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일기] ARTEP 전야

Posted 2008. 8. 21. 16:29, Filed under: Ex-Homepage/Diary

휴..드디어 내일이구나...

군생활 중에 가장 큰 훈련이라는 ARTEP을 이번주 월요일부터

시작했다. 원래 이 훈련의 핵심은 CP Humphreys라는 평택에 있는

또다른 부대에 가서 하는 것인데..우선 월요일/화요일은 그냥 우리

부대에 있으면서 여러가지 평가도 받고 준비도 하고 그랬다...

이 훈련은 다음주 화요일까지 계속 되는데...이제 내일 새벽에 출

발하는 것이다. 뭐 할말은 끝없이 많지만 내일 새벽 3시 30분에 일

어나야 하기에 여기서 마쳐야겠다. 아마도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그땐 할말이 많이 있겠지..^^?

지금은 그냥...그때를 기념하기 위하여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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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유익한 상병휴가를 마치고 복귀한지 어언 이틀..

 몇몇 사건이 있었다. 그중의 단연 제일은 바로 부상! 때는 어제..
막사 앞 농구코트에서 501중대 사람들하고 농구를 하던 중 수비
의 발에 걸려 좀 심하게 넘어졌다. 다행히 앞으로 넘어졌지만
워낙에 속도가 있었던 지라 좀 찢어지고 삐고 그랬다. 왼쪽은 그냥 몇
군데 찢어지고 손목이 좀 삔것 같은데 오른팔은 좀 많이 까졌다. 그리
고 원래 무감각했던 오른쪽 새끼 손가락이 맛이 좀 갔다.(흠..신체에
대한 언어구사가 너무 적나라했나?-_-;)

  그래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Sickcall에 갔다. 다행히 사람이 있어서
치료(라기 보단 소독)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찢긴 곳이 좀
덜 쓰라려서 정신을 차리려 하니..이젠 삔 곳이 아파왔다. 어쨌거
나 늦은 저녁이었기에 암것도 못하고 그냥..밤 9시경! 상병휴가 빵
을 쏘러(일종의 관례임...) 사람들과 왜관시내로 나갔다.

  그런데 술은 이미 상병휴가때 과도하게 마셔서 잘 마실 수 없었다.
그리고 몸도 정상이 아니었고..그래서 그냥 적당히 적당히 1시간
정도를 보내다가 돌아왔다. 휴..술고래는 아니지만 회식때 술을
이렇게 잘 못먹다니..그것도 내가 쏘는 자리였는데..ㅠ,ㅠ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역시나 부은 왼쪽 손목은 여전했고 오른쪽 손
새끼 손가락 역시..똑같았다. 그래서 지저분한 몰골로 시내의
OO한의원으로 갔다. 그리곤 1시간 30분에 걸쳐..침맞고..가라앉히고
피뽑고..사혈침 놓고...부황뜨고 물리치료받고 돌아왔다.

 옆에 고참이 와서 더이상 못쓰겠다..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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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일기] 08 Jul 01 마루의 기억...

Posted 2008. 8. 21. 16:28, Filed under: Ex-Homepage/Diary

# 이 글은 일기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2001년 7월 8일 일요일

지금 시각은 밤 10시 28분이다. 약 90분의 오늘을 남겨두고 난 책상에 오로지 스텐드 불빛만을 켜 놓은채 이제 우리 마루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마루가 아프다는 말을 처음 들은 지난 금요일밤, 난 이번 역시 의례히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소식을 전해주신 어머니도 마찬가지셨다. 그리곤 바로 그날 밤 12시가 넘어서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동네 가축병원에서 링겔을 맞고 있었던 마루를 서울대학부속가축병원 응급실로 데려가셨다. 새벽 3시가 넘어서 돌아오신 부모님께선 그곳에서도 그렇게 큰 희망을 얻고 오시지는 못했었던 것 같다.

약속이 취소된 관계로 거의 하루종일 집에 있었던 토요일, 나는 그 병원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은 형을 통해 여전히 마루의 상태가 나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 처음 '심각하다'란 느낌을 받았었다. 어쨌든 여지껏 내가 아는한 그러한 종류의 불상사가 거의 없었던지라 그냥 마루의 없음을 단기간적인 헤어짐으로 무마시켰었던 날이 바로 어제였다.

오늘 오전(아침) 중에 오고 간 이야기는 더 심각했다. 이미, 아니 그 병 자체는 예방이 최선인 것처럼 말이 나왔고 병원측에서도 매우 불안한 보장만 해 줄 뿐이었다. 암과 같은 그 병은 매우 급속하게 마루를 고통스럽게 했고 그 약조차 너무 강해서 희석시킨 것을 투여할 정도였다고 한다. 의사들은 3개월에서 6개월 정도를 입원시키고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가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나름대로 강아지에 대한 애정이 깊으신 작은 고모도 사태의 심각성을 아셨는지 조심스레 안락사 이야기를 꺼내셨다. 왜인지 난 그때 마루의 '눈물'에 관해서 생각을 했었다.

한 오전 10시쯤?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가신다고 하셨고 약간 망설이시던 어머니도 따라가셨다. 그때 난 조금 갈등했었다 .사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세윤이와 함께 부대로 내려가는 것만 빼면 그리 바쁘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병의 정도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 또 게으름도 있었다. 생명체란 그렇게 쉽게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내 자신의 기도에 대한 자신도 있었다. 결국 모든 생각은 죽음이란 것에 의해서 일단락 되었긴 하지만...

오후 1시경 지하철 2호선 강남역 근처를 지날때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루가 죽었다고, 그리고 한 3분후 어머니께로부터 같은 내용의 전화가 왔다. 현실이 되어버린 마루의 죽음...

나에게 다가온 충격의 반응은 이러했다. '죽었구나 결국...'이란 무섭도록 침착한 생각과 단지 얼굴의 근육이 마비되는 일의 발생, 그리고 주위의 가뜩이나 침침했던 풍경들이 모두 젤라틴이 되어 버렸다. 마음을 파고드는 회색분자들이 마루와의 여러가지 추억들을 떠올리게, 그러나 그것에 빠지지는 않게 만들었다. 맞은편 좌석에 수시로 바뀌어지는 타인을 보며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도 이 사실을 그리고 내 심정을 알 수 있을까 하고 어리석은 질문도 상상했다. 그리곤 사당에서 내려 말없이 4호선 플랫폼으로 갔다.

평상시 같았으면 2~3번은 깼었을 지루한 남행 열차에서 난 2시간 30분동안 쉬지않고 잠들었다. 물론 꿈은 꾸지 않았다. 그리고 나선 머리가 아팠다.

여느때와 같이 짐을 다 정리하고 도착 전화를 8시 10분 정도에 했다. 예상대로 어머니께서는 흐느끼셨다. 그 점만은 어머니를 닮은 나였지만 난 흐느낄 수 없었다. 그냥 가슴 속에서 삯이고 있었다. 어머니 뿐만 아니라 아버지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난 강한 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말은 불쌍하게 죽은 마루 이야기, 동네 가축병원에 대한 한탄, 다시는 큰 개를 기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 등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난 무엇보다 어머니 당신의 안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마루의 죽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마루를 부르자 마루는 고개를 돌려 당신들 쪽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로 걸어왔다고 한다. 그리곤 바로..아버지 품안에서 죽은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마지막 걸음이 좋은 징조였다고 하셨지만 난 직감적으로 그것이 매우 고통스러웠을 걸음이었음을 느꼈다. 아버지께서도 어머니께 '토요일날 왔었으면 그때 죽었을 것'이라고 하셨단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 나니 마루가 더 불쌍했다. 대다수의 사랑받는 개들이 그렇듯 마루 역시 그 생각의 끝에는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내가 조금 싫어졌다. 스스로 안 가길 잘했다고 위안했지만 그로 인해 마루와의 마지막 대면이 한 달 전이 6월 초로 넘어간 것이다.

작년 이맘때 였을 것이다. 프랑스에 가려고 잠깐 들렸었던 홍콩에서 전해들은 외할머니의 부고가 떠올랐다. 그리고 태구 아버님의 부고 역시. 그건 마치 머리의 한 곳에서 나사가 사라진 느낌이다.

집을 이사했던 97년도, 마루는 태어났고 거의 동시에 우리 집에 왔다. 말 그대로 주먹만해서 집 안에서 기르다가 한 3개월 뒤 바로 마당으로 내놨다. 그만큼 성장이 빨랐던 마루. 어쨌든 그 놈하고는 꽤나 추억이 많았는데 기억은 별로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을 나게 함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다. 오로지 하나만 제외하고...

집으로 가는 마지막 길 모퉁이를 돌때면 난 휘파람을 불었다. 마치 올빼미가 울듯 말이다. 그것은 마루와 나 사이의 하나의 약속이었다. 내가 지금 가니까 짖지 말고 나와서 나를 반겨줘..하는 그런 신호였다. 지금와서 다시 말하지만 그때 난 매우 기뻤었다. 어두운 밤에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제공해 주던 마루. 그놈은 주로 자신의 몸을 가장 많이 뻗으려고 줄이 묶여있는 얼굴 쪽이 아닌 뒷다리 쪽을 나에게 들이밀곤 했다. 그러면 난 왈츠를 추듯 앞 발을 들어서 잡아주는 식으로 응했었다. 모든 것이 어둠처럼 외로워지는 한밤중에 집에 들어가기 직전에 마루는 나에겐 마치 산소같은 존재였었다.

벨기에에서 마루의 끈을 사온 후에도, 바깥에 잘 데리고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그 점도 조금 아쉽다. 하긴 그것이 그리 쉬운 일도 아니지만...따지고 보면 아쉬움은 많이 남는다. 그렇지만 마루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고 그래서 그 놈도 마음이란 것을 가졌다면 그렇게 아쉬워 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국민학교때 쫑이 집을 나갔을땐 불가능한 확신이 있었다. 쫑은 영원히 잘 살거라는 아이들의 믿음, 그런 것 말이다. 그러나 마루는 죽었다. 그리곤 화장되어졌다. 지금 이 순간 쫑과 마루의 현재존재가 궁금해진다. 쫑은 여전히 영원히 살고 있을테고 마루의 영은 우리 집 마당에 앉아서 나의 휘파람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그곳에서 다신 휘파람을 불지 않을때 까지는 말이다.

죽은 것이다...

강아지를 길러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들은 한 가족이다. 그래서 그 부재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현실적으로 난 이부분도 걱정이다. 어서 어머니께서 상심에서 벗어나셔야 하니까 말이다. 그것이 내가 마루에게 바라는 마지막 부탁이다. 어머니의 기억에서 사라져 주는 것...서서히 잊혀져 달라는 정말 어려운 부탁을 마루에게 하고 싶다.

P.S. 이별에 대한 또 다른 연습이었다. 그런데 왜 '한숨'과 멍한 느낌만 드는지 모르겠다. 난 마루에게..또 '죽음'이란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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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 존재의 찬사를 받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 사뮤엘 존슨


♥ 우리들 각자는 날개를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은 천사들이다. 두 영혼이 서로 껴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을 날 수 있다. - 루치아노 드 크레센드


♡ 우리들 생애의 저녁에 이르렀을때 우리는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받을 것이다. - 알베르 카뮈


♥ 만일 당신이 이 생에서 한 사람에게 충실했다면, 신은 다음 생에 당신과 그 사람이 더 훌륭한 영혼으로 다시 만나게 할 것이다. - 쥬다 할레비


♡ 당신은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사랑을 하는 순간, 그 마음은 사라진다. 당신이 사랑을 하는 순간,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는가 아닌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된다.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 우리가 지상에서 가진 시간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고 이해할때,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때, 우리는 비로소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당신이 어디에 있든 나 또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 루드비히 반 베토벤


♥ 영원히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때 그 영혼은 죽음을 뛰어넘어 자기 내면의 불멸성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 버니시걸


☞흠..이런 글도 쓰여있네요~^^ 카뮈가 저런 말을 하다니..그 사랑이 과연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랑일까? 개인적으로 쥬다 할레비의 말이 가장 맘에 와닿는군요...13 APR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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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일기] 14 Feb 01 ...첫 CPX 후!

Posted 2008. 8. 21. 16:27, Filed under: Ex-Homepage/Diary

# 이 내용은 일기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2001년 2월 14일

오늘 첫 CPX에서 돌아왔다. 오늘 새벽부터 구토가 심해서 Sickcall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잘 맞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가시고기'를 다 읽었다. 뭐 피곤해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은..흠...
'국화꽃향기'와 '가시고기'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었나?

P.S. 발렌타인데이인 오늘 내가 2박스의 선물을 받았음을 알았다.


☞CPX란 야외에서 훈련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우리는 SWB란 곳을 갔었다. SWB란 South Waegwan Bridge로 '남왜관다리'이다. 옆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옆에 있는 모래사장에 텐트치고 위장막치고 했었다. 우리 부대에서 시간상 10분정도밖에는 걸리지 않지만 그래도 처음가는 야외필드였고 또 MRE라고 하는 정말 정말 이상한 전투식량을 먹어서 그런지 결국 마지막날 구토를 좀 심하게 해서 당시 일일보고 하러 부대에 잠시 가는 중대장하고 함께 돌아와서 Sickcall(의무실)에 갔었다. 가서 받은 것은 무슨 분홍색 액체로 먹으면 자동으로 식도와 위가 보호되는 특이?한 약이었다. 한번먹고 그 느끼함에 더욱 구토할 염두가 생기지 않았다는 말이..--;
어쨌거나 이때 느낀 점은 국민학교 시절 보이스카웃의 뒷뜰 야영같았다는 것이다. 물론 어리버리한 신병때였기는 하지만 좀 즐거웠다.(물론 지금도 야외훈련이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발렌타인때 받은 선물은 정말 고마운 충격이었다. 준 사람들에게 그다지 내색은 않했지만-아마 이 이유로 나에게 욕좀 했으리..^^;;;- 진짜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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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일기] 초창기 일기 단편모음

Posted 2008. 8. 21. 16:26, Filed under: Ex-Homepage/Diary

# 이 글은 일기장에서 옮겨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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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1일 금요일

일과가 끝나고 왜관 구경을 했다. 생각보다는 컸다. 역 근처 시장에서 필기도구와 스피커를 샀다. 대구 말투를 들으니 신기했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오는 길에 오뎅을 먹었는데 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Oh my God!

처음으로 부대에서 맞는 주말이다. 비디오도 빌려오고( 도서관 대여카드 만들려고 ) 그랬다. 부대는 매우 한산하다. 이런 것이 Katusa Life 인가 보다.

스피커를 산것은 너무 좋은데...냉장고 코드 때문에 스피커와 스텐드, 둘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고 결국 지금은 음악을 듣고 있다. Monkey Business~


☞금요일의 일과가 끝나면 카투사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집에 가는 사람들..그리고 남는 사람들..이때 나는 후자에 속했고 그래서 앞으로 내가 2년간 생활할 이 '왜관'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구경을 하러 밖으로 나간 것이다. 왜관은 어떤 곳인지...구체적으로 묘사하기엔 글재주가 너무 없다. 또 잘 모르기도 하고..그런데 느낌은 참 좋다. 복잡하지 않다는 것!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다는 것! 그리고 오뎅먹고 두드러기 난 것은 일명 '임채빈요법'인 물을 무작정 마시고 자기 덕택인지 다음날 낫다. 솔직히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에 두드러기 나는 것이어서 좀 놀랐었는데-그때는 Emergency 갈 생각도 못할때였다- 다행히도 하루만에 나았다. (물론..그날 밤 새벽2시,3시, 4시에 정확하게 화장실 한번씩 가서..잠을 설쳤다.) 또..그때 산 스피커...지금은 집에 있다. 내가 얼마 후에 집에 있던 스피커를 떼어 왔기 때문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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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3일 일요일

하루종일 여유가 있었다. 오전중에 채빈이와 함께 교회에 가보았다. Gate 4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는 왜관제일교회라는 곳이었는데 동네규모에 비해 꽤나 컸다. 뭐 예배의 내용은 서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오후 2시경에 농구를 하러 갔다. 가서 좀 하고 있으니 같이 하자고 하는 무리가 있어서 함께 했다. 키가 큰 흑인, 백인, 스페니쉬 들이었는데 4대4로 게임을 했다. 우리팀이 1번 빼고 다 이겼다. 뭐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잘 하지는 못했다. 단지 패스가 좀 빠르다는 것 뿐? 역시 군대농구는 미군에서도 마찬가지인듯... 우리 팀에는 꽤나 다혈질적인 흑인 가드가 있었는데 쩝...시합중에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더니만 제 풀에 지쳐서인지 도중에 교체하더니 가버렸다. 어쨌든 그 이후 시합이 잘 풀린 것을 보면~

농구'전쟁'을 마치고 오니 오후 5시가 넘었다. 그래서 빵을 사먹었다. 그리고 일찍 잠을 잤다!


 

☞이때 간곳은 왜관제일교회란 곳이었는데..그때 한번 빼고는 줄곧 시내에 있는 '왜관교회' 청년부에 나가고 있다.( 일요일 오후1시~3시30분 ) 아마도 준회형이나 범진이형이-그땐 병장들이었음- 함께 가자고 한 것이 컸었던 것 같고, 교회에서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난 것 보면 정말 그때 바꾼 선택이 바른 것 같다. 또 농구는 정말 할말 많은 꺼리중 하나인데..우선~ 군대농구를 떠나서 미군들의 농구실력은 극과 극이라는 점..또 흑인들은 말이 정말 많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농구를 하든 일을 하든..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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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23일

<모모를 읽고>

우리가 시간이 없다고 느낌은 회색신사들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시간을 여유있게 그러나 알차게 사용해야 한다. Momo가 도와주지 않아도 말이다.


 

☞초창기에 마음먹었던 것이 '군대있을때 책 많이 읽자'는 것이었고 그래서 일기장 마지막장에 리스트를 만들었었다. 물론 중간에 리스트 쓰는 것은 끝이 나긴 했지만 지금까지 정말 나름대로는 꽤나 책을 읽었다. 초반에 읽은 책은..모모(미하엘엔데)/ 아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문열)/ 추억의 아주먼곳(윤대녕)/ 국화꽃향기(김하인)/ 가시고기(조창인)/ 노르웨이의 숲(무라카미 하루키)/ 향수(파트리크 쥐스킨드) 등이다. 위 글은 일기라기 보다는 짧은 감상문이 더 적당한 표현같은데..모모를 읽고 쓴 것이다. 윗글 내용이 너무 이상하다면 '모모'란 책 한번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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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25일

이곳에도 눈이 쌓였다. 아주 조금...그래서인지 몰라도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가 가곤 한다. 그래야 눈이 더 오래있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 하..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그리고 난 부대에 있었고..그때 왜관에 눈이 왔는데 대구란 곳(사실 왜관도 나에겐 대구의 지역동네란 인식이 그때는 강했었다)에도 겨울에 눈이 오긴 오는구나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작년-2001년-겨울에는 눈이 거의 안왔다. 아! 그리고 이때 눈이 쌓인 것을 군인이 아닌 제설차가 치웠고..이 사실을 안 나의 친구들은 경악을 금지못했다. 군대에서 군인이 아니라 제설차가 눈을 치워~?! 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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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25일 두번째 일기

[아가를 읽고]

달이여, 너는 내 사랑을 알고 있는가.
무덤도 없이 떠난 그녀를
어느 하늘가를 떠도는지
부서진 가슴으로 내 사랑을 찾아 한없이 헤매었네
만일 그녀를 만나거든 내가 울고 있다고 전해다오.

달무리 슬픈 그 밤 이별의 눈물
안녕히, 안녕, 내 사랑아
다시 만날 날을 믿으며
헤어져 멀리 있더라도 언제까지나 잊지 않으리라
달빛속에 사위어가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아가中 -

사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부제에 이 책을 골랐다. 물론 다 읽은 지금은 내가 의도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만족한다. 그가 느낀 생각과 내가 살아온 삶의 과정 속에 공통점도 있었다. 나도 두번의 기사였다. 아니 세번! 처음은 외로웠지만 두번째는 뜨거웠고 마지막 세번째는 너무나 가벼웠다. 그러나 그 세 과정 모두에 그 무언가, 내가 소중히 느끼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경험은 나에게 무척이나 소중하다. 물론 뜨거웠던 것은 나에게 화상을 남겼다. 그리곤 2년이 지났다. 그렇다. 회상은 회상꺼리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참 뿌듯한 일 같다. 이 연습장처럼...그리고 위의 시처럼...


 

☞이것도 '아가'를 읽고 쓴 감상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책을 골랐을때의 의도했던 바와 책의 내용이 좀 많이 달랐었다. 어쨌든 그때를 '회상'해 보니..좋았다..그리고...참고로 현재는 그 외로웠던 첫사랑과 다시 접촉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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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26일

간단하지만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노는? 쉬는? 방식은 몇몇 내 친구들과 너무 다르다. 후..당구? 피씨방? 난 그런건 딱 질색이다. 그렇다면 나의 타입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제기를 해보면...난 그러한 방식이 없다..크...

실종은 기억을 동반한다..

유리얼음성- 얼음은 녹는다. 성모양의 얼음이 녹으면 다시 성이 될 수 없다. 유리? 깨지면 그 성은 다시 예전의 성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유리얼음성은?


 

☞사실..많이 다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가고 있고.. 물론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렇게 쉽사리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경우에 오는..언젠가의 '바램'은 좀 외롭다..^^;
뭐 그래도 아직까진 당구나 컴퓨터 오락이나..담배같은 것에 대한 생각은 없다...13 APR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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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일기] 28 Nov 00...물갈이..

Posted 2008. 8. 21. 16:26, Filed under: Ex-Homepage/Diary

# 이 글은 일기장에서 옮겨 쓴 것입니다.

2000년 11월 28일 화요일

오늘은 매우 아프다. 갑자기 일을 시작했고 (물론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일과 후 캠프구경을 하다보니 몸이 이상이 생겼다. 다행히도 TA-50 정리를 다했고 구두도 닦고 '마음의 편지'도 제출했다. 크~ 그리고 채빈이가 준 아스피린도 먹었다.

오늘 처음으로 Rec Center에 가보고 Learning Center에도 가봤다. 여기 선임병들은 날 잘 대해줘서 참 감사하다. 하지만 '감사'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 열심히 할 생각이다. 으...감기몸살 기운~ 열이 난다.



내 기억으론 이때 아팠던 것은 약간의 몸살 기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가 날도 겨울이었기 때문에 추운 것도 있었지만 아마 내가 약간 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군대 용어로는 이런 것을 '빠졌다'라고 한다.)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7월에서 8월중순인가 까지 약 한달간 유럽배낭여행을 다녀왔었다.( 그때 썼던 일지와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기는 한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홈페이지에 넣을 생각이다. ) 그때 처음으로 간 곳이 프랑스였는데 한 이틀동안 물때문에 고생을 했다. 음식이야 워낙에 잡다한 체질이라 괜찮았는데 물이 바뀌니 적응이 좀 힘들었다. 배도 많이 아프고..그래서 그 이틀동안은 그냥 숙소근처에서 멀리까지 가지 않았었던 기억이..

그런데 군대란 곳은 어떤 곳인가? 논산 입소대대에서의 일이다.(훈련소=입소대대+교육대대) 이제 막 들어온 나에게 식사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짬밥(군대용어로 '밥'을 일컫는 말)을 이때 안먹으면 언제 먹느냐는 듯 아주 잘 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물...한 이틀 정도가 지나자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사회에 있었다면 당연히 약을 복용했겠지만 이곳에선 분위기상 약달라고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매일 밤 점호(일종의 '일과 끝내기'라고 보면 된다. 인원점검..)시간때 형식적이긴 해도 교관들이 아픈데 없는지 물어보기는 하지만 복통같은 것은 그 대상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여졌다.

그렇게 이틀을 잘 참았지만, 그리고 화장실도 가봤지만 배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무슨 배탈이 난 것도 아니고... 참 표현하기 힘들게 아팠다. 그래서 결국 용감하게-정말로 용감한 것이다- 교관들의 막사로 찾아가서 배가 아프다고 했다.

"000번 훈련병 오승민! 아파서 왔습니다."
"어디가 아픈데?"
"배가 좀.."
"그래? 그런데 의무실 가려면 차가 와야 하는데...왠만하면 좀 참아
보지?"
"그게..좀 많이 참았는데 계속 아파서요"
"흠..여기 있는 약은 아스피린하고 타이레놀 밖에 없는데..그거라도
줄까? "
"네? ..."

결국 이틀정도 더 참으니...다 나았다. 물론 약도 안먹고, 의무실도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에는 어딜 가나 처음에는 환경이 바뀐 탓에-난 그것을 '물'로 부르지만- 속이 좀 아팠던 것 같다. 한편, 그때 내가 약을 먹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만족스럽다. 약을 먹어서 배나 좀 일찍 나았다면 과연 더 좋았을까?^^ (진짜 사회인들이 생각하면 유치하게 보일지는 몰라도..난 그렇게 참았다는 것이 좀 흐뭇하다..)

이런 생활에서 KTA란 곳에 갔을때도 조금 물갈이를 했다. 좀 얼빠진 카투사들은 KTA를 논산 육군훈련소에 비교해서 '천국'이라고 부른다. 특히 식당문제에 관해서는 말이다. (난 그것이 천국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국민의 피땀흘린 세금이니까...단지 누군가는 누리게될 우연한 행운에 나의 의지가 좀 곁들여져 내가 그 주인공이 된 것이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모범을 보여야 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어쨌든 그 식당의 메뉴란 것들은 모조리 기름기 투성이었다. 그러니 2번정도 먹기까지는 꽤나 좋았는데 그 후부터는 밋밋했고 역시나 배가 좀 아팠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숙소의 방마다 화장실이 있고 야외에도 화장실이 있었기에 일과시간만 아니면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은 없었다. 자대란 곳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의 내 입장은 한명의 군인이지 훈련병이 아니었기 때문에 배가 아프면 약을 먹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물갈이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아마 논산 입소대대에서의 물갈이와 같은 때는 없을 것 같다. 사실 대한민국 남아들에게 '군대'란 곳을 제외하면 어느 곳이 그들을 제약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난 지금 편하게 자대생활을 하면서 가끔 그때의 일들이 떠오른다. (물론 한국군 현역병으로 간 친구들은 자대생활이 그때하고 별반 다를 것은 없을 것 같다.) 과연 난 그때로 돌아가라면 돌아가고 싶어 할까? 쉽게 '당연히'라고 말하지는 못할만큼 난 군대적으로 세속화되어있지만 그래서 더욱 그때가 그리운건지도 모르겠다.

쓰다보니 횡설수설이 되어버렸군..-_-; 13 APR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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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일기장에서 옮겨 쓴 것입니다.

2000년 11월 26일 일요일...

지금 시각은 오후 10시 20분이다. 시간에 따라 이 시간에 하고 있을 일이 다 달랐던 예전이 생각난다. 바로 어제만 해도 이 시간에 짐을 챙기며 통신을 하고 있었고 2개월 전에는 논산에서 있었으며 아마도 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유리상자 4집 앨범을 들으면서 일기를 쓰고 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여유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대하여 참 고맙게 생각한다.

육군 훈련소에서 지급받은 수양록이 끝난 날을 기준으로 다시 지금까지의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지난 주 수요일, 드디어 수료식을 마쳤다. 그 때 참 신기하게도 나와 부모님은 한번에 서로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대열에서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기했다. 하긴 세상의 어느 부모자식간에 이러지 않으리..

수료증을 SGT Habson에게서 받고 부모님과 만나서 한번도 안들어가 봤던 Club에 가서 당신들께서 장만해 오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 사이 꽤 전화를 했었기 때문인지 의외로 서로 담담했었다. 그 후 간단히 부대 구경을 시켜드리고 대구에 가기위해 선발대로 갔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까지 가서 대구행 기차를 탄 후 늦은 시각 대구에 왔다.(동대구역) 그리론 버스로 Camp Henry행! 바로 셔틀버스로 종착지인 Camp Carroll에 왔다. 그날 밤에는 선임병장님과 동기들과 함께 라면을 끓여먹고 지원대장님과 간단한 면담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방은 2인 1실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에 왔다. Thanksgiving Day여서 위에서 Pass란 것이 나왔다고 했다. 뛸듯이 기쁘지는 않아도 서울을 돌아다닐 수 있단 마음에 설레였었다. 서울에 와서 목욕탕에 갔다가 집에 갔다. 어머니께서 매우 반가워 하셨다. 미미도 마루도 날뛰었다! 또 운이 좋게도 다음날이 연동 정모였다. 그래서 거기도 갔었다. 즐거운 첫 휴가였다. 그리고 어제는 그냥 집에서 쉬었고 오늘 TMO를 타고 내려온 것이다. 처음 나간 것 치고는 은근히 조용한 휴가였던 것 같다.

일요일 저녁이 되니 고참들이 많이 보였다. 그리고 내일부터 일이 시작이다. 난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히 최선을 다할 것이고! 우선은 어서 부대에 적응을 해야 하겠다.

P.S. 짐을 한 뭉탱이를 가지고 왔는데 쩝...다 열어보니 별로 가지고 온 것이 없는듯 하다~


☞제가 훈련소에 입대한 날은 2000년 9년 15일 입니다. 그리고 논산훈련소에서 2개월정도 훈련을 받고 의정부에 있는 후반기교육장소(저희는 군특기가 '어학'이기 때문에 '영어'를 교육받습니다.)인 KTA란 곳에서 약 한달간 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배정을 받는 것이 '자대'란 곳입니다. 그곳에서 약 2년간의 군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죠.(이 KTA에서의 자대배치와 그리고 그곳에서의 생활 등도 꽤나 할 말이 많은데 언젠가 나오겠죠?^^;) 바로 제가 그 자대-이곳 왜관지역-에 온 날이 2000년 11월 23일 목요일 저녁입니다.

저희 자대동기들(임채빈/최승호/이인준/나)은 운이 좋게도 온날 바로 다음날이 금요일 아침 집에 갈수 있었습니다. Thanksgiving Day라고 미국휴일 중에 우리나라의 추석과 비슷한 날이 있는데 저희가 온 바로 그주의 주말이 그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기는 집에서 쉬다가 돌아온 일요일에 쓴 것입니다. 지금보면 몇몇 틀린 것도, 그리고 달라진 것들도 있네요.

우선 제가 갈수 있었던 것은 '휴가'가 아니고 '외박'이라는 점( 휴가는 Leave라고 해서 한국군 육군과 똑같습니다. 외박은 Pass라고 해서 휴가보단 짧은 것이더군요. 이건 길어야 4박 5일입니다. ) 또, 그 때 반겨주던 마루군-저희 집에서 기르던 도베르만종 개- 이 그만 작년 여름에 죽었다는 점 등이 일기를 읽어보면 드는 생각이네요.

그때 논산에서도, 그리고 KTA에서도 다 함께 살고 함께 죽을 것 같았던
군대 동기들, 교관들, 하사관들이 지금 자대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그나마 동기들은 몇몇 연락이 닿기 망정이지 위에 나온 SGT Habson같은 경우에는 얼굴이 생각이 안납니다. 나이가 좀 흑인이었고 노력파였다는 점 이외에는요.

사실 위의 일기는 첫 일기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네요. 제가 다시 봐도 너무나 많은 일들을 아주 짧게 압축해서 불만이구요. 지금도 생각 하나 떠오르면 꼬리를 물고 연속해서 장면이 상상이 될 정도로, 군생활에서의 이동은 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건 아마도 대부분의 군인들에게 적용이 될듯~)

그때가 그립기도 하지만 차마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못하겠네요...^^; 13 APR 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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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학기, 수화를 배우다.

Posted 2008. 8. 21. 16:23, Filed under: Ex-Homepage/Essay

2005년 1학기 교양으로 '수화'수업을 들었다. 흥미를 가지고 접근한 수업이었고 실제 배우고 시험보고 그럴때는 힘든 면도 없진 않았지만 학기가 끝난 지금 돌아보면 참 재미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는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자란 평범한 한국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여러 기대에 부풀어 산다. 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는 꽤 오래된 늦깎이 신입생이지만 비슷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일어나 불어 같은 제2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강신청 기간에 이 수업을 선택했다. 수화가 나 같은 청인에게는 또 다른 제2 외국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수화가 청인과 농인 사이의 제2외국어란 생각을 가지고 접근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수화란 의사소통의 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대한민국에서 조차도 미국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써야만 한다는 우리나라 사람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필요와 국력의 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언어문제에서 수화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를 익혀 서로가 소통할 순 있지만, 농인들과 구두로 소통하기 위해선 청인들이 수화를 배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농인과 ‘농인이 아닌 사람들’로 구성된 이분화 된 사회는 마이너리티로써의 농인의 권리와 의식을 억압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비단 농인과 청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러 기준에 따라 누구나 다수와 소수의 입장에 서게 되니까 말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농인에 대한 청인의 편견이다. 나 역시 그러한 고정관념이 없다고 부정하진 못한다. 이미 청인들만의 세상에서 20년이 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들과 교류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편한 것도 없었고 그래서 무관심했다. 바로 다수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만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농인의 입장에선 이러한 상황이 넘기 힘든 큰 벽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농인을 포함한 많은 장애우들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기엔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는 후진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링컨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위해 내전을 겪어야만 했고, 마틴 루터 킹 박사와 말콤 X는 흑인해방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지만 아직도 인종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종속에서 대등으로의 관계로 진보한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측면에서 기득권층과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갈롯데 대학의 신임총장 선임문제도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이자 선진국의 하나인 미국에서조차 저렇게 걸음이 더딘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과연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일까?


농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소수의 입장에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다. 그것은 농인들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에게 그러한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은 무관심한 청인들에게도 분명 잘못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차 농인 스스로가 그들의 권리를 찾고자 목소리를 높여 간다면, 분명 우리 사회도 변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운동에 청인들 또한 참여해야만 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함께 사는 사회이자 이상적인 공동체에 한발 더 다가가는 모습일 것이다.



 언제나 세상은 청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 역시도 그 사회에서 ‘非농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 면에서 비욘드 사일런스의 라라는 쉽게, 아니 거의 볼 수 없는 특별한 케이스의 생활로, 나에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非농인’이 소수자일 경우에 느낄 수 있는 점을 암시해준 흥미로운 영화였다.


 처음에는 농인의 삶이 우리의 삶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란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평범한 가족의 삶이 펼쳐지는 영화를 보며 농인들은 단지 의사소통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 뿐이며 사회의 제도적이고 능동적인 뒷받침만 있다면 충분히 그들도 ‘우리’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능력이 있으며 단지 사회로부터 배려 받지 못했기에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래 그럼 이제부터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여기고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권리와 의무를 주자..’, 이런 생각을 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조금 여유가 생겨서 였을까? 친구를 만날 때나 혹은 수화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이 포함된 자리에서 가끔 수화로 대화를 해보고 또 수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곤 했다. 사실 대화라 해도 내가 배운 내용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제한된 의사소통만이 가능했지만 그러한 단순한 움직임, 즉 느낌을 최대한 살린 제스처 하나 유추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확실히 우리 사회의 다수가 농인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십중팔구 수화를 보면 마치 신기한 율동을 하는 것처럼 마냥 재미있어만 했다. 그리곤 ‘사랑, 학교, 대한민국’처럼 흔히 사용되는 단어를 수화로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차라리 지문자를 물어봤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그들과의 괴리감이 생긴 것 같아 씁쓸했다. 그들 대부분에게 수화는 단지 ‘율동’에 불과했으며 결정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농인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혈안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힘의 차이에 대한 이런 암묵적인 동의가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선진화된 모습을 배우고 익히는 자세에는 조국 대한민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것에 가장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농인의 역할이 드러난다. 농인을 포함한 많은 장애우들이 세상과는 고립된 상태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이유로부터 연유되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농인들은 계속 사회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인들이 시작해야 한다. 갈로테 대학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약자가 존재한다. 인종, 장애, 국적, 성별 등을 통한 차별에서 가장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위'를 향한 저항일 것이다. (저항이란 말을 쓴 것은 그것이 그만큼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권리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노력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표현이 선행 되어야만 청인사회에서도 그들에게 귀를 기우릴 것이다. 따라서 나는 농인과 청인이 공존하기 위해선 그들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청인이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사실 이 사회를 이루어 온 것은 대부분 청인들의 몫이었으며 특히 소수집단인 파워엘리트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가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사회란 구성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그러므로 구성원 개개인이 가진 권리는 보장해줘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인이 나서서 그들에게 교육과 문화, 취업 등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소외받지 않게 배려를 해줘야만 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직장에서 장애우 들에게 쿼터제를 적용하고 의료기관, 교통시설, 공공기관 이용시 불편함을 최소화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농인과 청인의 유토피아가 만들어 질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벨의 모습과 농인의 입장에서 본 벨의 평가가 큰 이견을 보이듯 지금까지 말했던 방식을 통한 사회통합은 자칫 농인과 청인 사이에 더 굵은 경계를 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청인이 농문화를 먼저 이해하고 나서 동등한 인간으로서 농인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왜 청인만이 농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농인이 청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현재 사회의 주류문화는 농인을 비롯한 비주류에게 가혹할 만큼 무관심하며 이미 농인들이 그 사회로부터 많은 불평등을 겪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농문화가 형성될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청인들이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우리 사회를 합치는 작업 역시 청인들에게 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농문화를 이해하고 또 그들을 이해하며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아무리 양쪽에서 각자 노력한다고 해도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수화를 배운다는 것은 농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언어에 있어서 그들은 객관적인 약자이기 때문에 청인은 수화를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의학, 공학의 발달로 청력장애에 대한 예방과 치료 및 청력개선도 가능하겠지만, 이미 그들의 문화가 형성이 되어있는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수화도 언어로 인정하고 더 많이 보급할 제도적인 장치와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그 다음으로 그들도 청인과 같다는 ‘동등성’에 대한 인정이 농문화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선 저런 면들을 볼 수 없다. 농인들도 여전히 웅크리고 있으며 청인사회도 무관심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란 영화나 ‘리얼’이란 일본만화 등 장애우들의 삶을 다룬 문화 컨텐츠가 늘어, 일반인의 농인을 포함한 장애우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시금석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먼저 서로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니 내가 한 학기동안 수화를 배우며 겪은 세 가지 단계가 있었다. 처음에는 수화를 통한 농인과의 유창한 대화가 가능할 정도까지 수화를 익히고 싶었다. 나름대로 노력도 하면서 수화를 익혔지만 냉철하게 지금의 내 수화실력을 평가해보면 필수적인 회화를 조금 할 수 있고 농인이 (의도적으로 천천히) 수화를 해준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인 것 같다. 이렇게 처음 생각에 약간 모자랐던 두 번째 단계를 거치며 다음 레벨을 생각해 봤다. 그것은 아마 학기 초에 가졌던 수화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습관화 하여 앞으로 계속 그것을 익혀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화도 언어로 인정을 한다면 그건 한학기 동안 내가 수화를 마스터 할 수는 없다는, 즉 살아가면서 쭉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화를 배움에 있어 딱히 의도적인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외국어에 관심이 있는 여느 친구들처럼 단지 수화에 대한 관심, 농인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하고 나면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지금까지 살면서 무관심 했었는지 반성해 본다. 또 내가 배우는 수화가 농인과의 의사소통 수단만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농인과 내가 친구가 되기 위한 단순한 다가섬이며 그들이 아직까지는 청인의 ‘말’을 들을 수 없기에 내가 당연히 ‘수화’를 배워야 하는 거라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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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널드화와 어플루엔자

Posted 2008. 8. 21. 16:22, Filed under: Ex-Homepage/Essay

*이글은 2004년도 교양수업 '미국문화와 예술'을 들을때 쓴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입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란 책과 '어플루엔자'라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두 책은 모두 미국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저자들이 비인간화 및 소비중독에 대한 현재 사회의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수업 이후에 제 나름대로 패스트푸드와 여러가지 쓰잘데기없는 낭비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데요.....실제로 알면 보인다고, 그렇게 생활패턴을 조금씩 바꿔가니 돈도 절약되고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일석이조였습니다. ^^ 내용이 그렇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 글을 읽어보시면 자신의 귀한 자산인 시간과 '돈'이 조금씩 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바꿔보는건 어떨까요?




 3월에 개강을 하면서부터 집에 있는 시간이 부쩍 줄었다. 같은 서울 안에 있지만 학교가 꽤나 먼곳에 있는 이유로 아침에 집을 나오면 밤 늦은 시간에나 집에 돌아간다. 당연히 집은 종종 비게 되는데 그때 가장 귀찮은 문제는 택배를 받을때 생긴다. 언제부턴가 나는 발품을 파는 수고를 덜고 가격 면에서도 조금 싸게 살 수 있는 온라인 쇼핑몰을 자주 이용하곤 한다. 그런데 택배는 도착하는 날짜를 알 수는 있지만 정확한 배달시간을 알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오기로 한 날은 물건을 받기 직전까지 매우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물건을 사면 살수록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한가지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새로운 종류의 스트레스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물건을 왜 산것일까? 내가 소비를 하는 이유는 그 물품이 꼭 필요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필요를 넘어서는 지출을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행복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물건을 산다. 그러면 정말 그것을 사니까 행복한것일까? 굳이 물건의 전달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문제점들이나 의미없이 쇼핑몰을 방황할 때 생기는 시간적인 소모를 들추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구입해서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꽤나 깐깐한 고객이라고 자부하지만 한두번만 더 캐물어 볼때 나는 쓸데없이 돈을 낭비한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없었다면 모든 문제들 그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골치덩어리의 여러 속성과 발생 과정 등을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와 ‘어플루엔자’, 이 두책은 내용면에서는 가볍게 여길만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다른 사회과학서적들과는 달리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많은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는 맥도날드화를 일종의 비정상적인 합리화의 패러다임이라고 정의한다. 처음 읽을 당시에는 이름 자체부터 쉬워보인 맥도날드화였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그리 만만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맥도날드화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적으로 합리화가 가지고 있는 효율성 등의 장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 사회와 그 밖의 세계의 많은 부문에서 현대문명의 ‘악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맥도날드화는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방식으로 번지는데 그는 그것을 합리화 과정에서의 한 단계로 보고 있다. 그는 합리화의 궁극의 모습이 관료제라고 여겼던 막스베버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얼핏 생각하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나치의 유대인대학살,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 포드의 컨베이어시스템, 레비타운, 쇼핑몰 등을 차례대로 설명하면서 그러한 것들이 현재의 맥도날드화가 나타난 배경이자 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합리화 단계의 할아버지격인 관료제를 언급할때는 베버가 우려했던 ‘철장감옥(Iron Cage)'이라는 합리화의 부정적인 언급하며 현재의 맥도날드화가 그때 그 시절의 철장감옥의 변형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철장감옥이 의미했던 것은 사회 전체가 합리적 제도로 이루어진 빈틈이 없이 견고한 그물망, 즉 감옥이라는 것인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현대인들은 더욱 단단해진 감옥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교육, 스포츠, 정치, 종교 등의 사회 전 범위에 걸쳐 있다니 이건 감옥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교도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얼핏 생각해보면 ‘합리’라는 말이 그리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으로는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를 많이 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우리와 우리 사회가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 책을 읽을때는 곳곳에서 거부감이 들거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주장들을 볼수 있었는데 그것 또한 습관처럼 일상을 살아온 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합리화의 오류는 무엇일까?

 우선 저자는 합리화 자체는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만들지는 몰라도 사람 자체는 바보로 만든다고 한다. 에코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야만이 그 지배가 수월하다고 했는데, 합리화는 어딘가에 숨어있는 빅브라더들이 인간을 지배하기 용이하도록 해준다. 합리성과 관련하여 조금 더 맥도날드화의 특성을 분류해 본다면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그리고 통제라고 볼수 있다. 형식적 합리성의 전제조건인 효율성과 ‘양=질’이라는 희한한 등식을 성립시키는 계산가능성 및 시스템적인 자동화로 고객을 통제하는 일 등은 각기 나름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고 있다.

 맥도날드화는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덩달아 패스트푸드점에 익숙해진 살마들은 그들의 삶에 모든 분야에서 또한 효율성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효율적’이라는 말 자체의 어감은 현대인을 좀더 세련되고 살아가는데 적합한 인간형이라는 뉘앙스를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질에는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묻는다면 또 궁금적인 효율 모델만을 찾아 올라갔을때 그 결말이 어떤 모습일지를 묻는다면 우리의 합리화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알수 있다. 뿐만아니라 효율이라는 미명아래 감추어진 지극히 잘못된(그러나 쉽게 인식할 수는 없는) 비효율적인 사항들, 예를 들자면 고객의 선택의 폭을 좁게 만들고 또 그들로 하여금 부수적인 일등을 하게 시키는 따위의 일들을 현대인이 당연한 듯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효율성 자체에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큰 장점만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셀프서비스는 마치 우리의 의무가 그 서비스의 과정에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단지 상황에 익숙한 소비자들이 무감각해서 그렇지 따지고보면 이미 우리가 지불한 돈에는 서비스에 대한 비용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소비의 주체인 고객의 권리와 의무가 혼동되기 쉽다. 그러면 가장 기본적인 소비자의 권리인 ‘만족’이 침해를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인간은 사회시스템에 종속되어간다. 맥도날드화를 우려하는 글쓴이는 그러한 폐해가 대학사회, 의료기관, 오락 등 어느 분야에서도 예외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효율성은 비인간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고객이나 종업원을 대할때는 한 가족처럼 여겼던 예전의 개념이 사라졌다. 자동화에 따른 단순노동직의 증가와 비정규직의 증가, 저임금 체계의 만연은 지금도 문제이지만 종국적으로는 소유자에 의한 인간지배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뿐만아니라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이 사라지면서 가정의 붕괴 조짐이 나타난다. TV만을 보며 식사를 하고 바쁜 생활 속에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는 일상에서는 가정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창의성,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적이고 무덤덤한 것들만이 활개를 치는, 인간은 그 와중에 숨이 막히고 있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해도 원가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만들때 들어가는 정성, 즉 질의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패스트푸드의 가격이 슬로우푸드의 값과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은 합리화의 인간통제 가능성과 ‘합리의 불합리’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맥도날드화의 철장감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책의 저자는 그 원인을 돈, 가치 그리고 적응력에 두고 있다. 실제적으로 들어오는 단편적인 경제수익과 맥도날드화 자체를 목적시하는 미국의 문화 및 사회에 자체적으로 적응해가는 맥도날드화의 본유적인 속성 등이 우리를 계속 묶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후기산업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합리화에서 탈피해보려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시기 내에서 조차도 맥도날드화는 변형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즉 사라지기에는 너무 오래되고 전체적으로 퍼져버린 암세포같은 맥도날드화는, 영화 가타카에서 경고했던 유전자조작에 의한 하이테크임신이나 자동화된 장례상품 등 합리화란 단어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것만 같았던 삶과 죽음의 영역에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가 사회의 구속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면 ‘어플루엔자’는 우리가 왜 돈과 물질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잘 설명해 준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세대가 물질적으로 계속 풍족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경제적 팽창에 대한 강박적인 욕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현상을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라고 이름지었다.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한 가장 큰 문제점은 공동체, 즉 이웃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에 있다. 예부터 내려온 지역 모임에 대한 소속감이나 이웃간의 화목함은 사라지고 있다. 이웃사촌끼리는 집안의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던 우리 선조들의 미덕은 각박한 현실과 경제의 행정시스템에 묻쳐 찾아보기 힘들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단지 소비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 자신을 돌보지는 않는 것처럼 분명히 누군가 언젠간 치러야할 번영의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은채 앞으로만 나아간다. GDP는 늘어나면서도 사회건강지수는 오히려 감소하고 아동학대와 청년실업은 증가하는 부작용은 곧 곪아서 터질 사회의 부조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풍요병에 의한 정신적인 타격 역시 큰 문제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기에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며 자괴감에 시달린다. 또 사회적으로도 풍요의 모습 뒤에 숨겨진 극심한 빈부격차와 같은 불공평한 모습들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얼마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질병을 유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프리카에는 매일 기아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지구촌 한편에서는 과소비와 남는 음식물처리가 문제가 되는 남북문제는 원인에 대한 분석 뿐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자원이 고갈될 수도 있다는 경고는 아마도 가장 현실에 와닿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모든 물자가 어느 하나 자연에서 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의 재생능력을 심하게 벗어날 정도로까지 지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들의 가치를 잘 안다면, 아마 지금처럼 많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당연한 듯이 이것 뿐 아니라 저것마저 소유하려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의 욕심이 생물종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며 점차 자원의 전체량을 줄인다. ‘환경의 역습’이라는 연초의 TV프로그램에서 경고했듯이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과 새집증후군의 원인물질인 포름알데히드 등은 모두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의 움직임은 제품의 비용에 환경세를 추가하고 여러 시민단체에서 가시적인 개선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 너무 익숙해진 편리함에 우리는 쉽게 기존의 방식을 고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라는 공익광고처럼 좀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자원의 많은 부분을 사용하는 선진국들의 작태도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퇴치하는데 큰 걸림돌이다. 미국, 중국이나 러시아는 겉으로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며 세계의 평화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여러 가지 협약이나 규정을 무시하고 있다. 리우환경회의 등에서 시작한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이산화탄소규제에 대한 안건도 몇몇 강대국의 로비와 횡포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힘을 앞세워 자기들만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국제, 정치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면에서 브루스커밍스의 글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반세기에 걸쳐 남북한 양측에 얼마나 잘못된 권리를 행사해 왔는지 알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구소련의 해체와 독일의 통일을 기점으로 이미 이념의 시대는 가고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구촌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한다. 물론 냉전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면이런 글 자체를 볼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겠지만 현재가 있다고 해서 과거가 모두 용서가 되고 인정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지금의 우리 세대도 이런 글을 통해 무엇이 진실에 가깝고 또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하는지를 생각해 볼수 있었다.

 내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얼마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핵읜 존재는 미국이나 또는 우리나라에 대한 선제공격이나 위협용이라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의 제도권교육이나 군대시절, 여러 매스컴을 통한 교육의 결과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브루스커밍스는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핵이라는 것은 누구를 먼저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한 방위전략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북한이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전쟁억제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핵개발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정말 미국이 핵무기가 폐기되어야만 한다고 북한에게 요구한다면 왜 그들은 먼저 그들의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는 것이며, 북한이 공개적으로 요구한 IAEA의 미국내 감사는 어째서 수용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이 글 하나만을 가지고 정말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며 북한은 시간이 꽤나 흐르기는 했어도 남침을 했던 과거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내재적인 위험요소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경찰국가 미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미국은 매년 ‘악의 축’이란 이름을 단 적대국가 명단을 발표한다. 물론 북한은 그 명단의 단골 손님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명단의 다른 국가들은 현재 어떤 상황일까? 알다시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침략으로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시리아, 쿠바, 북한 등 다른 나라들도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는 ‘악’이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인권에 대한 문제와 독재정치 등 잘못된 점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미국이 무슨 권리로 다른 주권국가에 대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인가? 이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에 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북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미국은 안하무인격으로 자신들의 힘을 남용했다. 대선 당시 항상 떠도는 소문에 이미 한국의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정해놓은 것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미국은 분명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분명 미국은 우리나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의 힘든 상황에서 미국을 중심으로한 원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만들기까지 좀더 긴 시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 특히 90년대부터 시작된 탈냉전시대의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분명히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독주를 시작한 미국의 태도는 전세계적으로 너무나 독단적이었고 특히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는 마치 북한은 악의 근원이며 남한은 미국의 51번째 주인양 행세해 온 것이다.

 아직도 남북한이 대치해 있는 분단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이라는 두 국가를 비교하며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국이 보이고 있는 세계 여러 곳에서의 행태들, 특히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한 오만한 행동들은 분명히 월권행사이다. 그럴 수 있는 자격은 어느 단일국가에도 없다. 굳이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러한 권한은 UN에 있는 것이고 UN의 모든 구성원들은 평등한 주권을 가진다는 UN헌장의 말처럼 북한도 엄연한 한 국가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UN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모습을 볼때 혀재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파워게임이 얼마나 무력의 사용이 없이 지속될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그것은 어느 누가 유리하고 또 누가 누구의 편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애시당초 게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이런 식으로 북한에 대해 요구를 하고 간섭을 한다면, 미국은 동네깡패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우리 부모님 세대분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초콜렛의 단맛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한두개쯤은 가지고 계신다. 그만큼 힘든 상황에서 미국은 분명히 대한민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면 관계 또한 변화를 주어야 한다. 다시말해 한미간의 새로운 관계의 틀을 모색해 보아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미군 장갑차 사건에 대한 촛불시위가 벌어질 당시에 미국의 정가에서는 혈맹국가인 한국에 대해 강한 불만과 서운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국가간의 관계란 것은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권을 서로가 인정해 준다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것이며 미국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현재 한국과의 관계에서 잘못 설정이 되어 있는 SOFA규정 등의 불평등한 조약들을 개정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그동안 미국식 자본주의를 여과없이 받아들이며 부정적인 면 또한 그대로 수용하고 숭배해온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나 ‘어플루엔자’에 나오는 사례들은 주로 90년대 초중반의 미국사회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이미 그런 징후들이 사회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선진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의 올바른 기준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극단적인 말이 아니라 지킬 것은 지키며 진정한 발전을 도모해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화가 문제라고 하여 사회에 뿌리박힌 그 시스템 자체를 한번에 없애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선된 모습으로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환경 친화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면을 가미한 개성있는 시스템을 사회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의 문제는 당연한 권리 또한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인데 흔히 말하는 클레임성 고객 또한 다른 관점에서는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권리를 지켜가야 한다. 우리는 합리화된 사회구조 및 물질의 홍수 속에서 우리와 우리 자손들 및 전세계의 인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따져보며 생활할 의무 또한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유도함으로 인해 자신에게 생기는 ‘변화’를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의 노력에 못지않게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지원 또한 필수이다. 인간의 욕심도 무한한 것이며 또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구조 내에서는 개인의 노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환경, 교육, 복지 등의 여러 조건들을 포괄할 수 있는 국가차원의 개선 노력도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단순히 소비세를 늘리거나 소비를 제한하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어릴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가질수 있게 가정과 학교에서 똑바로 배울 수 있다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학생과 시민단체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그 모은 뜻을 행정적인 측면과 연계시킬 수 있는 장치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앞으로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온 모델은 미국식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장점들 뒤에 숨겨진 많은 폐해가 있다. 그러한 부정적인 면을 고려한 우리 나름대로의 새로운 사회, 문화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고 단순하게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합리화는 무엇을 위한 합리화인지, 우리 모두가 한배를 타고 순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혼자만 잘 살면 아무런 재미도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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