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문화와 예술 수업을 마치며

Posted 2008. 8. 21. 16:21, Filed under: Ex-Homepage/Essay

 감기는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수 있는 병중 하나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퍼지는 감기의 경우에는 그 원인바이러스의 변종이 워낙에 다양해서 완전한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병에 걸려도 금방 건강을 회복할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국민병’이라고 불릴 만큼 흔한 병인 것이다. 문제는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차츰 감기를 당연한 듯이 여기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어플루엔자’란 책의 제목을 봤을때 들었던 생각도 같은 맥락에서 책의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덧붙이자면 두책 모두 내용적인 면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수긍하면서 읽을 수는 없었다. 여지껏 내가 단지 ‘소비주체’로만 머물렀던 탓도 있지만, 내가 배웠던 많은 것들로부터 이미 난 합리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는 책의 제목이 흥미로웠지만 그 내용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합리’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하는 좋은 자극이었다.)

 웰빙족이라는 말이 얼마전부터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여러 ‘족’들을 상기해 볼때 그 트렌드의 한계는 명확하지만, 적어도 잘(well) 살아(being)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했다는 점만은 정치,사회,경제적 조류에 치우치던 예전의 ‘족’들과는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그러고보면 유사한 부류의 말들이 꽤나 많아졌다. 다운쉬프트, 참선, 느림의 미학, 그린연대 등의 문화코드들은 모두 인간에게 양보다는 질을, 달리기보다는 산보를 추천한다. 그렇지만 이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것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그 의미를 정말 알고는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실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에 본 물건중에 컴퓨터에 꽂아쓰는 ‘USB 음이온 발생기’가 있었다. 제품 설명을 보니 그것을 컴퓨터에 간단히 장착하면 방안의 탁한 공기와 담배연기, 전자파 등을 제거해 준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획기적인 아이디어인가? 그렇지만 곧 씁쓸했다. ‘제주도 맑은 공기 스프레이’를 사서 뿌리는 도시인과 다를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구 바깥의 외계인들이 보면 지금 지구인들이 생쑈를 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를 그런 물건들을 난 종종 구입하곤 했다.

 세상은 포화되어간다. 흔히 인문과학의 발전 속도가 자연과학의 발전속도에 뒤쳐진다고 우려하지만 어떻게 보면 어떤 방향으로든 양자 모두가 세상을 배탈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람들은 공허함을, 지구는 고갈을 느끼는 것이다. 어플루엔자의 저자는 그런 현상을 ‘의미의 결여로 인한 통증’이라고 표현했다. 물적으로는 풍요로워 졌음에도 영혼은 가난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또 여전히 국가간, 사회계층간 자원 배분문제의 불평등함이 난무함을 꼬집으며 여러 자원들의 절대량이 결코 무한한 것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잊기 쉬운 명제를 끄집어 낸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의 산업혁명, 과학혁명과 소비혁명은 그 시대에는 세상을 멋지게 바꿀 수 있는 좋은 패러다임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그들은 당시 보이던 발전에 따른 부작용의 징후들 조차도 똑같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으며, 그  팽창의 중심에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몇몇 나라가 있었다. 물론 그러한 발전 단계에서 사람들은 많은 편리함을 얻었다. 과학기술자들은 조금 더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는 사람들을 시간적으로 해방시키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합리성에 의한 불합리함을 간과한 나머지 발전이 ‘지속 불가능한’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가질만큼 가졌다’는 인식으로의 전환이다.(우리는 너무 가지고 싶어한다. 범주를 좁혀 그 대상을 물질에만 한정해 봐도 인간은 너무 만족할 줄 모른다. 단지 아이디어 계획안만이 발표된 시점에 벌써 그 제품을 리뷰하는 얼리어뎁터라는 신부류의 사람들도 있는 마당이니 인간이 얼마나 호기심이 많고 또 이기적인지 알수 있다.) 개인적으로 군대에서의 경험은 나에게도 있던 그런 잘못된 생각들을 어느 정도는 깨쳐주었다. 예를 들어 야외에서 일주일정도 훈련을 할때는 기본적인 세면과 수면시간 등이 보장되지 않을때가 많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화도 났지만 차츰 훈련에 익숙해지자 그런 모든 것이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배가 아플때는 반드시 약을 먹어야 한다고 여겼었지만, 약을 굳이 먹지 않아도 곧 복통은 사라진다는 것을 배웠다. 그곳이 꼭 군대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내가 해왔던 또는 하고 싶은 몇몇 일들(주로 ‘소비’)은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그리고 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여러 사회단체나 매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문제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자신과 연관하여 자각을 한다는 일이 쉽지는 않는 것 같다. 너무 그런 생활들에 익숙한 나머지 타성에 젖어버린 탓이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더 많은 부분의 교육에서는 20세기 초반부터 걸어왔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불리는 여러 방식들을 그 주제로 삼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배우는 전공과목 중 경영공학에서는 테일러와 포드로부터 시작하는 효율적인 생산시스템을 합리적 생산공정의 시초로 보고 있다. 사회적 가치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녔지만 제도권의 교육에서는 한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더 높은 비판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깨달았으면 행동해야 한다. 글쓴이들은 우리가 하는 일이 개인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도 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에 언급했던 여러 사회문화운동들이 목표로 하는 것의 본질도 결국은 어느 정도 ‘소비병의 타파’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자발적 단순성’만이 어플루엔자를 치료하기 위한 가장 근본인만큼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항상 ‘생각좀 해보고’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또 경영공학 수업의 기말레포트는 일종의 기업컨설팅에 관련된 것인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평가 기준 중에 사내복지와 사회공헌도 파트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것도 요즘 추세와 무관하지만은 않는 것같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생활속에 늘어나는 인간소외, 질을 고려하지 않은 합리성과 효율성의 결과는 결국 우리 자신과 사회로 고스란히 돌아온 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결국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근본적인 기준은 인간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개발이 있고 소비가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남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는 그러므로 인간을 위해서 쓰여져야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이며 풍요일 것이다. ‘빅맥’세트를 먹으면서 ‘어플루엔자’바이러스에 걸린채 허걱거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곧 대다수 현대인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회복할 수 없을만큼 사람과 환경이 변해버려, ‘행복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후회할 날이 올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에 신문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서울시가 영어 공용화를 추진하려다가 강한 반발에 부딪혀서 없던 이야기가 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조기영어교육 열풍에 어린이들에게 영어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 혀수술을 해줄 정도의 극성인 정도이니, 영어는 벌써 준 공용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영어가 세계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쓰여지는 언어이기에 그것을 외국어로써 받아들인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미국의 문화는 오직 소위 말하는 선진문화, 즉 좋은문화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한국의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것을 빨리 수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화시대에 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흔히 미국의 정신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개척정신’이나 ‘도전정신’이라고들 한다. 그것은 미국의 초기시대때의 모습을 표현한 Frontierism을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여기에는 흔히 착각하기 쉬운 오류가 숨어있다. ‘개척’이라는 말은 ‘미개척지’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하는 것인데 당시 미국의 사람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무지한 존재로 간주했으며 그들의 토지를 약탈했던 것이다. 그러나 땅의 소유개념은 예로부터 기존의 거주자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이고 대대로 그 땅에 살아왔던 원주민들이야말로 그 지역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미국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개척과 도전의 이름으로 미화해 왔었다.

 그후 이어진 두차례의 세계대전, 경제공황, 냉전시대 등의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며 미국은 더욱 거대한 괴물이 되어갔다. 미국의 서부‘팽창’시대부터 이어져온 그들의 팽창주의는 이제 거대한 미국의 침공으로까지 불리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는 한국 전쟁을 연결점으로 지금까지도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물결에 더욱 크게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시작된 노무현 정부에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세대간의 이념적 갈등 또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두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경험과 그 안에서 혼합적으로 작용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감이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어릴때부터 미국문화를 접하며 자랐다. 우리 사회는 이미 서구화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다 못해 추종까지 하는 풍토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미국중심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 매우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전쟁을 모르는’세대 임과 동시에 전세계의 사람은 천부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동남아 사람들을 은연중에 무시하듯, 국적이나 인종에 따른 차별의 문제는 그 사람이 속한 나라의 힘이나 피부색에 대한 편견에 따라 흔히 발생한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세계의 문화, 정치,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한 조류 특히 미국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각 개별 국가나 문명의 문화의 다양성과 공존성을 무시한채 자국의 문화만을 강요하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는 결국 맥도날드화되어가는 사회와 급증하는 풍요병에 걸린 사람들의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의 장점을 부각시키며 들어온 미국문화는 인간성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며 또한 문화사대주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문화는 한 사람을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병이 들었다고,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잘못된 문화때문이었다고 그 나라 탓만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문호를 개방할 당시 역사적인 판단 착오에서부터 시작된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어진 냉전시대를 거치며 우리 스스로를 돌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여유가 부족했던 100여년의 시기에 미국은 분명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도 많이 주었다. 그러나 구소련의 붕괴 이후 시작된 미국의 독주체제에서 미국이 보이는 여러 모습은 예전보다도 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급변하는 사회에서 미국의 팽창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우선 지금 우리의 상태는 어떠한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미국문화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화를 완전히 차단하고 국수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선별하여 받아 들이고 또 개선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예를들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자연 친화적인 건축물을 합리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합리’일 것이다. 또한 점점 교묘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미국식 세계화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반세계화운동과 이라크전에 대한 반전운동 등은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문화침투의 경우에는 더욱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개개인의 뜻을 모아 시민운동이나 서명운동 등의 방식으로 표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을 지키고 또 그들의 잘못을 막을 수 있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본 잭 니컬슨의 영화는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이었으며 그 전에는 ‘어바웃 슈미트’가 기억이 난다. 물론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연기자이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는 항상 모랄까 개구쟁이와 같은 그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년의 모습, 즉 중후한 연기를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오래전 젊은 시절의 그의 연기 또한 지금보다 얼굴의 주름살만 조금 없을 뿐이지 그때도 매우 개성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역시 유명배우의 명성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그가 열연한 맥 머피는 범죄자인데 그는 교도소 생활이 싫어 일부러 미친 척을 하고 정신병원으로 온다. 아마도 그는 감방보다는 병원이 낫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편 병원의 환자들은 부인과의 갈등문제, 말을 더듬는 문제, 말을 안하는 문제 등 마음의 병을 한두 개 정도씩 가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서 머피는 정상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곧 주간호사의 주도로 행해지는 집단상담 시간과 투약 시간에 머피는 환자들 자신의 문제가 아닌 병원의 치료 시스템과 병원관계자들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 등이 오히려 환자들을 더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지 않은 그 모든 환경에서 머피는 마치 ‘정상인’인양 그러한 부조리들을 헤쳐 나가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병원의 동료환자들도 역시 그러한 머피의 행동에 동조를 해나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머피의 행동은 여태껏 그들이 해왔던 일상적인 삶과 억압된 병동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억울함 같은 것을 직접적으로 파헤쳐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구중계방송을 보지 못 하게하는 병원의 모습과 그러한 상황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그것이 당연한 대우인 것인 양 받아들이는 군중의 모습에서 나는 과연 우리 사회의 여러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생활해 나가는지 반성해 보았다.

 사회의 제도란 것은 참 잔인한 도구이다. 왜냐하면 제도에 맞추어 살아가고 또 제도에 알맞은 모습으로만 살아가면 그 틀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도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무뎌지게 한다. 그건 익숙해짐의 문제인데, 우리는 이미 그것에 종속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제도가 맞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능력을 마치 병원의 환자들처럼 상실한 것이다. 내가 지금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가지면서도 선뜻 그 대상을 떠올릴 수 없는 것 또한 타성에 젖어 버린 내 모습일 것이다. 세상의 모습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아웃사이더이자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문제라면 무시해 버리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에서, 친구들에게 낚시를 해볼 수 있게 해주고 같이 운동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려 노력하는 머피의 행동은 박애라는 개념을 떠나 ‘과연 나는 이 제도 안에서 얼마나 무지했던가..’라고 생각해 보니 억울하고 조금 짜증이 났다. 한마디로 정상처럼 보였던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 비정상적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정상인 사람일까?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난 모던타임즈에서의 찰리채플린의 모습에서 그 일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 이름을 많이 들어봤던 유명한 영화 모던타임즈를 보고난 소감은 교수님께서 상영 전에 언급하신 것처럼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깨달음을 주는 영화란 것이다. 기계화에 대한 언급과 여러 시대적 배경 등 지금과 달라 보이는 영화 속의 많은 모습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에 의한 암묵적인 지배현상은 여전하다는 점이다. 초반의 우스꽝스런 광대의 모습을 보며 웃다가 순간 웃음이 가신 것은 그가 허공에 대고 너트질을 해대는 장면을 보았을 때였다. 단지 그의 모습이 우습다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저 상황에서 저 작업을 맡고 있었다면 과연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란 생각이 들자 문득 찰리채플린의 공장 동료들이 싫어지고 무섭기까지도 했다. 물론 그들 역시 당하는 입장이고 거기서는 영화의 초반에서 유일하게 말을 하는 공장장 아저씨가 ‘악의 축’으로 설정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회사의 기계화나 비인간적인 모습에 흡수되어가는 우리 모두가 공범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만큼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영화를 봐도 크게 감동을 받는 것은, 역시 찰리채플린 개인의 역량도 역량이지만 그때부터 대두되었던 문제들 중에는 여전히 현대사회에도 잔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현재 상황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것은 바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의 목을 죄어오는 사회의 틀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물질의 노예로 살고 있다. 그것은 돈과 같은 재화일 수도 있으며 또는 시간이라는 무형의 올가미일 수도 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창조되어진 그러한 개념들조차도 결국에는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이 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시간과 돈이 인간을 재촉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좀더 빠른 교통수단을 찾고 싶어 했으며 좀더 빨리 일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 물론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제도 역시 그러한 현상을 부추겼다. ‘효율’이란 원래 ‘통제’의 개념을 그 기반으로 깔고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 하나하나가 그러고 보면 다 불만이다. 매점에서 기다리기 위해 번호표를 받으면 기분이 나쁘고 그 뒤에 받아든 조잡한 햄버거세트에 또 기분이 나쁘고...   

 찰리채플린은 사슴처럼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물론 영화에서 그가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아니다. 단지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던 안타까웠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지금의 너희들은 어떤가?’하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영화상으로 그가 처했던 하나하나의 상황은 모두가 그의 의도였던 것은 없었다. 단지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외의 여러 가지 사건들, 예를 들어 자동급식기계에 당하고 자기도 모르게 시위행렬에 끼어들게 되고 노래가사가 없어 즉흥적으로 쇼를 하는 일 등은 모두 그가 얼마나 수동적으로 치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찰리채플린과 맥머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각각 바보와 범죄자라는 객관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사회적 약자의 시각에서 잘못된 사회에 다가간다. 그들의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눈을 통해 비추어지는 그 시대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에서의 그들의 진짜 역할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모던타임즈는 정말 깔끔한 구성을 보여준다.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결국에는 행복이 올 것이니 끝까지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되다는 교훈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뻐꾸기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참한 결말을 맺는다. 의학적인 입장에서의 환자란 당연히 보호를 받으며 치료를 받아야 타당하겠지만 그 외의 잘못된 병원시스템이나 간호원들은 어떤 개인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고쳐질 수는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은 거라고 말한다. 즉 나는 찰리채플린이 그렇게 강조했던 ‘희망’도 현대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우울한 기분으로 다시 병원에 들어선 머피를 볼 수밖에 없었다.(그렇다고 모던타임즈에서 찰리채플린이 싸움에서 승리했다란 뜻은 아니다. 단지 그는 희망을 안고 떠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두 영화에서는 모두 정신병원이 나온다. 정신병원이라는 어감에는 나는 정상이지만 너는 정신이 이상하니 그곳에 있는 거다라는 선입견을 먼저 가지게 된다. 그런데 누가 정말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는 우리의 후대 사람들이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류의 정신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급증하는 부류에는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플루엔자와 같은 현대의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또는 생성되는 것을 방조한 탓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면 또 우리는 다시 병원을 찾아 심적 고통을 줄이고 싶어 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는 것이다. 아마 정신병원이 등장한 이유에는 그러한 뜻도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병을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발현이 되느냐가 관건이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병의 종류도 다양해졌지만 증세도 더 심해지는 경향이 빨라지고 있다. 그것은 철창감옥과도 같은 위압감으로 우리를 제압하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예전처럼 수수방관하는 입장만 아니라면 찰리채플린이나 맥머피와같이 우리와 우리 사회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그런 시도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란 점에서 이번 영화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P.S. 수업 후기....

  이 수업을 들으면서 실제로 미국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여기서 말한 ‘설명’이란 것은 정말 외적인 내용들 그리고 가시적인 현상들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수업계획서에 있는 볼꺼리 중에 ‘보이즈 인더 후드’란 다큐멘터리영화를 수업시간에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 왜냐하면 군에 있을때 그것을 보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자막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흑인들이 그 비디오테이프 자체를 하나의 생활필수품처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당사자의 입으로 들었을때 그때까지 눈에 보이는 흑인 음악이나 NBA같은 문화예술이 전부인양 알았던 내 마음은 조금은 중립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수업시간에 나누었던 여러 사회문화적인 문제점들이 대부분은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국가로부터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때, 그런 것들을 폭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며 우리를 반성해 볼수 있었다는 사실은 진정한 문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어느 면까지를 포괄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 내내 강조되었던 ‘그럼 나는 어떤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자칫 시대나 유행의 흐름에 휩싸여 자기도 모르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그런 소중한 것들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사실 마음속에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문자화하기란 쉽지 않은 얼마 전의 ‘내’가 가지고 있던 나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이나마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물론 지금의 ‘나’는 그것을 바탕으로 좀더 탄탄하고 바른 방향으로 내 스스로를 이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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