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반대편에서 이 소식을 전해주시던 어머니, 즉 외삼촌과 유난히 가까웠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차피 일어날 시간이긴 했지만 조금 더 차가운 머리가 될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운명을 달리하신 많은 환자들의 주치의를 해보았기 때문일까?
지난달 중순부터 본원 내의 암센터를 돌아다니며 구해왔던 팜플렛, 그리고 인터넷 검색 및 오프라인 검색을 통해 골랐던 3권의 책이 지금 태평양을 건너 LA를 향하던 시점에 외삼촌께서는 외숙모님, 지선이, 지연이 누나를 남기고 눈을 감으셨다.
일단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하다 얼마전 알아서 저장해둔 미국 지선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슬픔에 빠져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짧게나마 상심에 대한 위로와 슬픔을 공유하기 위한 말을 건네고, 흐느낌 이외에는 아무런 말도 못하던 지선이와의 오랜만의 통화는 끝났다.
3월달 바쁜 혈액종양내과의 주치의 시절이다. 집이 대천인 P아저씨는 식도암이 위장쪽 입구를 크게 막아서 식사를 점점 못하셨다. 설상가상 속쓰림증상도 심해져 palliative하게 stenting을 하였으나 크게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매번 마약성진통제 용량을 올려달라하고 속이 쓰리다하면서도 침대 곁에는 컵라면과 빵봉지가 널부러진채로 놔두었던 아저씨. 지금은 당연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시겠지만 그 당시 깊은 공감대와 rapport가 형성되어 있었다. 전임의 선생님은 아저씨의 '의지'를 탓하며 상당히 부정적으로 예후를 생각했고 결국 그 말이 맞았지만,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인생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며 난 그것에 지금도 만족한다. 난 최선을 다했지만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죽음'이니까.
지난달 수술 동의서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술 중 RLN기능저하로 쉰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10~15%이다'라는 문구를 설명할 때도 그냥 지나가면 되는 것을 난 꼭 이 말을 덧붙였다.
"100명중 90명은 괜찮은거지만, 10명이라도 그게 내가 포함이되면 큰일이죠"
난 쓸데없이 불안감을 부축인 것일까? 외래에서 실제 환자분들이 들어와 이런 complaint를 많이 한다. 수술 전에는 이런 가능성에 대해 설명을 잘 못들었다고 말이다. 이것이 일이 커지면 의료 소송이 될수도 있고 적어도 병원 외래를 웅성거리게 할 수는 있는 정도의 impact는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나오는 것이 부작용에 별표가 되어있는 동의서.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좀더 현실적으로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정한 informed가 되는 것이니까.
외삼촌과 직접 통화를 했던 5월 말의 일이다. 외삼촌께서는 반복적으로 최근 결혼한 나를 축복해주셨다. 그런데 정말 계속 축복만 해주셨다. 이미 조카의 말을 들으실 정도의 마음의 여유도 '암선고'가 짓밟아 버린 상태처럼 느껴졌다(이후 어머니와 통화를 하실때는 조금 나아지셨지만 말이다). 그리고 6월 초에 외숙모님과 전화를 하고 잠시 외삼촌과 통화를 했었는데, 이미 기력이 너무 떨어지셔서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내가 들을 수는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말을 하셨던 것이다. 너무 슬펐다. 인간의 존재는 이렇게 질병에 무기력하구나.
작년 local 요양병원에서 근무를 할 때도 정말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사망선고를 했다. Terminal care가 주된 병원인지라 내 주된 job이 그런 것이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신체검진을 하고 사망시각을 선고하지만 사실 이미 베테랑 간호사들은 '그때'가 언제인지 대충 감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신체검진을 하고 친족에게 의학적인 사망시각을 알리면 내 일은 끝이고 총 5분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냥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당신은 죽음과 가깝게 지내고 있나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몸속의 태엽시계는 언제 멈출지 모른다. 언젠가는 나의 시계도 멈추고 나도 죽을 것이다. 결국 그때까지 '잘' 살면 된다.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즐기고 말이다. 내가 할수 있는 것만 잘 하면 되니까 이런 것은 나이가 들고 그러면 알아서 잘 하겠지만, 문제는 '감정의 관계'가 황폐해지는 것에 있다. 나를 아는 그 사람에게 나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건 어려운 문제다. 많은 동서고금의 철학자들도 정답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진행중인 난제다. '잘'살기로 마음 먹었으면 주변의 사람과 '좋은 감정'이 많이 생길 것이고 그것이 순식간에 단절되면 후폭풍도 클테니까.
결론적으로 이렇게 dry하게 글을 마무리짓고 싶지 않아서, 상심하고 있을 친척동생에게 쓴 메일을 덧붙인다. 감정에 충실하자. 그리고 가끔은 그런 감정을 드러내자. 그럴 때라도 살아있음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너무 각박하다.
+
사랑하는 OO이에게.
OO아, 오늘 새벽에 어머니(작은고모)로부터 외삼촌의 부음소식을 듣고 오빠는 너무 놀랍고 슬펐단다. 2010년 가을에 방문을 했을 당시만 해도 외삼촌께서 직접 우리를 공항까지 데리러 와주셨고, 며칠간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밤 늦게까지 보냈던 것이 기억에 선한데 갑자기 아프셔서 걱정을 많이 했었어.
이후에 작은고모를 통해서, 그리고 외숙모님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상황을 듣고 외삼촌의 상태가 많이 우려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외숙모와 OO이 네가 함께 외삼촌 곁에서 돌봐드리고 있다고 하여 우리는 여기 한국에서도 마음이 많이 놓였단다. 외숙모님의 꼼꼼하심과 섬세함, 그리고 네 효심이 이곳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오빠의 마음은 든든했어. 여기서 오빠도 마침 암센터 외과에서 파견근무 중이고, 또 지난 3월에는 혈액종양내과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많은 암환자 분들을 보았고 외삼촌께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가늠이 되어 마음이 아팠단다. 종양이라는 것, 특히 말기암은 의학적으로도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고 환자 본인 뿐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많은 고통을 주는 것이기에 병원에서 그들을 돌보는 입장이 되어서도 감정을 절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거든. 특히 음식을 잘 못 드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더욱 오빠는 너무 걱정이 되었어. 그럼에도 외삼촌께서는 항상 전화통화를 하실때마다 이곳의 우리가족들에게 축복을 해주셨단다. 아직도 오빠는 그때의 통화가 기억에 선하단다. 본인의 질환때문에 힘들다 하시는 말 보다는‘행복하게 잘 살아야한다’고 하시던 외삼촌의 말씀이 너무 감사했었거든.
결혼 후에 여건이 되면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는 많이 후회가 되지만 그것도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더구나. 원래 예정은 가깝게는 올 10월에 어머니와 우리 내외가 휴가기간에 함께, 아니면 어머님께서라도 한번 미국에 다녀올 생각이 있으셨고 또 외삼촌의 급작스런 지병악화로 다음달 초에 어머님만이라도 가실 계획이셨거든. 사람일은 한치 앞길도 알 수 없다고 이렇게 금세 우리 곁을 떠나실 줄은 정말 몰랐기에 이곳에서도 많이 슬퍼하고 있단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너무 힘들어 하셔서 오빠와 우리 가족들이 위로해 드리고 있어.
우리가 어렸을 적에 OO동 외삼촌 댁에서 함께 지냈던 기억이 난다. 이모네집도 그곳 근처에 있었지만 그래도 외삼촌댁에 가끔 놀러가고 유치원에 다녔던 그 시절이 생각나. 외삼촌께서는 인자하시면서도 오빠가 무언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 바로 잡아주셨었지. 그때는 잘 몰랐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외삼촌과 다른 많은 어르신들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처럼 자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어른이 된 지금에야 새삼 느낄 때가 많아. 그래서 오빠도 미진하지만 부모님께 더 효도하고 잘하는 아들, 그리고 사위가 되려고 노력중이란다.
외숙모님께도 다시 연락을 드려야하지만 지금은 경황이 없으실 것 같아서 일단 어느 정도 마음에 안정을 찾으시면 연락을 취할 생각이야.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가고 싶지만 이렇게 전화와 편지로 애도의 뜻을 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슬프고 안타깝구나. 그래도 외삼촌께서도 마지막까지 가족들과 함께 하셔서 편안하게 임종하셨을 것이라 믿는다. 오빠도 멀리서나마 항상 외삼촌을 위해 기도드렸고 또 무엇보다 통증이 덜하시기를 기도드렸었어. 지금 OO이 너도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무사히 장례를 마치고 슬픔에서 벗어나 밝고 환한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를 오빠는 진심으로 바란다. 외숙모님도 많이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OO누나와 너희 가족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오빠는 매일 밤 취침 전에 하나님께 기도드리는데 오늘 밤에도 하늘나라로 가신 외삼촌과 슬퍼하고 계실 외숙모님, OO이누나, OO이 너와 너희 가족을 위해 기도드릴게. 외삼촌께서도 이제 편안히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항상 우리를 돌봐주신다고 믿고 다시 힘을 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 자유로움이란 것도 그대 안에서 뿐이죠. 오늘밤엔 그대가 왠지 난 사랑스러워요 예전엔 몰랐던 귀여운 웃음이 무척 좋아보여요
내일이면 그대를 또다시 만날 순 있지만 이 순간을 조금 더 내곁에 함께 있어줘요 stay with me tonight. oh, please. 그대 날 사랑한다면 지금처럼 언제까지 항상 그대 곁에 좋은 여자일 거예요.
그대와 함께할 수 있는 세상은 아름다워 내가 그대의 전부라고한 그 말이 너무나 좋아요.
사랑할 땐 누구나 이렇게 행복한가요. 언제라도 영원히 내곁에 함께 있어줘요. love is all i need 그대 오직 날 사랑한다면 지금처럼 언제까지 항상 그대곁에 좋은 여자일 거예요 oh, please. stay with me tonight. 그대 오직 날 사랑한다면 후회는 없어요 시간이 흘러도
Happy together by 서영은
p.s.
연말이라 그런지 이 곡을 들으면 크리스마스분위기가 나는군요.
사실 3가지곡 모두 당시에 그렇게 인기있던 곡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편하게 다들 공감하게 들으실 수 있을 듯 합니다.
고민이 많던 2004년 HUP라는 Project를 시작했었습니다. 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읽고서 느낀바가 있어 시작한 막연한 글쓰기였죠.
내 자신의 단점, 불안함에 대한 불만족의 근원을 파헤쳐보고 그것을 개선하자는 거창한 Human Upgrade Project였습니다. 블로그가 아닌 홈페이지에 글을 쓰는 그런. 그렇지만 3회까지만 좀 써보다가 멈췄습니다. 바쁘기도 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요.
중고등학교때의 제 모습, 98년도 대학교 신입생의 모습, 2000년대 초반의 군인의 모습, 중반의 늙은 의대생의 모습, 작년 인턴과 지금 일반의의 제 모습,
인간 '오승민'을 구성하는 그 무언가는 꾸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그래서 이제 페르소나를 조금 바꿔보려 합니다.
마음속의 배려심은 분명 있었지만 너무 무뚝뚝했죠. 이제 조금 더 먼저+ 많이 웃고 부드러워지려고 합니다. 마음속의 여유심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네요. 그러나 타인에게는 여유있게 대하겠습니다. 간호사의 실수에도 위트있게 잘 대처하고 너그러울 수 있고 격려해줄 수 있는 그런 여유, 끼어들기 한 차에 대해 휘파람을 한번 불고 잊을 수 있는, 내가 끼어들면 목례나 손을 들어줄 수 있는 여유, 알람벨이나 스테이션콜에 흠짓 그만 놀라기, 내 자신의 불완전함을 용서해주기. 말도 조금 느리게 하고 좀더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부드럽게 eye contact도 하고 맞장구도 쳐주고...
이제 30대 중반입니다. 뭔가 발전된 모습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멋진 남편, 멋진 아빠가 될수 있을테니까요!~ :)
단기목표 : 좋은 남편, 좋은 아빠 (그리고 여전히 좋은 아들이자 친구...맞죠? 맞지요? 하하...!)
나의 멋진 아버지께서는 가끔 형과 내게 메일을 주신다. 그 내용으로는 당신께서 재미있다 느끼셨던 콩트도 가끔 있지만 아직 세상의 어려움을 잘 모르는 미숙한 둘째 아들에게 큰 교훈이 되는 내용을 주시기도 한다.
머리가 복잡한 이 시점에, 이 많은이 정말 '많은' 이런 혼란한 시점에, 오늘 캐나다로부터 온 아버지의 이 메일은 평생 의사로 살아갈 내 마음에 간직해야할 경구이다.
어릴 때부터 꿈꿔왔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긴 길을 돌아왔지만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이 시점에서 정말 초심을 잃지 말고 열심히 정진해야겠다.
기도하자.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싶다는 그 마음, 피부와 피부를 맞대고 그들의 숨결을 느끼고 싶다는 그 마음. 그런 '인정'과 '능력'을 가진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 내 모습은 많이 정체되어있는 것 같다.
슬픈 느낌이다. 뭐 꼭 그래서 오늘 오후에 식사 대신 과자 세봉지에 아이스크림 한통으로 폭식을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속도 느끼하다. 너무 감정적인 것도 조금 자제!
아버지와 같이 환자를 사랑하고 그들을 보살피는 의사가 되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승민아,
날씨가 많이 덥다는데 수고가 많구나. 네가 진로문제로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다. 해서, 내가 만난 의사들 중에 특히나 고마왔던 한분이 생각나서 적어본다.
네가 앞으로 5년, 10년 또는 그후에라도, 몸과 마음이 불편한 많은사람들로 부터 --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사람과 부자의 구분없이 -- 한결같이 존경받고 기억되어지는 숭고한 의사가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
세상에 많은 종류의 직업이 있지만, 가장 힘든 직업중의 하나가 의사일 듯 싶다. 언제나 징징거리는 환자들의 질병을, 웃음과 위엄으로 대적해야하는 거룩한 임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의사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당연하게 부치는가 보다.
아버지가 태어나서 자란, 마포구 공덕동에 지금도 춘사의원이란 개인병원이 있을 걸로 짐작한다. 할머니세대부터 나의 세대까지, 6.25전쟁후에 가난이 삶의 전부이던 때에, 시간과 돈에 구애받지 않고 신분에 차별도 안두고, 오로지 환자의 아픔의 치유를 가장 우선시하던 고마운 분이 계셨는데, 그분의 아들이 의사가 되어 가업을 이어받고,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거든. 내가 철없던때 부터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분 이셨다.
현재의 의료계의 시스템의 변화를 알수 없기에 함부로 언급할 수는 없다마는, 환자의 질병이 공격할 때에 의사의 인술로 방어하여 제압해야하는 이치는 불멸의 상관관계라 여겨진다. 어찌보면 의사가 환자에 앞서서, 진정으로 행복해야 좋은 진료가 나올 것 같다. 거기서 의사의 건강도 더불어서 더욱 증진될 수 있겠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또한번 깊이 음미해 보고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로방향을 정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글을 적어본다.
새로운 직장 이곳에서 지낸지 어느덧 4개월째이다. 의대생활 + 인턴 = 7년, 이 기간은 의무적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었고, 어떻게 보면 그 이후의 시간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시간이다.
어릴적부터 나는 내 스스로 계획짜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고등학교때 학습스케쥴표를 직접 만들어서 미니펀치기를 구매한 뒤에 그것을 엮어서 나만의 스케쥴러를 만들었고, 일일계획, 주간계획, 한달계획을 적으며 희열을 느끼고 또 100% 완수하지 못한 채 빨간줄이 그어지거나 delay되는 것을 보며 마음 한켠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하고.
어쨌든 올해는 나의 scheduled track에 없던 그런 한해이다. 그럼에도 당연히 지금은 새로운 track을 밟아가는 중이다. 웨이트트레이닝도 하고 골프도 배우고, 영어회화 학원도 다니고, 자전거도 사고 제빵기와 오븐을 산 뒤에 빵과 쿠키도 만들어보고, 허브식물도 기르고 있고 읽고싶었던 책도 많이 읽고, 그동안 뜸했던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그러고보니 어린시절 인성의 기본에 어느정도의 skeptism을 깔고 자랐고, 나름 개인적으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내 주변의 울타리를 거기에 맞췄고, 내 스스로 정신적/ 육체적 단련하기를 좋아했고 또 어느정도 소기의 단기목표를 이뤄냈고, 계획표를 짜서 톱니바퀴처럼 지내는 것을 더 즐겨하는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남자인 나는,
개인주의적이다.
나에게 주어진 올 한해를 일종의 additional chance라 생각해서 많은 계획을 짠 뒤에 실천했다. 독서계획도 카테고리가 4개정도 있었는데, 다 읽었다. 그 중에는 영어공부처럼 '끝이 없는' 분야도 있는데 일단 지난주말부터 보류를 한 상태이다. 더 priority가 높은 계획이 생겼기 때문이다.
항상 고민이다. What do I have to do? < What do I want to do? 문제는 What's 'WHAT'? 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건드릴 수 없는 분야도 분명 많다. 왜냐하면 나에게 없는 '조건'이 간혹 결정권을 가진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처럼 돈이 없고, 누구처럼 권력이 없고, 더 쉽게는 누구처럼 Big daddy가 없고...없는 것이 많다(그래서 더욱 내 자신은 big brother가 되고 싶은 것일까?).
종종 여러 옵션에서 혼란스러울 때, 이런 명제가 도움이 된다. '할 수 있는 것에서 최선을 다해라' 계획을 짜서 실천을 한다는 것은, 내 자신과의 약속이며 채찍질이다. 그리고 그에따른 결과와는 별개로 적어도 '과정'에서의 허탈감은 전적으로 '내 자신'의 몫이다. 그래서 내가 계획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 그 희미한 것을 찾아가기 위해 계획이 필요하다. 투자를 위해서는 가능성을 보아야 하는데, 가끔 그 가능성이 꿈과 상충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이루어지지 않은 꿈이란 성취할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다행히 성취하지 못했을 경우 올 수 있는 bad things가 지금 현 시점에서는 어느정도 견딜 수 있는 그런 것일 가능성이 크기에 오늘도 계획을 세운다(사실 세웠다. 그런데 3일정도 지났는데 너무 나태해진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이기도 하고).
지금의 나는 혼자다. 그래서 더욱 강해져야 한다.
어릴적부터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외로움을 느끼거나 그러진 않는다. 뭔가 바쁘게 하면서 지내왔기에 더더욱 그럴 것이고.
그러니 이제 테마를 바꿔서 다시 바쁘게 살 것이라고 다짐한다. 꿈이 있으니까. 열심히 하자. 화이팅!
P.S. 나의 요즘 지내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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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에 비친 내 모습
- by 故유재하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 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겉으론 감추며 한숨 섞인 말 한마디에 나만의 진실 담겨 있는 듯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엇갈림 속에 긴 잠에서 깨면 주위엔 아무도 없고 묻진 않아도 나는 알고 있는 곳, 그 곳에 가려고 하네
근심 쌓인 순간들을 힘겹게 보내며 지워버린 그 기억들을 생각해 내곤 또 잊어버리고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