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바이러스를 읽고
Posted 2008. 8. 21. 15:54, Filed under: Ex-Homepage/Essay1999년 글과 삶시간의 리포트입니다..
< 서론>
평상시에는 그다지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그리고 가끔 하는 독서도 수필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이번 독서분석에서는 어떤 책을 가지고 할지 걱정이 되었다. 무협지는 물론이고 공상과학소설, 추리소설은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있다면 초등학교 시절 때 읽은 '괴도 루팡'정도?
처음에 생각한 것은 '퇴마록'이었다. 그것을 읽은 것은 고등학교 때의 일인데 당시 '퇴마록 국내편 1권'을 읽다가 결국에는 모든 시리즈를 다 읽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중간고사를 망쳤던 기억이 난다. 시험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내용이 희미하게 기억이 날뿐 나름대로의 분석을 하기에는 나의 능력이 부족할 것 같았다.
다음에 떠오른 것은 읽은 지 몇 개월 밖에 안된 '드래곤 라자'였다. 이 책은 정말 긴 이야기였는데 다 읽기는 했으나 퇴마록에 비해 감동도 덜했고 그 결과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역시 포기했다.
결국 새로운 책을 선정하기 위해 서점에 갔다. 많은 책이 있었고, 난 뭐가 재미있을지 혼란스러워서 그냥 서성거리다가 나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실역에서 어떤 영화 포스터를 보았다. 어느 살벌하게 생긴 여자가 노려보는 포스터였는데 알고 보니 '링 바이러스'란 영화의 포스터였다. 그래서 도서 대여점에 가서 '링 바이러스'를 빌렸다. 재미있다는 말을 주위에서 들었었기 때문이다.
<본론>
㉮ 내용소개
어느 기자가 동시에 발생한 어느 살인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다가 기자가 발견한 비디오 테이프, 그리고 그것을 본 뒤에 기자에게는 죽음의 날짜가 선고된다. 더군다나 가족들마저 그것을 보게되고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사건을 파헤쳐서 위기를 모면한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친구의 도움도 받게 되지만 그 친구는 죽고 만다. 이것이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 감상1
이 책을 다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용이 가벼우면서도 구성이 치밀하다는 것이다. 통속적인 소설을 써도 그것이 그냥 평범한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없어서 못 파는 책이 되느냐의 차이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구성이 치밀하다는 것, 그것은 곧 작품에서 등장했던 복잡한 것들과 (독자의 머리 속에서)해결의 실마리를 엮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링'에는 그러한 장면이 꽤 있었다. 류지(사건을 같이 풀어낸 주인공의 친구)가 죽어가며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류지의 여제자가 아사카와에게 선생님은 양면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나의 눈이 자칫 소설의 그 페이지만에 속박되려는 순간들을 잘 막아주었다.
'링'의 치밀한 구성이 가지는 특성중의 또다른 하나는, 감동을 주어도 오싹한 느낌을 전해준다는 점이다. 사건이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은 아사카와가 낡은 우물 속에서 유골을 꺼내는 부분이다. 작가는 이 부분에서 배경설정(통나무집의 바닥 아래 숨겨진 폐쇄된 옛날 우물, 그리고 그 안에 있을 원한을 품고 죽은 여자의 유골)과 인물의 심리 묘사(아사카와는 류지에 비하여 겁이 많다-'하긴 그러한 상황에서는 나라도 그렇게 겁을 먹을 것이다. 읽기만 해도 오싹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달려서 반드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아사카와의 마음)를 기가 막히게 해냈다.
이 장면에서는 '혹시 이 작가 자신이 어렸을 때 혼자 우물에 들어가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두운 곳에 혼자 갇혀있을 때의 공포, 어쩌면 대도시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함으로써 작가는 신선한 충격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책이라 글씨만 있다. 쉽게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여기서 쓰인 방법이 독자를 장면 자체에 '몰입'하게 한 것이다. 즉, 치밀하게 쓴 것은 소설을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만들기도 했으며 클라이맥스 장면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도 하는 양면의 효과를 보았다.
퇴마록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며 그 나름대로의 재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치밀한 구성도 돋보였지만 그것보다는 내용전개의 탄탄함과 액션 장면의 적절한 묘사, 등장인물의 개성 등이 재미의 주원인이었다. 반면 링은 내용이 탄탄하기 보다는 소재가 참신한 점을 들 수 있고, 액션 장면보다는 순차적인 과정을 통한 긴박감 있는 전개가 돋보였다.
한편 이 소설에는 다른 소설들과도 형식상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인용부호가 거의 없었다. 생각을 하는 부분은 거의 다 그냥 '한 줄띄우고 쓰는 식'이었다. 또 말 줄임표가 자주 등장했다. 그것도 문장의 끝이 아닌 중간에(즉 화자가 생각 중이란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것은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독자가 마치 자신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쉽게 내용에 빠지게 되는 주 요인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서술 방식의 장점이 아닐까?(그렇게 쓰여진 많은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링을 읽고서 그렇게 직접 느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작가 자신의 글을 쓰는 능력뿐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 대한 이와 같은 배려가 '링'을 베스트셀러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설사 그것이 한국 측에서 있었던 번역상의 오류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이다)
㉰ 감상2
작가는(주로 류지의 발언을 통하여)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잊고 있거나, 선입관에 빠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한 장면들이 곳곳에 있기에 이 소설은 단순한 추리 소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을 거라고 본다. 그러한 말들 중에 주관적으로 10군데를 골라 보았다.
㉠ "나는 인류가 멸망하는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아쉽게도 류지는 평상시에 이렇게 말을 하지만 자신이 먼저 죽고 만다.)
㉡ "너 무섭지 않냐?"
"무서워? 그 반대다. 기한이 정해지다니 재미있잖아? 벌은 죽음.....좋았어. 목숨걸기가 아니면 놀이가 재미없어지지."
(기한이 정해지면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나에게도 이제 80년 정도가 남았다.)
㉢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조차 승객들은 모두 자신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는 법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 그리고 급한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대응하는 것, 이것이 현대와 같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회-특히 우리 나라 같은 곳에서 끝까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길일 것이다.)
㉣ "알잖아. 하늘을 나는 꿈이야. 난 하늘을 나는 꿈을 제일 좋아한단 말야."
(나도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방종이 아닌 자유...그것을 이루는 지의 여부는 나 자신이 얼마나 세상과 타협하지 않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 "근원적인 공포심, 그건 인간의 본능 가운데 이미 짜 넣어져 있는 거야."
(공포심이 없다면 이미 세상에 없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공포심이 없는 세상? 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선적으로 '스크림'같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는 것부터 시작해서, 삶 자체가 많이 시들해질 것이다. 나는 가끔 느끼는 오싹함 속에서 생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 "상반되는 것들 모두가 그 근원에 있어서는 동일했을지도 몰라."
(진정 다른 것은 무엇이 있을 수 있지?)
㉦ "악마는 말야, 늘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다구. (중략) 하지마 말야, 악마는 결코 인간을 사멸로 몰아넣는 일은 없어. 어째서냐...인간이 없으면 놈들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인간과 악마의 싸움...언뜻 보면 악마가 훨씬 우세해 보인다. 그러나 언뜻 보지 않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신이 개입을 했다는 이유가 가장 크지만 그것에는 신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강력한 방어체를 설정한 인간들 자신에게 더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이 지금은 교회를 나가고 있지 않은 나의 심정이다. 인간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지만, 그래도 역시 인간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인간이 되는 것이 나의 최후의 목표이다.)
㉧ "야, 잘 생각해봐. 우리의 장래에는 말야, 확실한 것 따윈 아무 것도 없어. 늘 애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거다. 그래도 넌 살아가겠지. 애매하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생명활동을 정리시킬 수는 없어. 가능성의 문제다."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몇 개 안돼는 절대적인 사실이면서, 우리에게 삶의 순간 순간을 치열하게 살도록 해주는 각성제일 거다. 내일도 해는 뜨겠지? 그러나 그 해의 아래에 있는 나는, 내가 만들어 가는 그 날만의 나일 것이다. 가능성의 문제에 점령당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지배하느냐는 개인에게 달렸다고 본다.)
㉨ "싸우지 않고 인생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구."
(무서운 개를 만나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下책으로 대응을 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인생이란 것이 가장 그렇지 않나 한다. 언제나 안전한 길을 가는 것. 편한 것이고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안주하지는 말아야 한다. 한번뿐인 삶의 시간에 자신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며 후회하지 않을 삶일 것이다. 아쉽게도 영원히 안전한 길은 없다.)
㉩ "괜찮아. 이 안에는 아무 것도 없어. 네게 있어 최대의 적은 그 빈약한 상상력이야."
(상상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이성을 자신의 이성친구로 만들 수도 있으며 그 작은 머리 속에서 세상은 멸망시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단지 생각이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상상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상상력과 의지가 만나서 이루는 것, 그것이 한 개인의 인생이 아닐까?)
<결론>
물론 이 책도 나에게 완벽하지만은 않았다. 내용의 전개에 있어서 작가가 의도한 구성대로만 읽어준다면 척척 들어맞지만, 한두 마디씩 토를 달면 걸리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류지가 눈을 깜빡이는 속도를 연관시켜 비디오 테이프의 의미를 눈치채는 장면은(그 전까지 류지의 비범함을 아무리 강조하고, 직관에 의한 것임을 명시했다고 해도) 도무지 개연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또 비디오 테이프를 본 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그대로 남겨 둔 아이들이 테이프의 마지막 부분에 녹화를 한 장면도 약간 의문이 갔다. 녹화를 했다면 마지막 이후거나 맨 처음부터 해야 상식적이지 않을까? 왜 하필 딱 그 부분만 지워졌을까?(이 부분이 없다면 소설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재미가 떨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퇴마록은 그렇지 않았는데, 링은 나에게 '글을 쓰고 싶다'는 웃긴 충동까지 일으켰다. 참신한 소재와 획기적인 구성에 어느 정도의 필력만 있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오만함이 생길 정도로 이 글은 가볍다. 그리고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가벼움 뒤의 오싹함을 즐겼다.
책에는 사람을 흡수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그리고 깊게 빨아 들이냐는 것이다. 내가 많은 독서를 하지 않아서인지 지금껏 이러한 (가벼운)감동으로 나를 몰입시켰던 책은 퇴마록과 '하늘이여 땅이여' 이후 세 번째이다. 가끔씩은 이렇게 책에 갇혀 지내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배두나(링 포스터의 노려보는 배우 이름)의 눈빛이 아무리 귀신같아도 지그시 다가오는 글자들이 창출해 내는 스릴에는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리: 04 Dec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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