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주의자의 거짓말
Posted 2008. 8. 22. 01:54, Filed under: Ex-Homepage/Essay스톡홀름 신드롬이란 현상이 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이란 도시에서 은행 인질 강도 사건이 발생했는데 경찰과 대치중인 범인에게 동화된 인질들이 오히려 범인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편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인질들은 다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과 가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강도의 말에 ㄱ마화되어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고 과연 그들이 어떤 말을 했기에 그렇게 위험한 상황의 사람들조차도 ‘세뇌’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자신들이 그런 짓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 당위성 등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흔히 말하는 ‘둘러대기’를 경험하는데 거의가 듣고 보면 맞는 말인 듯 싶기도 하며 그것이 타당하지 않아도 따르게 되는 등 경우에 따라서는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것에서부터 상대주의를 ‘경우에 따라 융통성 있게 그리고 구체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 한정시킨다면 나 역시 어느 정도는 상대주의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급변하는 이 시기에 적절한 대처 능력이야말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그것에 치중하면 많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관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신뢰를 얻기 힘들 수 있다. 이현령비현령 식의 처세술은 만약 어떠한 잘못을 저질러도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기에, 그 사람은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절대’진리란 있을 수 없기에 그들의 행동은 타당하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 간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선과 악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칫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식 사업을 하는 사람의 경우 자기 자신에게는 얼마든지 떳떳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업 지침서에 있는 논리대로라면 모두가 부자가 되고 행복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실제 사건을 보면 많은 경우에 있어 그것은 사기이며 그래서 접적인 제한을 받는 것이다. 상대론자의 궤변은 어느 누군가의 정신적 물질적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
또 상대주의자의 논리는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특정 분야의 예를 들자면 안락사 논쟁에 있어서의 ‘매끄러운 경사길’ 이론이 있다. 그것은 안락사 찬성자들의 견해를 작은 것, 예를 들면 소극적 안락사의 제한적 허용, 엄격한 법적 제한아래 허용 등을 통과시켜 시행하면 차츰 그들이 원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향한 목소리가 커질 것을 우려하는 이론이다. 마치 절벽 끝에 있는 사람을 조금씩 민다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 그 뒤로 넘어지듯 작은 것이 모여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물론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원화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생명이나 인간의 존엄 등 천부인권과 관련된 사항에서는 어느 정도 제한이 필요하다. 상대주의를 표방한 단체행동은 사회적으로 큰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 독일 나치 정권 당시 그들에게 광분하며 협조한 독일 사회 지식인층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불거진 배우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논란도 우리 사회가 지켜야할 가치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상대주의자는 자신에게 조차도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더 나음을 위한 상대적인 접근도 결국은 새로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역시 ‘절대주의’적인 속성을 가진다. 자신이 부정하는 절대주의를 긍정하는 결과를 인정하고 그것을 따라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상대주의자들의 신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에서 상대주의자들은 주장의 논리적 일관성을 잃기 쉬우며 결과적으로는 스스로를 속이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조금씩 따져보면 결국 그들의 주장은 공허하기까지 하다.
이렇듯 극단적인 상대주의는 개인 간의 관계나 사회 전반적인 사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상대주의는 장점도 많이 있다.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으며 그 안에서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려면 상대적으로 최적의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나 또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때 등 모든 상황에 있어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개인에게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가치’에는 그러한 개인적 잣대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 윤리, 관습, 그리고 법이 존재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상대주의자가 좋다. 그러나 나의 가치관의 어떤 면들, 신조,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등을 고려할 때는 ‘절대적’인 기준을 견지하고 반영할 것이다. 양보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마지막 보루로서의 절대주의와 변화의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완충제 역할을 하는 상대주의 화해야 말로 앞으로의 사회와 개인의 발전에 필수 요소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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