 있었다.
내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얼마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핵읜 존재는 미국이나 또는 우리나라에 대한 선제공격이나 위협용이라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의 제도권교육이나 군대시절, 여러 매스컴을 통한 교육의 결과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브루스커밍스는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핵이라는 것은 누구를 먼저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한 방위전략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북한이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전쟁억제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핵개발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정말 미국이 핵무기가 폐기되어야만 한다고 북한에게 요구한다면 왜 그들은 먼저 그들의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는 것이며, 북한이 공개적으로 요구한 IAEA의 미국내 감사는 어째서 수용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이 글 하나만을 가지고 정말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며 북한은 시간이 꽤나 흐르기는 했어도 남침을 했던 과거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내재적인 위험요소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경찰국가 미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미국은 매년 ‘악의 축’이란 이름을 단 적대국가 명단을 발표한다. 물론 북한은 그 명단의 단골 손님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명단의 다른 국가들은 현재 어떤 상황일까? 알다시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침략으로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시리아, 쿠바, 북한 등 다른 나라들도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는 ‘악’이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인권에 대한 문제와 독재정치 등 잘못된 점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미국이 무슨 권리로 다른 주권국가에 대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인가? 이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에 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북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미국은 안하무인격으로 자신들의 힘을 남용했다. 대선 당시 항상 떠도는 소문에 이미 한국의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정해놓은 것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미국은 분명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분명 미국은 우리나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의 힘든 상황에서 미국을 중심으로한 원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만들기까지 좀더 긴 시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 특히 90년대부터 시작된 탈냉전시대의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분명히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독주를 시작한 미국의 태도는 전세계적으로 너무나 독단적이었고 특히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는 마치 북한은 악의 근원이며 남한은 미국의 51번째 주인양 행세해 온 것이다.
아직도 남북한이 대치해 있는 분단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이라는 두 국가를 비교하며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국이 보이고 있는 세계 여러 곳에서의 행태들, 특히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한 오만한 행동들은 분명히 월권행사이다. 그럴 수 있는 자격은 어느 단일국가에도 없다. 굳이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러한 권한은 UN에 있는 것이고 UN의 모든 구성원들은 평등한 주권을 가진다는 UN헌장의 말처럼 북한도 엄연한 한 국가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UN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모습을 볼때 혀재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파워게임이 얼마나 무력의 사용이 없이 지속될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그것은 어느 누가 유리하고 또 누가 누구의 편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애시당초 게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이런 식으로 북한에 대해 요구를 하고 간섭을 한다면, 미국은 동네깡패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우리 부모님 세대분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초콜렛의 단맛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한두개쯤은 가지고 계신다. 그만큼 힘든 상황에서 미국은 분명히 대한민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면 관계 또한 변화를 주어야 한다. 다시말해 한미간의 새로운 관계의 틀을 모색해 보아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미군 장갑차 사건에 대한 촛불시위가 벌어질 당시에 미국의 정가에서는 혈맹국가인 한국에 대해 강한 불만과 서운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국가간의 관계란 것은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권을 서로가 인정해 준다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것이며 미국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현재 한국과의 관계에서 잘못 설정이 되어 있는 SOFA규정 등의 불평등한 조약들을 개정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그동안 미국식 자본주의를 여과없이 받아들이며 부정적인 면 또한 그대로 수용하고 숭배해온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나 ‘어플루엔자’에 나오는 사례들은 주로 90년대 초중반의 미국사회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이미 그런 징후들이 사회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선진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의 올바른 기준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극단적인 말이 아니라 지킬 것은 지키며 진정한 발전을 도모해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화가 문제라고 하여 사회에 뿌리박힌 그 시스템 자체를 한번에 없애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선된 모습으로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환경 친화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면을 가미한 개성있는 시스템을 사회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의 문제는 당연한 권리 또한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인데 흔히 말하는 클레임성 고객 또한 다른 관점에서는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권리를 지켜가야 한다. 우리는 합리화된 사회구조 및 물질의 홍수 속에서 우리와 우리 자손들 및 전세계의 인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따져보며 생활할 의무 또한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유도함으로 인해 자신에게 생기는 ‘변화’를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의 노력에 못지않게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지원 또한 필수이다. 인간의 욕심도 무한한 것이며 또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구조 내에서는 개인의 노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환경, 교육, 복지 등의 여러 조건들을 포괄할 수 있는 국가차원의 개선 노력도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단순히 소비세를 늘리거나 소비를 제한하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어릴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가질수 있게 가정과 학교에서 똑바로 배울 수 있다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학생과 시민단체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그 모은 뜻을 행정적인 측면과 연계시킬 수 있는 장치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앞으로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온 모델은 미국식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장점들 뒤에 숨겨진 많은 폐해가 있다. 그러한 부정적인 면을 고려한 우리 나름대로의 새로운 사회, 문화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고 단순하게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합리화는 무엇을 위한 합리화인지, 우리 모두가 한배를 타고 순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혼자만 잘 살면 아무런 재미도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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