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HUP 2탄; 신앙생활에 있어

Posted 2008. 8. 21. 16:19, Filed under: Ex-Homepage/Essay

Q: 나는 원래 신의 존재를 믿었었던가?


  그렇다. 중고등학교의 생활 기록부에도 또 군

입대할 때의 문서상에도 난 모태신앙의 크리스

챤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항상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오직 그와의 대화 수단은 기도 뿐이라는

생각을 지닌, 한편으론 교회란 곳에 회의감을 느끼

는 사람중에 한명이다. 물론 내가 절실한 신자인

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나의 신앙 생활은 1기와 2기로 나눌 수 있다. 1기

는 그 시작이 언제인지부터 불투명한 옛날부터

대학 1~2년의 시기까지였다. 남들만큼 성경을 읽

고 찬송도 불렀으며 교회일에도 적극적이었지만

교회 생활이 일종의 사회활동의 의미 외에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진 못했다. 그때의 영향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윤리적 측면, 정서적 측면

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

다. 미숙했던 나에게 종교란 것 자체는 가슴으로

와닿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각 종교들은 너무나 배

타적이었다. 그나마 불교나 천주교가 기독교 보다는

나았었고...) 어느 종교를 신봉하더라도 결국 스스로

하는 질문의 귀결은 절대자와의 조우인데, 그때의 나

는 그런 일체의 것들은 인지하지도 못했고 인정하려는

마음조차 갖지 못했었지만 말이다.

 

  2번째의 변화는 그와 나 사이에서 모종의 계약이 끊

어졌을 때 일어났다. 그것은 사실 계약이라기 보다는 나

만의 독단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과의 관계란 것은 절대자와 복종자가 아닌 친구 사이의

그것과 다름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념과 관

련된 문제인데 내가 그의 발에 엎드리지 않는 한 내 마음

깊은 곳의 '나'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이건 최근에

와서 확실해진 것이다. 제 2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잘 몰

랐었던 것이기도 하며) 결과적으로 내가 입은 상처는 계

속 내 자신으로 인해 곪아갔고, '신=친구'라는 개념조차도

차 멀어져갔다. 물론 내 외양적인 생활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미 기본적인 프로그램은 제 1기에서 몸으로 익혔

었고 굳이 종교란 카테고리 말고도 삶을 조종하는 부분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2003년 말까지 나의 내면 생활에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왔다. 98~00년 까지는 말이 별로 없었다. 약간은

회의적이고 시니컬한 생각을 가졌었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한 측면이 컸다. 난 믿었던 친구인 신에게 배신을 당했

었다고 혼자 믿었으며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험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일종의 조산이었는데, 나름

대로는 최선책이라 믿고 대응했지만 결과적으로 너무나 힘

든 시기였었다.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느낄 법만

한 외톨이가 된 느낌...(물론 친구들이 있지만 그들의 존재

란 당시의 내게는 진통제의 의미였을 뿐이다)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 밑바닥부터 흔들렸었기에 나의 내/외부의

모든 것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확신도 가질 수 없었던

날들이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었다.


  다행히도 어떠한 거부에도 꿋꿋하게 남아있던 것은

내 머리 속의 잡동사니들이었다. 극단으로 가지 않고서

는 두절될 수 없는 바로 내 자신에 대한 애증이 그때만

큼 강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뒤늦

게 시작된 개똥철학이 나를 꽤나 괴롭혔지만 다행히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나를 만들어 가고 있어서

고맙게 여긴다. 여기서 '관람객' 사람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99년 겨울에 모뎀 접속을 통해 접했던 네츠고의

여러 동호회들과 네츠고 관람객은 그 성격상 처음부터

달랐다. 컴퓨터를 배운다거나 음악을 다운받는다는 등

의 객관적인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모임이 아니었다. 그

저 우연히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전의 나를 아는 사람들

은 누구나 놀라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다. 심지어는 나의

어머니께서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실 정도이니까. 당시

의 내게 있어 관람객의 사람들은 진통제 이상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고맙다. 같은 선상에서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적어도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곳에 매달렸다. 어떠한 관계를 쌓음에 있어 초창

기에의 과도한 열정은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지만, 자칫 먼

지가 들어갈 만한 틈 하나로도 갈등이 생길 수 있는 것 같다.

결국은 모두가 사람일 뿐이니까...지금까지도 관람객은 좋

은 사람들의 모임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난 나름대로 그 지

속성을 최대한 길게 끌고 가고 싶은 마음을 항상 가지고 살

아간다.


  01~02년은 군대에서의 생활이었다....

그때의 삶은 나에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귀중한 교훈을 가르

쳐 주었다. 군대란 곳에는 나의 위가 있고 나의 아래가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위계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결

국 나의 기준으로 좁게만 아래쪽을 조절하려고 하기 때문이

다. 내가 잘하면 위에서 봤을 때는 훌륭한 하참이지만, 내가

나의 기준까지 일방적으로 아래 사람에게 요구한다면 나쁜

고참이 되어 버리는 곳이 군대인 것이다. 어쨌거나 군에서

의 외적으로 절제된 생활은 내적으로도 활기를 불어 넣어 주

었으며 상대적으로 많이 '밝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말

267 화학중대에서 나와 함께해준 이들에게 고맙다. 한편

이때 당시에 왜관교회란 곳에 잠시 다녔었는데, 그것이 내 종

교관에 영향을 준 것은 별로 없다. 청년부의 예배 방식이 신

선했고, 젊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도 상당히 '청년의 사회생

활'에 있어 유익했지만 여전히 종교의 핵심인 '신과 나'의

관계에는 별다른 자극이 없었다. 주보에 끄적인 잡다한

생각들은 나를 단련시켰지만 멀어진 친구는 보이지 않았

었다. (그러고보면 난 너무 어리석다. 그는 친구이며 친구일

수 없다. 주인이면서 친구인 것처럼...)


  03년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02년 12월 31일의 신년예배때

난 가장 현실적으로 기도드렸다. 분명 믿음이 있었겠지만 그

경중은 잘 모르겠다. 정형화된 기도란 완벽한 외형,즉 가식

만을 나타내줄 뿐이다. 그리고 작년 내내 신과의 교우는 그

가식조차도 거의 없었다. 애정이 식은 듯 했었다...

그러한 행위에는 결국 독단의 그늘이 지운다는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A의 고통을 떨쳐 버리자고 은연 중에

그렇게 다짐하고 또 자신했으면서도 그와 비슷한 경로를

밟는 것인가? 난 그 이유를 '나와 신'과의 관계에서 구했던 것

이다....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 말부터 올 1월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많은

것들을 지웠다. 예전과 달리 눈물이 나지 않음은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겠지...무언가를 지운다는 것은 참 힘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후회없는 한판이었다. 한 대 맞기는

했지만, 또 게임은 그렇게 끝났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만족

한다. 그리고 다시 준비를 한다. 인생의 게임은 여러 종류가

있고 또 인간에게 평생 적어도 3번의 게임은 온다고 그렇지

않았던가...

 

  이렇게 내 신앙생활의 2기는 종교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 그

런 탕자와 같이 바쁘고, 특이한 삶의 연속이었다. 내가

올해를 변화의 해라고 규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 좀

더 거창하게 말해 '절대자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인간의 삶

에는 매우 큰 문제가 생겨 버린다. 바로 '신념'에 대한 것

이다. 제 1기에서의 맹목적임도 일종의 신념이라면 신념이다.

일종의 '땡깡'의 의미가 강하긴 하지만. 제 2기에서도 각 시기

마다 한두 개의 마음가짐을 달고 살았었다. 그런데 절대자를

잊게되고 (단적으로 형식상이라지만 매일밤에 자기전에 했던

기도도 거의 않하게 되었다. 잊었던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니 무언가 너무나 허전하다. 또 조금은 두렵다. 내가 당

분간 맞부딪쳐야 할 게임은 그 단위가 점점 커지는 것들인데

거기에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들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2월초부터 검도장에 다닌다. 새벽반에 등록해서 조금은 육

체적으로 피곤하다. 차차 나아지겠지...A의 조언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고 싶어서 검도를 결심

했다. 그랬더니 더욱 절대자와의 관계 모색이 절실했다. 종

교에 대한 고민과 검도를 배움에 있어 뭐가 먼저인지는 중

요하지 않다. 나름대로 정의해보면 검도를 할 때 난 거울

속의 나를 직시하며 내 껍질을 파괴하는 것이다. 난 좀 맞

아야 한다. 흐릿한 먹물의 뭉치처럼 가슴 한 켠에 있는 못된

바이러스를 격퇴하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그렇게 해서 정화

된 나를 안정시켜 주는 것이 절대자이자 그에 대한 나의 간

구함인 것이다. 그러니 신을 나의 일부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과 검도의 연관관계에 대해선 심심할 때마다

생각해본다)


  제 3기의 시작은 작년 말에 내 머리 내부의 몇몇 기억을 지

울때 부터이다. 그리고 2004년 한해를 그렇게 멋진 해로 바꿀

생각도 그때 했었다. 이 결과가 언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

른다. 내년에는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기겠지만 올해의 HUP를

몸에 장착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나를 따라 다닐 것이다. 우

선은 실천단계로 이걸 생각해 보았다.


1. 매일 아침 Monthly Manna를 읽으며 오늘 하루를 위해 기

   도한다.

2. 매일 밤 오늘 하루와 내일을 위해 기도한다.

3. 주일에는 어느 성전이라도 가서 기도한다.


 ...1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잠깐 실행했었지만 여간해서는 열

흘을 넘긴 적이 없다. 그렇지만 검도와 함께라면 시간상 좀더

엄격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 2는 반성의 의미와 중장

기적인 의미에서의 기원도 포함한다. 3은 예배의 포맷보다는

내 자신과 신의 대면에 있어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의지한

다는 측면에 신경을 쓸 것이다.


  글을 써서 다짐해 보지만 내 자신은 너무나 약한 존재일 뿐

이다. 그러나 크눌프처럼 죽기 직전에 그것을 깨닫고 싶지는

않다. 어느 것을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정진하는 것처럼

그를 믿고 나를 다스릴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그것이 2004

HUP를 떠올린 계기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노력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고정화

되어있는, 분류되어있는 내안의 내가 너무나 많고 또 굳세다.

하지만 알은 깨고 나와야만 한다. 맛있는 계란을 먹기 위해

서는 반쯤 깨진 달걀, 그래서 내막은 찢어지지 않은 기분이

약간은 드러운 그런 과정들을 극복해야만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다 그렇고 그런거니까....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의

데미안 그룹의 리더를 '신'으로 설정했다.




07 Feb 04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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