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학기, 수화를 배우다.

Posted 2008. 8. 21. 16:23, Filed under: Ex-Homepage/Essay

2005년 1학기 교양으로 '수화'수업을 들었다. 흥미를 가지고 접근한 수업이었고 실제 배우고 시험보고 그럴때는 힘든 면도 없진 않았지만 학기가 끝난 지금 돌아보면 참 재미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는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자란 평범한 한국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여러 기대에 부풀어 산다. 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는 꽤 오래된 늦깎이 신입생이지만 비슷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일어나 불어 같은 제2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강신청 기간에 이 수업을 선택했다. 수화가 나 같은 청인에게는 또 다른 제2 외국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수화가 청인과 농인 사이의 제2외국어란 생각을 가지고 접근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수화란 의사소통의 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대한민국에서 조차도 미국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써야만 한다는 우리나라 사람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필요와 국력의 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언어문제에서 수화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를 익혀 서로가 소통할 순 있지만, 농인들과 구두로 소통하기 위해선 청인들이 수화를 배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농인과 ‘농인이 아닌 사람들’로 구성된 이분화 된 사회는 마이너리티로써의 농인의 권리와 의식을 억압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비단 농인과 청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러 기준에 따라 누구나 다수와 소수의 입장에 서게 되니까 말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농인에 대한 청인의 편견이다. 나 역시 그러한 고정관념이 없다고 부정하진 못한다. 이미 청인들만의 세상에서 20년이 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들과 교류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편한 것도 없었고 그래서 무관심했다. 바로 다수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만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농인의 입장에선 이러한 상황이 넘기 힘든 큰 벽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농인을 포함한 많은 장애우들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기엔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는 후진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링컨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위해 내전을 겪어야만 했고, 마틴 루터 킹 박사와 말콤 X는 흑인해방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지만 아직도 인종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종속에서 대등으로의 관계로 진보한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측면에서 기득권층과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갈롯데 대학의 신임총장 선임문제도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이자 선진국의 하나인 미국에서조차 저렇게 걸음이 더딘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과연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일까?


농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소수의 입장에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다. 그것은 농인들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에게 그러한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은 무관심한 청인들에게도 분명 잘못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차 농인 스스로가 그들의 권리를 찾고자 목소리를 높여 간다면, 분명 우리 사회도 변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운동에 청인들 또한 참여해야만 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함께 사는 사회이자 이상적인 공동체에 한발 더 다가가는 모습일 것이다.



 언제나 세상은 청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 역시도 그 사회에서 ‘非농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 면에서 비욘드 사일런스의 라라는 쉽게, 아니 거의 볼 수 없는 특별한 케이스의 생활로, 나에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非농인’이 소수자일 경우에 느낄 수 있는 점을 암시해준 흥미로운 영화였다.


 처음에는 농인의 삶이 우리의 삶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란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평범한 가족의 삶이 펼쳐지는 영화를 보며 농인들은 단지 의사소통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 뿐이며 사회의 제도적이고 능동적인 뒷받침만 있다면 충분히 그들도 ‘우리’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능력이 있으며 단지 사회로부터 배려 받지 못했기에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래 그럼 이제부터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여기고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권리와 의무를 주자..’, 이런 생각을 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조금 여유가 생겨서 였을까? 친구를 만날 때나 혹은 수화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이 포함된 자리에서 가끔 수화로 대화를 해보고 또 수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곤 했다. 사실 대화라 해도 내가 배운 내용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제한된 의사소통만이 가능했지만 그러한 단순한 움직임, 즉 느낌을 최대한 살린 제스처 하나 유추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확실히 우리 사회의 다수가 농인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십중팔구 수화를 보면 마치 신기한 율동을 하는 것처럼 마냥 재미있어만 했다. 그리곤 ‘사랑, 학교, 대한민국’처럼 흔히 사용되는 단어를 수화로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차라리 지문자를 물어봤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그들과의 괴리감이 생긴 것 같아 씁쓸했다. 그들 대부분에게 수화는 단지 ‘율동’에 불과했으며 결정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농인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혈안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힘의 차이에 대한 이런 암묵적인 동의가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선진화된 모습을 배우고 익히는 자세에는 조국 대한민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것에 가장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농인의 역할이 드러난다. 농인을 포함한 많은 장애우들이 세상과는 고립된 상태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이유로부터 연유되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농인들은 계속 사회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인들이 시작해야 한다. 갈로테 대학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약자가 존재한다. 인종, 장애, 국적, 성별 등을 통한 차별에서 가장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위'를 향한 저항일 것이다. (저항이란 말을 쓴 것은 그것이 그만큼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권리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노력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표현이 선행 되어야만 청인사회에서도 그들에게 귀를 기우릴 것이다. 따라서 나는 농인과 청인이 공존하기 위해선 그들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청인이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사실 이 사회를 이루어 온 것은 대부분 청인들의 몫이었으며 특히 소수집단인 파워엘리트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가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사회란 구성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그러므로 구성원 개개인이 가진 권리는 보장해줘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인이 나서서 그들에게 교육과 문화, 취업 등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소외받지 않게 배려를 해줘야만 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직장에서 장애우 들에게 쿼터제를 적용하고 의료기관, 교통시설, 공공기관 이용시 불편함을 최소화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농인과 청인의 유토피아가 만들어 질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벨의 모습과 농인의 입장에서 본 벨의 평가가 큰 이견을 보이듯 지금까지 말했던 방식을 통한 사회통합은 자칫 농인과 청인 사이에 더 굵은 경계를 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청인이 농문화를 먼저 이해하고 나서 동등한 인간으로서 농인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왜 청인만이 농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농인이 청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현재 사회의 주류문화는 농인을 비롯한 비주류에게 가혹할 만큼 무관심하며 이미 농인들이 그 사회로부터 많은 불평등을 겪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농문화가 형성될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청인들이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우리 사회를 합치는 작업 역시 청인들에게 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농문화를 이해하고 또 그들을 이해하며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아무리 양쪽에서 각자 노력한다고 해도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수화를 배운다는 것은 농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언어에 있어서 그들은 객관적인 약자이기 때문에 청인은 수화를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의학, 공학의 발달로 청력장애에 대한 예방과 치료 및 청력개선도 가능하겠지만, 이미 그들의 문화가 형성이 되어있는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수화도 언어로 인정하고 더 많이 보급할 제도적인 장치와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그 다음으로 그들도 청인과 같다는 ‘동등성’에 대한 인정이 농문화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선 저런 면들을 볼 수 없다. 농인들도 여전히 웅크리고 있으며 청인사회도 무관심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란 영화나 ‘리얼’이란 일본만화 등 장애우들의 삶을 다룬 문화 컨텐츠가 늘어, 일반인의 농인을 포함한 장애우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시금석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먼저 서로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니 내가 한 학기동안 수화를 배우며 겪은 세 가지 단계가 있었다. 처음에는 수화를 통한 농인과의 유창한 대화가 가능할 정도까지 수화를 익히고 싶었다. 나름대로 노력도 하면서 수화를 익혔지만 냉철하게 지금의 내 수화실력을 평가해보면 필수적인 회화를 조금 할 수 있고 농인이 (의도적으로 천천히) 수화를 해준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인 것 같다. 이렇게 처음 생각에 약간 모자랐던 두 번째 단계를 거치며 다음 레벨을 생각해 봤다. 그것은 아마 학기 초에 가졌던 수화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습관화 하여 앞으로 계속 그것을 익혀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화도 언어로 인정을 한다면 그건 한학기 동안 내가 수화를 마스터 할 수는 없다는, 즉 살아가면서 쭉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화를 배움에 있어 딱히 의도적인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외국어에 관심이 있는 여느 친구들처럼 단지 수화에 대한 관심, 농인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하고 나면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지금까지 살면서 무관심 했었는지 반성해 본다. 또 내가 배우는 수화가 농인과의 의사소통 수단만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농인과 내가 친구가 되기 위한 단순한 다가섬이며 그들이 아직까지는 청인의 ‘말’을 들을 수 없기에 내가 당연히 ‘수화’를 배워야 하는 거라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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