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책을 읽은 것은 오래전이다.
워낙에 유명한 저자이기에 그리고 서점에서 잠깐 본 몇몇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서
읽었다.

내용에 대한 독자들의 평은 극단적이다.

Very good과 very bad만 있고, 중간이 없다.
내게는 흠, 지금이라면 몰라도 읽을 당시에는 전자에 가까웠다.
오죽했으면 예전에 홈페이지 만들 때
책의 내용 중에 인상적인 몇부분은 아예 타이핑을 했을 정도니...
(그 기념으로 여기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는
여기 있는 부분만 읽어도 책의 80% 이상은 다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택시운전사를 이용하는 방법>>

  우리가 택시에 오르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제기되는 문제

가 하나 있다. 택시 운전사를 적절하게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문제이다. 택시 운전사란 온종일 다른 운전

자들과 싸움을 벌이면서 차들이 붐비는 속을 요리조리 헤

쳐 나가는 일(보통 사람 같으면 심근 경색이나 정신 착란

을 일으키기에 딱 알맞은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사람의 형상을 한

피조물은 무조건 혐오하게 마련이다. 그런 점을 두고 세상

물정 모르는 상류층의 급진주의자들은 택시 운전사들이

모두 파시스트라고 말한다. 이는 그릇된 생각이다. 택시

운전사들은 이데올로기 문제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이 노동 조합의 가두 행진을 싫어하는 건 정치적인 성

향 때문이 아니라 시위대가 교통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극우파가 시위를 한다 해도 택시 운전사들의 비난은 달라

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좌파든 우파든 오로지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기만을 바란다. 자가 운전자들을 모두 총살

시키고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적절한 통행 금지를 실시

할 정부를 말이다. 그들은 여성을 싫어한다. 그러나 여자

라고 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여자를 혐오할 뿐이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여자들에 대해

서는 아주 관대하다.

  이탈리아의 택시 운전사는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주

행 중에 줄곧 위와 같은 의견을 서슴없이 토로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몹시 긴장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

음으로써 자기의 인간 혐오증을 드러내는 사람이며, 나머

지 한 부류는 다른 승객들을 태우고 가다가 겪은 일을 시

시콜콜히 이야기하는 단순한 수다를 통해 자기의 긴장을

푸는 사람이다. 이 마지막 부류의 택시 운전사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인생의 단면들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해도 새겨

들을 만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만일

선술집에서 그런 얘기를 늘어놓는다면, 주인은 집에 가서

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면서 그를 밖으로 쫓아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택시 운전사 자신은 자기 얘

기를 매우 놀랍고 신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런 택시

운전사를 상대할 때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이런 식의 말들

로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이 좋다. <원 세상에! 말도 안 돼요

설마 그런 사람들이 있을라고요. 정말 별 일이 다 있군요.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이에요?> 그렇게 장단을 맞춰 주는 것

은 택시 운전사를 그 우스꽝스러운 자폐증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하고

나면 승객의 기분은 한결 좋아진다.

  뉴욕에서 이탈리아 사람이 택시를 타는 경우, 택시 운전

자격증에서 데 쿠투르나토나 에지포지토, 페르쿠오코 같

은 이탈리아 계 성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자신의 국적을

밝혔다간 아주 난처한 일을 당할 염려가 있다. 승객이 이

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운전사는 이탈리아 어

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잡탕 말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승객이 자기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얼굴일 벌게 지도록 화를 낸다. 그럴 때에는 즉시

자기가 아는 이탈리아 어는 자기 고향의 사투리일 뿐이라

고 영어로 말해야 한다. 그러면 운전사는 이탈리아에서는

이제 영어가 국어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면서 성난 마음을

누그러뜨릴 것이다.

  뉴욕 택시 운전사들의 성을 보면, 대체로 유대 계 아

니면 비유대 계 둘 중의 하나이다. 유대 계 성을 가진 자들

은 반동적인 시온주의자들이고, 비유대 계 성을 가진 자들은

반 유대주의적인 반동주의자들이다. 둘 중의 어느 쪽이

든 그들은 단지 주장을 펼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숫제 군

부 쿠데타를 요구한다. 또 그들 중에는 더러 성이 중동계

같기도 하고 러시아 계 같기도 해서 유대 인인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운전사들을 만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그런 경우 말

썽이 생기는 것을 피하고 싶으면, <목적지를 바꾸고 싶군

요. 7번가와 14번가 모퉁이로 가지 말고 찰톤 가로 가시죠>

라고 말하면 된다. 그러면 운전사는 화를 벌컥 내면서 브레

이크를 밟고는 차에서 당장 내리라고 할 것이다. 뉴욕의

택시 운전사들은 번호가 붙은 거리는 알아도 이름이 붙은

거리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 파리의 택시 운전사들은 길을 도통 모른다. 생 쉴

피스 광장으로 가 달라고 하면 오데옹까지 가서 차를 세우

고는 더 이상은 길을 모르겠다며 승객을 내리게 한다. 그

러기 전에 벌써 승객은 <어, 아저씨, 이거 왠지......>하면

서 이따금씩 까다롭게 굴었던 대가로 운전사의 긴 푸념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에게 지도를 보라고 권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는 아무 대꾸도 안 하거나 참고 문헌에 관한

정보를 원했다면 소르본 대학의 고문서 전문가에게 문의

하지 그랬느냐고 엉뚱한 소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시

아계 운전사들은 특별한 부류를 이룬다. 그들은 지극히

친철한 태도를 보이면서 순환 도로를 세 바퀴쯤 돈 뒤에,

북역이든 동역이든 기차가 많기는 마찬가진데 굳이 북역

으로 갈 게 아니라 동역에 내려 주면 안 되겠느냐고 묻는다.

  내가 아는 한 뉴욕에서는 전화로 택시를 부르는 게 불가

능하다. 어떤 클럽에서 호출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와 달리 파리에서는 택시를 전화로 부를 수 있다. 다만 난

처한 일은 택시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스톡홀름에

서는 오로지 전화로만 택시를 부를 수 있다. 그곳 운전사

들은 거리에서 배회하는 자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

만 전화 번호를 알아내려면 돌아다니는 택시를 불러 세워

야 하는데, 좀 전에 말했듯이 운전사들이 믿어 주지 않는

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독일의 택시 운전사들은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가속 페달만 밟아 댄다. 그렇게 목적

지에 다다르면 승객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택시에서 내린

다. 그 때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이탈리아에 쉬러 오는

독일 운전사들이 추월 차선에서도 한사코 시속 60킬로미

터로만 달리는 이유를.

  포르쉐를 모는 프랑크푸르트의 택시 운전사와 찌그러진

폭스바겐을 탄 리우 데 자네이루의 택시 운전사가 경주를

벌인다면 누가 이길까? 당연히 리우의 운전사가 이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리우의 운전사는 신호

등에 빨간 불이 들어와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리우의

택시 운전사가 적색 신호를 무시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

유가 있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고 차를 세우면, 그 옆으로

택시처럼 차체가 찌그러진 또 다른 폭스바겐 한 대가 다가

들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내 녀석들이 차창 밖으로 손을

뻗어서 택시 승객의 손목 시계를 낚아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 택시 운전사를 알아보는 확실한 방

법이 하나 있다. 잔돈을 일절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그가

바로 택시 운전사이다.

                                       1988년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방법>>

  우리는 여러 가지 경우에 갖가지 이유로 거짓말을 한다.

선거운동 중에는 으레 거짓말이 남발된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종합하고 단순화하기 위해, 또는 일을 더욱 빨리

진행시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며, 때로는 악의를 품고 더

러는 확고한 신념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바로 이

신념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가장 비극적이다. 거짓

말을 하는 사람 처지에서 보면 실제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정보가 부족한 탓에 참이 아닌 것

을 말할 뿐이다). 어쨌거나 거짓말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

이며, 그렇게 거짓말을 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면, 이 주제

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

을, 모두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 그

리워질 때가 더러는 있지 아니한가?

  다행히도 지적인 작업에 종사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투명성과 솔직성을 향한 우리의 그 간절한 욕구를 충족시

키면서,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

다>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우리가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그 첫 번째 부류는 우리가 이탈리아

말로 <귀여운 거짓말>이라고 부르는 것을 작성하는 사람들

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짓말이란 의미론적으로 보면

하나의 아이러니가 되겠지만, 바로 모든 의약품의 포장에

동봉된 사용 설명서를 가리킨다(우리는 그것들이 일러주

는 바가 얼마나 참된 것인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말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의약품 사용 설명서 작성자들은 무엇인가를 말해야 할

때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하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로지 자기가 아는 것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어려서부터 터득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런 사람

들이 작성한 설명서이기에, <투약을 금해야 할 환자>를 열

거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문구를 흔히 접하게 된다. <

이 약의 성분 중 어느 하나에 과민증이 있는 환자.> 달리

말해서, 만일 이 약을 먹자마자 바닥에 쓰러져 입에 게거

품을 물고 뇌전도의 오르내림이 잦아드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이 약의 투여를 중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말해야 할 것을 다 말하지 않는 것은 때로 거짓

말의 근원이 된다. 그런 점을 잘 아는 터라 사용 설명서 작

성자들은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싶어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통계학적인 연구를 통해 입증

된 바에 따르면, 이 약은 다음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목마름증, 두통, 구토, 현기증, 관절증, 설사, 결

막염, 홍반, 경련성 대장염, 신장통, 알츠하이머 병, 황열,

급성 복막염, 실어증, 백내장, 대상 포진, 노년의 여드름,

남성 환자의 생리, 크라우스 엘더만 증후군, 주그마, 히

스테론 프로테론.>

  이제 소프트웨어의 도움말 작성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특히 사용자가 초심자이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사용하는 경우, 해당 제품의 제작자가 제공하는 사용 안내

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

선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모를 그것을 찾아 책상 위로 옮

겨다 줄 누비아 출신의 노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그

것이 이미 책상 위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A115>쪽이 하

필 <W18> 쪽 다음에 나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사태에 직

면하기가 십상이다. 프로그램 제작자와 상관없는 출판사

들에서 펴내어 아주 비싼 값으로 파는 매뉴얼의 경우도 도

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책들은 독자를 모두 바

보로 여기고 만든 듯, <시작> 버튼을 누르면 예전의 만년

필로는 만들 수 없었던 예쁜 이미지들이 화면에 가득 펼쳐

질 것임을 설명하느라고 무려 10쪽을 할애한 것이거나 쪽

수가 800에 달하고 색인에는 온갖 잡다한 것을 자세하게

나열해 놓았음에도 유독 당신이 찾는 항목만 빠져 있는 그

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니 결국 믿고 의지할 거라곤 도움말, 즉 대게 물음

표 모양으로 되어 있는 아이콘을 마우스로 누를 때 나타나

는 화면밖에 없다. 예컨대,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

램에 <개체 삽입> 기능이 있다는 것을 해당 메뉴를 보고

알았다고 하자. 당신은 개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적절한 곳에 삽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

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게 없다. 도움말을 작동

시키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타난다. <문서에 개체를 삽

입하는 기능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도움말 작성자가 모

든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이 그런 의혹을 품는다면 나는 이렇게 그 도움말 작성

자를 역성들 것이다. 그는 진실을 말했다. 그 기능은 정말

로 설명된 바를 행한다라고. 다만 문제는 당신이 받은 그

대답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대략적으로 보아

당신의 질문에서 물음표만 제거한 꼴이라는 점에 있다.

  도움말의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연결>이라는 기능이 무

엇인지 궁금해서 도움말을 참조하면 이런 대답이 나온다.

<개체를 연결시켜 주는 기능입니다. <<접속>> 참조> <접

속>기능이란 또 무엇인가 하고 찾아보면, <연결 문서에

접속하는 기능입니다>라는 설명을 만나게 된다. <에러

125> 같은 유형의 긴급성을 띤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도 도

움말은 대단히 유용하다. 도움말은 당신에게 이렇게 일러

줄 것이다. 당신은 <에러125>를 범했으며, 작업을 계속하

기 전에 그 에러를 제거해야 한다라고.

  그런 도움말 작성자를 양성하자면 아주 어릴 적부터 특

수한 학교에서 준비 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예컨대 이

런 식의 명제를 꾸미면서 논리 훈련을 하는 학교에서 말이

다. <모든 독신자는 독신자이다>, 또는 <에파미메니데스는

뜀박질을 하거나 뜀박질을 하지 않는다>, <모든 동물은 동

물이다>,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

<코르불리데스가 배중률을 진술한다면, 코르불리데스는 배중률을

진술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면,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등등.

                                      1996년


<<수입이 많은 직업을 선택하는 방법>>

  세상에는 매우 인기가 높고 수입이 아주 많은 직업들이

있다. 그런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직업에 종

사하기 위해 준비할 것이 무언지를 알아야 한다.

  고속 도로 진입로를 가리키는 표지판들을 도시 지역에

설치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그

표지판들은 도심과 고속 도로의 차량 정체를 해소하는 것

을 그 기능으로 삼고 있다. 그 표지판들을 따라갔다가 녹

초가 된 채 변두리 공장 지대의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막다

른 길에 들어서고 보면, 그 점을 이내 깨닫게 된다.

  사실 표지판을 세워야 할 자리에 제대로 세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둔한 사람이라면 표지판을 이런 곳에

세우려 할지도 모른다. 즉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을 내리

기 힘든 여러 갈래로 길이 갈라지는 분기점 같은 곳, 따라

서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길을 잃기 딱 알맞은 지점

말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표지판 세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면 안 된다. 표

지판은 가야 할 길이 눈에 빤히 보이는 곳, 모든 운전자들

이 직감으로 제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곳에 세워야 한다. 운

전자를 반대 방향으로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일을 제

대로 해내려면 도시 계획, 심리학, 게임 이론 따위에 상당

한 조예가 있어야 한다.

  매우 유망한 직업이 또 있다. 가정용 전기 제품이나 전

자 제품에 첨부되는 사용 설명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이

설명서의 목적은 제품의 설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데에 있

다. 컴퓨터를 살 때 따라오는 두꺼운 매뉴얼 같은 것이어

서는 곤란하다. 그런 매뉴얼도 제품의 설치를 방해하는 기

능을 어느 정도 수행하긴 하지만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드는

것이 흠이다. 이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은 약품의 사용 설명서이다.

  약품은 우선 학술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 특징이 있

다. 이런 이름은 약의 성격을 분명하게 알려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약을 사려는 사람들을 난처

하게 만들기도 한다. 예컨대, <프로스타틴-'전립선'이란 뜻>,

<메노파우진-'폐경'이란 뜻>, <피아톨락스-'사면발'이란 뜻>의

약이 그러하다.

  약품의 사용 설명서는 그와 달리 우리의 목숨이 달려 있

는 경고문을 난해한 문장으로 작성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부작용 없음. 다만 어떤 성분에 대해서는 예기치 않은
치명적인 반응이 나타날 수 있음!>

  한편 가전 제품의 사용 설명서는 하나 마나 한 설명을 장

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너무 뻔한 이야기

다 싶어 건너뛰며 읽다 보면 진짜 필요한 정보를 놓치기가

십상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PZ40을 설치하려면 우선 상자를 뜯어 제품을 꺼내야
합니다. 상자를 열어야만 PZ40을 꺼낼 수 있습니다. 상자
는 뚜껑의 두 날개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젖히면 열립니다
(아래 그림 참조). 개봉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뚜껑이 위를
향하도록 하여 상자를 수직 상태로 두십시오. 뚜껑이 아래
를 향하게 되면 상자를 개봉하는 과정에서 PZ40이 바닥으
로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상자의 위쪽은 <위>라는 표시가
나타나 있는 부분입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 뚜껑이 열리지
않을 때는 다시 한번 시도하십시오. 상자가 열리면 안에
있는 알루미늄 뚜껑을 제거하기 전에 빨간 띠를 뜯어내십
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용기가 파열됩니다. 주의! PZ40
을 꺼낸 뒤에는 상자를 버리셔도 됩니다.>

  괜찮은 직업을 또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여름에 시사

주간지나 교양 주간지에 실리는 심리 테스트를 입안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의 테스트를 만드

는 것이다.

  1.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고르시겠습니까?

    1)사리염(황산마그네슘) 한잔 2)오래 묵은 코냑 한잔

  2. 다음 두 사람 중에서 누구와 휴가를 보내고 싶으십니까?

    1)나병에 걸린 팔순 노인  2)최진실

  3.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1)살을 따끔거리게 하는 불개미로 온몸이 뒤덮이는 것

    2)전지현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

  위의 질문에 대해서 모두 1)번을 고르셨다면, 당신은 기
발한 착상을 잘 하고 발명의 재주가 있으며 독창적인 사람
입니다. 하지만, 성적으로는 약간의 불감증이 있는 것 같군요.

  위의 질문에 대해서 모두 2)번을 고르셨다면, 당신은 악
당입니다.


  어떤 일간지의 건강 난에서 선탠에 관한 테스트를 본 적

이 있다. 그 테스트는 모든 질문에 대해서 A, B, C 세 가지

의 대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A번에 나온 대답들

이 걸작이다.


  1. 햇볕에 노출되면 피부가 어느 정도로 빨개집니까?

    A. 심하게

  2.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일광욕을 하십니까?

    A. 햇볕에 노출될 때마다

  3. 홍반이 생긴 지 48시간이 지나면 피부가 어떤 색깔이

    됩니까?

    A. 아주 빨갛다

  진단. 만일 여러 차례 A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의 피부는
극도로 예민하여 일광에 의한 홍반이 생길 가능성이 많습
니다.


  이런 식의 테스트도 생각해 봄직하다.


1. 당신은여러 번 창 밖으로 떨어진 적이 있습니까?

2. 만일 그렇다면, 그 때문에 여러 차례 골절을 경험했습

  니까?

3. 골절의 결과로 매번 영구적인 장애가 생겼습니까?

  위 질문둘에 대해서 만일 당신이 두 번 이상 <예>라고
답했다면, 당신은 바보이거나 청각에 장애가 있어서 질문
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아래쪽에서 장난치기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어서 내려오라고 하거든, 창 밖을
내다보지 않도록 하십시오.

                                     1991년


<<TV 사회자가 되는 방법>>

  스발바르 군도의 학술원에서 몇 해 동안 봉가족을

연구하라고 나를 파견했을 때, 나는 아주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봉가족은 <미지의 땅>과 <행복한 군도>

사이에서 하나의 문명을 활짝 꽃피우고 있는 부족이다.

봉가인들은 우리가 가진 것을 거의 비슷하게 가지고 있

다. 다만 그들은 정보의 철저함에 유달리 집착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전제'와 '암시'와 '함축'의

기법을 모른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말을 하며, 그러기 위해

서 낱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가 말을 하고 어

떤 낱말을 사용하겠다고 미리 상대방에게 알려 줄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데 봉가인들은 다른 봉가인에게 말을

걸 때,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연다.

  "내 얘기 잘 들어요. 나는 이제 말을 할 것이고 낱말들

   을 사용할 거예요"

  우리는 집을 짓고 나면 방문객에게 동 이름과 번지와 건

물의 이름과 호수를 일러준다. 그런데 봉가인들은 우선 집집

마다 <집>이라고 써 붙이고 별도의 표시판을 이용하

여 벽돌과 초인종을 지시하며 문에는 <문>이라고 써놓는다.

봉가인의 집을 찾아가 초인종을 누르면, 그는 <자, 제가 문

을 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문을 열고 인사를 한다.

봉가인이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해서 가보면 그는 나에게

의자를 권하면서 이렇게 일러준다.

  "이건 식탁이고요, 이건 의자입니다."

 그런 다음에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인다.

  "이제 가정부를 소개하겠습니다. 로지나입니다. 로지나

  는 당신이 드시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그

  음식을 식탁에 가져다 줄 겁니다."

  식당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극장에 가서 봉가인들을 관찰해 보면 아주 재미있다.

객석의 불이 꺼지며 배우 하나가 무대에 나타나 이렇게 말

한다.

  "이제 막이 오릅니다"

  막이 오르면 [햄릿]이나 [상상환자(희극임!)] 등을 공연하기

위해 배우들이 무대에 등장한다. 먼저 배우들의 진짜 이름

과 그들이 맡은 인물의 이름이 하나하나 소개된다.

  연극이 시작된다. 배우들은 자기의 대사가 끝나면 이렇게

알린다.

  "내 대사가 끝났습니다. 잠깐 휴지가 있겠습니다"

  몇 초가 흐른 뒤에 다른 배우의 대사가 이어진다. 1막이

끝나면 배우 하나가 무대 앞에 나와 알린다.

  "이제 막간의 휴식이 이어지겠습니다."

  그들의 쇼 공연도 인상적이었다. 우리 사회의 쇼처럼 그

들의 쇼도 촌극과 노래와 2인 개그와 춤 따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는 두 개그맨이 나와 사람들을 웃기고 그 중의 하나가 해

학과 풍자가 섞인 짤막한 노래를 부르고 나면,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등장하여 춤을 선사하고, 그것이 끝나면 배우

들의 촌극이 이어진다. 그런데 봉가인들의 쇼에서는 배우

들이 먼저

  "곧 두 개그맨이 나와 여러분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겠습

   니다."

라는 말이 나오고, 노래가 끝나면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다음은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나와서 춤을 보여 드리겠

   습니다."

라고 소리친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게 또 한 가지 있다. 봉가인들의 극장

에서는 막간에 광고판들이 막 위에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의 극장에서는 배우 하

나가 막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린 뒤에 어김없이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이제 광고 시간입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봉가인들이 정보의 정확성에 그토록

집착하는 걸까 하고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다. 혹시 그들은

너무 고지식하고 아둔한게 아닐까? 그래서 상대방이

  "저 인사드릴게요"

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가 자기들에게 인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 생각에도 어느 정

도 일리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이

유는 다른 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가인들은 공연

을 숭배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을 공연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암시적인 것, 함축적인

것까지 다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인 것이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들 덕분에 박수 갈채의 역사

를 재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예전에 봉가인들은 두 가지

동기에서 박수를 쳤다. 멋진 공연을 보고 만족해서이거

나 뛰어난 인물에게 칭찬과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였

다. 가장 우렁찬 박수를 받는 사람이 사람들의 사랑과 존

경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어떤 극장 주인

들은 자기네 연극이 훌륭한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관객 사이에 돈으로 매수한 하수인들을 배치하여 박수를

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장면에서도 박수를 치게 했다.

  봉가인들이 텔레비젼 쇼를 처음으로 방영하던 시절에,

프로듀서들은 스탭의 친척 두세 사람을 스튜디오에 초대

해 놓고, 시청자들이 볼 수 없는 불빛 신호를 보내 그들로

하여금 이러저러한 순간에 박수를 치게 했다. 봉가인들은

그런 비결을 금새 터득한 셈이었다. 우리 사회 같으면 그

런 박수 갈채는 금방 들통이 나서 신용이 완전히 땅에 떨

어졌을 텐데, 봉가인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시청

자들 역시 박수를 치고 싶어했고 자원자들이 떼를 지어 텔

레비젼 스튜디오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방청석에 앉아 손

뼉을 치는 대가로 돈을 내라 해도 기꺼이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부의 극성스러운 시청자들은 박수 부대를 위한

특별 강의를 듣기까지 했다. 이렇게 박수에 얽힌 사연이

모두에게 알려지자, 이제는 사회자가 중요한 순간마다 직

접 나서서,

  "여러분, 아주 힘찬 박수를 보내 주십시오"

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방청객

들은 사회자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박수를 치기

에 이르렀다. 사회자가 초대 손님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

고, 질문을 받은 사람이

  "저는 시립 동물 수용소에서 가스실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열렬한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때로는 우리 사회에서 페트롤리니같은 사람이 무대에 나타났

을 때 그러듯이 사회자가, '안녕하십니까~'라고 말

하기 위해 '안녕~'하고 입을 벌리자마자 박수 갈채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또 사회자가

  "목요일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한자리

  에 모였습니다"

라고 덧붙이면 방청객들은 박수 치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는

지 자지러지게 웃어대기까지 했다.

  이렇듯 박수는 봉가인들의 TV방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심지어 광고에서조차 모델이 '살 뺴는 알

약 피프를 사세요'라고 소리치면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

져 나왔다. 시청자들은 광고를 찍는 스튜디오에 박수 칠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수는 필요

했다. 박수가 없으면 그 광고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

고, 그렇게 되면 시청자들이 채널을 바꿔 버릴 염려가 있

기 때문이었다.

  봉가 사람들은 텔레비젼이 실제의 삶을 가식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를 원한다. 연기를 하는 배우가 아니라

시청자들과 닮은 방청객들이 보내는 박수는 텔레비젼이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임을 말해 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이즈음에 봉가인들은 오로지 배우들만 박수를 치는 프로

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그 프로그램의 제목은 [TV진실]

이 될 거라고 한다.

  이제 봉가인들은 현실에 견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는 느낌을 갖기 위해 TV 시청 시간 이외에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박수를 친다. 그들은 장례식에서도 박수를 치

는데, 그것은 기뻐서도 아니고 망인에게 칭찬과 존경의 뜻

을 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다른 그림자들 속에서

스스로를 그림자로 느끼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TV 화

면에서 본 이미지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실제적인 존재

로 느끼기 위해서이다.

  어느 날 내가 한 봉가인의 집에 있을 때였다. 그 집의

친척 하나가 들어서면서 말했다.

  "할머니가 방금 트럭에 치였어요"

  그러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봉가인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업을 것 같

다. 오히려 어떤 봉가인은 자기들이 세계를 정복하게 되

리라고 내게 장담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결코 헛된 망상이

아니라 현실성이 있는 계획이었다. 나는 조국에 돌아오자

마자 그 점을 꺠달았다. 귀국한 날 저녁에 TV에서 어떤 쇼

프로그램을 보았다. 사회자는 자기 프로그램의 진행을 도

와 줄 여자들을 소개하고 나서, 자기가 개그를 하나 들려

주겠다고 했다. 개그가 끝나자 그는 이렇게 소리쳤다.

  "자, 이제 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또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한 저명 인사가 심각한 정치 문

제를 놓고 다른 저명 인사와 토론을 벌이다 말고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잠시 광고 방송이 있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회자들은 방청객을 소개하기도 했

다. 자기를 찍고 있는 카메라맨을 소개하는 사회자도 있었

다. 그때마다 방청석에서는 요란한 박수 갈채가 일었다.

  아연한 나는 놀란 마음을 가누고, 담백한 요리로 잘 알

려진 한 프랑스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가기고 했다. 웨이

터가 내 앞에 상추 잎 세 장을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이것은 롬바르디아 산 상추로 만든 샐러드입니다. 피

   에몬테 산 향초를 아주 잘게 썰어서 뿌리고 바닷소금으로

   간을 했으며 발삼 향이 나는 가정용 식초에 절여서 움브리

   아 산 올리브로 짠 햇기름을 친 것이지요"

                                  1987년


<<'빨간 모자'라는 동화를 다시 쓰는 방법>>

  <정치적으로 반 듯한politically correct>태도가 한 시대를 풍

미함에 따라 전래 동화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쓰려는 사

람들이 나타났다. 동화에는 어떠한 유형의 약자를 빗댄 내

용이 들어가도 안 되고, 어떠한 소수 집단을 모욕하는 표

현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들의 주

장에 따르면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난쟁이는 이제

부터 <비표준적인 신장의 성인>으로 불러야 한다.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뜻에서 나는 재미 삼아 <빨간 모

자>라는 동화를 재해석한 다음, 모든 인물들의 종교적/정치적/

성적 선택을 아주 철저하게 존중하면서 그것을 다시 썼다.

이야기가 <정치적으로 반 듯한> 분위기에서 전개되도록

공간적 배경은 미국으로 설정하였다. 미국 중에서도 숲이 무성

하여 야생 동물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내가 다시 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행복하게도 아직 청소년기에 도달하지 않은 빨간 모자

라는 소녀가 어느 날 아침 위험을 무릅쓰고 숲속으로 들어

간다. 소녀는 <자연 보호 협회>의 회원이라서 버섯도 딸기

도 따지 않는다. 소녀는 또 <동물의 세계와 완전하고 대등

하게 교류하기 위한 모임>의 회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저 늑대와 같은 야생 동물들을 어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

각한다. 다행히 소녀는 늑대 한 마리를 만난다. 그 늑대는

<동성 연애를 하는 동물들의 모임>에 가입해 있다. 그 단

체는 동물들과 인류 구성원들 사이의 자유로운 성관계를 권

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늑대와 소녀는 근처의 모텔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늑

대는 그곳에서 가서 화려한 잠옷을 입고 소녀를 기다린다.

그런데 늑대와 소녀가 만나는 광경을 나무 그늘에 숨어 지

켜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소녀의 할머니이다. 할머니가

가입한 단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할머니가

소아 성애와 근친 상간, 식인 풍습을 지지하고 채식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점만 밝히고자 한다. 한시라도 빨리

어린 손녀와 만나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는 모텔로 가서 늑

대를 잡아먹고 늑대로 변장한다. 할머니는 <동물 분장자 협회>

의 회원이기도 하다.

  빨간 모자는 달뜬 마음으로 모텔에 다다라서 늑대가 기

다리고 있는 방으로 간다. 그러나 소녀가 맞닥뜨린 것은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즉시 소녀를 추행한 다음 잡아먹는

다. 할머니는 씹지 않고 통째로 삼킨다. 앞에서 깜박 잊고

이야기를 못했는데, 사실 할머니는 위생과 식이 요법을 중

요시하는 어떤 종교 단체에 속해 있다. 그 단체는 동물의

고기를 씹는 것은 정결하지 못한 행동이자 죄악이라고 주

장하면서 고기를 그냥 삼키라고 명령한다. 그런 것을 명령

한다는 게 잘 믿기지는 않지만, 음부 폐쇄를 명령하거나

수혈을 금지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것 같다.

  빨간 모자는 이제 할머니의 내장 속에 들어 있다. 그때

한 사냥꾼이 나타난다. 그는 여느 사냥꾼과는 달리 동물을

죽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는 비수렵인이다. 그는

어떤 과격한 환경 운동 단체의 회원이다. 그 단체는 동물

의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요구한다. 그는 자기가

맡은 역할 때문에 <전국 라이플총 협회>에도 가입해 있다.

그 단체는 모든 시민의 무기 소지를 허가하는 헌법의 한

수정 조항에 근거하여 결성되었다. 그 비수렵인은 할머니

가 늑대를 잡아먹음으로써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

음을 확인하고 총을 쏘아 죽인다. 그런 다음 할머니의 배

를 가른다(그는 장기 기증 촉진 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빨간 모자는 할머니 뱃속에서 무

사히 빠져 나온다. 늑대도 물론 빠져 나오겠지만, 내 이야

기에서 늑대는 이제 등장하지 않는다.

  빨간 모자의 엄마는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하

며 아이를 껴안고 입을 맞춘다. 엄마는 그 슬픈 사건을 잊

게 하려고 애쓰면서 아이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던 차에 예의 그 비수렵인이 사냥 반대의

기치를 내건 아주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된

다. 어린 딸을 둔 어머니들 중에는 자기 아이를 텔레비젼

사회자에게 데려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텔레비젼

사회자와 자기 딸이 다정한 친구 사이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그런 관계는 억대 출연 계약의 전조가 된다). 딸아이

를 유명한 사회자에게 소개시킬 때 어머니들의 마음이 얼

마나 많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비수렵인은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도

덕적인 기질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서 빨간 모자와 친구가

되는 것을 거절한다. 사실 그는 숲 속의 로빈과 친하게 지

내는 동성 연애자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딸은 자기들이 무시당한 것에 너무나 화가 나

서 앙갚음을 하기로 한다. 그녀들은 비수렵인이 할머니를

죽일 때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경찰에

그를 고발한다. 그녀들이 제시한 그의 범죄 혐의는 흡연,

악습 교사, 환경 오염, 발암 물질 유포, 살인 미수 등이다.

  미국의 그 주에서는 사형 제도가 아직 시행되고 있다.

비수렵인은 전기의자 처형을 선고받는다. 교황은 형의 감

면을 요청하는 감동적인 서한을 보낸다. 그러나 이탈리아

의 우체국을 통해 보낸 그 서한은 몇 달 늦게 미국에 도착

한다. 게다가 전기 쇼크는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 처형에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결국 비수

렵인은 죽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주 행복하게 살았다.

                                  1996년


<<동물에 관해 말하는 방법>>

  세상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얼마

전 뉴욕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센트럴 파크의 동물원. 북극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연

못 근처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

에게 연못 속에 뛰어 들어가 곰들 주위로 헤엄칠 수 있으

면 어디 한번 해보라고 말한다. 그 아이는 친구들이 옷을

벗기만 하고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자 벗어 놓은

옷을 감추어 버린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물 속에 뛰어

든다. 그 서슬에 평온한 모습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커

다란 곰 한 마리가 화들짝 놀란다. 곰은 제 주위에서 아이

들이 첨벙거리며 성가시게 굴자 화가 나서 앞발 하나를 뻗

어 아이들을 후려친다. 그러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진 두

아이를 잡아 여기저기에 살조각을 흘리며 어적어적 씹어

먹는다. 경찰이 달려오고 시장까지 현장에 나타난다. 그

곰을 죽이느냐 마느냐를 놓고 논란이 벌어진다. 곰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기

사들이 신문에 등장한다. 문제의 아이들은 공교롭게도 모

두 라틴 아메리카 계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푸에르토리

코 출신의 유색인들로서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인 모양이다. 게다가 가난한 동네에서 뗴를 지어 몰

려다니는 악동들이 흔히 그렇듯이, 무모한 행동을 다반사

로 하는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그 아이들의 행동을 놓고 여러 가지해석이 나온다. 한

결같이 아이들을 엄격하게 비판하는 내용들이다. 특히 <자

연 도태> 운운하는 냉소적인 반응이 지배적이다. 곰 옆에

서 헤엄을 칠 만큼 어리석은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

동을 해서 죽음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

면 다섯 살만 되어도 곰의 아가리로 뛰어드는 그런 무모한

짓은 안 했을 거라는 얘기다.

  이 사건을 사회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해석은 이러하다.

가난하고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극빈층은 경솔하고 충

동적이라는 점에서도 사회의 최하층이라는 것이다. 이 대

목에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

다는데, 도대체 무슨 교육을 말하는 것일까? 아무리 가난

한 아이라도 곰이 사람을 잡아먹고 사냥꾼들이 곰을 죽인

다는 것쯤은 텔레비젼에서도 보고 학교 수업 시간에 책에

서도 읽지 않았을까?

  내 생각엔 오히려 아이들이 텔레비젼을 보고 학교를 다

났기 때문에 물 속에 뛰어든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바로 그 학교와 대중 매체 때문에 희생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반영된 그릇된 학교

교육과 방송 프로그램 때문에 말이다.

  인간은 언제나 동물에게 무자비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동물을 다르게 대하기 시작

했다. 모든 동물을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여전히 태

연 자약하게 동물의 고기를 먹고 있으니까 말이다), 적어

도 동물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는 않게 되었다. 대중 매

체와 학교와 공공 기관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상대로 저지

른 많은 잘못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변명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럴 때 동물의 선량함을 떠벌리는 것

은 심리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많은 도움이 된다. 그래

서 제3세계 어린이들이 죽어 가는 것은 못 본 척하면서도

선진국의 아이들에게는 잠자리와 토끼는 물론이고 고래와

악어와 뱀까지 존중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 교육행위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교육을 위해 선택한 방법에 문제가 있다. 동물의 생

존권을 존중한답시고 동물을 인격화하고 아이들의 친구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문제라는 얘기다. 사람들은 어떤

동물이 본능에 따라서 잔인하게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지

라도 이 지구상에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

는다. 그러기 보다는 그런 동물을 착하고 상냥하고 재미있

고 너그럽고 영리하고 침착한 존재로 만들어 존중을 받게

한다.

  그러나 나그네쥐는 경솔하고 고양이는 게으르며, 여름

날의 개는 침을 많이 흘리고 새끼 돼지는 냄새가 고약하

며, 말은 흥분을 잘 하고 자벌레나방은 아둔하며, 달팽이

는 끈적거리고 살모사는 독이 많으며, 개미는 상상력이 빈

곤하고 밤꾀꼬리는 음악적으로 창의력이 부족하다. 그럼

에도 우리는 그런 동물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사랑하는게 정히 불가능하다면 존중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옛날의 전설들은 성미가 고약한 커다란 늑

대를 지나치게 많이 등장시켰는데, 요즈음 이야기들은 새

끼 늑대를 지나치게 착한 존재로 만들어서 등장시킨다. 우

리가 고래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고래가 착하기 때문이 아

니다. 고래도 역시 자연 환경에 속해 있고 생태계의 균형

에 나름대로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에

대한 교육은 '말하는 돌고래'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

간 늑대', 그리고 무수히 많은 '테디 베어'의 도움을 받아 이루

어진다.

  광고와 애니메이션과 만화에는 마음씨 곱고 법을 잘 지

키고 상냥하고 남을 잘 돌봐 주는 곰들이 자주 나온다. 곰

은 크고 뚱뚱하고 둔하고 어수룩하기 때문에 살 권리가 있

다고 말하면 곰 자신이 모욕감을 느낄 지경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나는 센트럴 파크의 불쌍한 어린이

들은 교육을 덜 받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받아서 죽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 아이들은 우리의 떳떳하지 못한 마음

에서 비롯한 그릇된 교육 때문에 희생된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못된 존재인지를 잊게 하기 위해서 곰이 착한 동물

이라고 가르친 결과이다. 그 아이들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

이고 곰은 어떤 존재인지를 정직하게 일러주었더라면 그

런 일은 없었으리라.

                                    1987년

<<미래로 되돌아 가는 방법>>

  과학자들은 시간 속을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 누차에 걸쳐 주장한 바 있다. 극복할 수 없는

기술적 어려움이 아직 장애가 되고 있긴 하지

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분야에 문외한이라서 그런 주장에 대해 가타부타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비록 전문 지식은 없

어도 이러 저러한 책들에서 읽은 것이 있어서 그

랬는지 그런 주장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예를 들어

한스 라이헨바흐는 1956년에 [시간의 방향]이라는

훌륭한 저서를 통해 아원자수준에서 벡터 시간은 방

향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연구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물론 소립자가 시간 속에서 뒤로 또는 앞으

로 움직일 수 있다 해서 우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

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소립자가 그렇게 움

직일 수 있는게 확실하다면 우리에게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시간 속을 앞으로 또는 뒤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서기 3천 년에 지구가

어떤 모습일까를 보러 가는 것(그때쯤이면 지구는 아주 처

참한 상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허버트 조지 웰즈의

공상 과학 소설을 생각해 보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시간을 거슬러 여행한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과거

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우리의 죽음을 늦출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할 때 우리의 나

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가능성은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

다. 첫째는 떠날 때의 우리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나이

도 달라지지 않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설령 시간을 거

슬러 올라간다 해도 육체적인 노화를 피할 수 없다. 게다

가 예전의 우리 자신을 맞닥뜨릴 가능성도 있는데, 그건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우

리가 젊어지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우선 어디까지 젊어

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젊어지는 게 좋

다고 해도 증조부의 DNA 속에 있는 유전자가 되면 곤란

하기 때문이다. 또 예컨대 내가 194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고 하면 나는 소년 시절의 나를 되찾게 될 것이다.그런

데 내 정신도 그 시절의 정신이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의

삶에서 내가 얻은 경험을 활용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

니라 그 당시에는 시간 여행이 개발되지 않았던터라 나는

더 이상 미래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될 것이다(어쩌면 나는

아직 철이 없는 아이라서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내가 떠나온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안 할지도 모른다). 결

국 둘 중의 어느 경우이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는 많

은 문제가 따른다.

  우리가 시간 속을 여행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쾌도난마 식으로 해결하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로 여행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주 먼 미래에는 과거로

여행하는 것이 가능해질까? 역시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만일 미래에 어떤 사람이 시간을 거슬러

여행할 수 있다면(아니 여행할 수 있었다면, 아니 여행할

수 있을 거라면, 아니 여행할 수 있었을 거라면-젠장,

동사의 시제마저도 뒤죽박죽이 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아직 여기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을 거슬러 온 여행자들을 우리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물론 이 추론에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우선 이런 반론

이 제기될 수 있다. 서기 2만 년에 어떤 사람이 시간을 거

슬러 여행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가 단지 1천 년만 거슬러

올라간다고하자. 그러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람들

은 서기 1만 9천 년을 사는 사람들뿐일 것이다.

  또 이런 가설을 세워 볼 수도 있다. 미래인들은 아주 오

래 전부터 과거로 여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사실 그들

은 이미 네안데르탈 인 시대부터 우리 속에 있어 왔다. 하

지만 미래 당국의 법령이 금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들이 누구라는 것(아니, 누가 될 거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우리들 속에 있다. 단지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어떤 음모를 꾀하면서 신비스런 명분을 찾고 있는 정치

가나 언론인들에게 그런 가정이 얼마나 많은 용기를 북돋

워 줄지 상상해 보라. 우리의 모든 불행은 스스로를 미래

에서 왔다고 여기는 그 은밀한 방문자들 때문에 생겨난다.

그런데 만일 부정과 비리를 일삼는 정치인들이 정말 그 방

문자들의 일원이라면, 그들은 이미 미래의 신문에서 부정

부패의 귀결이 감옥행이라는 것을 읽었어도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혹시 그들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온 것이

아닐까? 미래를 점친다고 큰소리치는 여론 조사 전문가들

은 어떤가? 빗나간 예측을 하기 일수인 그들을 미래에서

온 방문자로 불 수 있을까? 미래에서 온 그 방문자들이 돌

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들은 대단히 불쾌한(우

리에게가 아니라 그들에게) 미래(이것이 그들에겐 현재가

될 텐데)를 맞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만 활동해야 마땅하리라.

  미래에서 온 방문자라는 가설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이

런 주장도 가능하다. 그들은 언제가 우리 속에 있었다. 당

대에 지력이 가장 뛰어났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돌도

끼의 발명자, 소크라테스, 코페르니쿠스, 파스퇴르, 아인슈

타인 등등. 물론 그들은 우리보다 똑똑했다. 지구가 태양

의 둘레를 돈다라든가 E=MC²같은 것을 그들은 이미 미

래의 학교에서 어릴 때 배우고 왔기 때문이다. 멋진 가설

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천재에 대한 시샘이 조금은 누그

러질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천재들이 모

두 미래에서 오는 거라면 그들은 과거 속에 있는 셈인데,

만일 이 과거의 사람들이 모두 바보라서 아무도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을 전수해 줄 수 없다면, 그들은 도대

체 어떻게 천재가 될까?

                                   1995년


<<죽음에 담담하게 대비하는 방법>>

  나의 이런 주장이 나만의 독특한 생각인지 아닌지 확실

치는 않지만, 죽음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하는 것은 인간

의 주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

게는 그 문제가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無)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하는 식으로 제기된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러 통계가 입증하듯이, 죽음은 결

코 비신앙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신앙인들 역시 죽

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죽기 전의 삶이 무척 마음에 들기 때

문에 그것을 당장 놓아 버리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들은 천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간

절하지만 가능하면 나중에 가기를 바란다.

  <죽기 위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제기

할 수 있으려면 우선 인간은 모두 죽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말하기는 쉽다.

죽는 게 내가 아니고 소크라테스라면! 그러나 바로 나 자

신의 문제가 되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지금은 내가 여

기에 있지만 얼마 후에는 더 이상 여기에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아주 견디기 어려

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최근에 크리톤이라는 걱정 많은 제자 하나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죽음에 제대로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모든 사람들이 다 바보라는 것을 확신

   하는 것이지."

  크리톤이 얼떨떨해 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가 말귀를

알아듣도록 이렇게 설명했다.

  "생각해 보게. 만일 자네가 이승을 떠나려는 순간에, 젊

  고 매력적인 남녀들이 나이트클럽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즐기고, 지혜로운 과학자들이 우주의 마지막 신비를 밝혀 내

  며, 청렴 결백한 정치가들은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

  신하고, 신문과 텔레비젼은 유익한 정보 제공을 유일한 목적

  으로 삼고 있으며, 건전한 기업가들은 마셔도 좋을 만큼 맑은

  시냇물과 푸르른 수풀이 우거진 산과 오존층의 보호를 받는 청

  명한 하늘과 단비를 뿌려 주는 솜털 구름으로 이루어진 자연

   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

  다고 생각한다면, 자네가 아무리 신앙인이라 해도 어떻게

  미련없이 죽음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겠는가? 자네가 이승을 떠

  나려는 참에, 그렇게 멋진 일들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정

   말 견딜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게. 자네가 이 눈물

   의 골짜기를 곧 떠나게 되리라고 느낄 때, 인간 50억이 모

    여 사는 이 세상이 온통 바보들로 가득 차 있다고 확신하

    는 경우를 말일세. 즉,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는 연놈들도

    바보고, 우주의 신비를 풀었다고 믿는 과학자들도 바보고,

    우리 사회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 만병 통치약이 있다고 주

    장하는 정치가들도 바보고, 우리의 신문들을 쓸모 없는 기

     사와 하찮은 가십으로 가득 채우는 기자들도 바보고, 지구

     를 파괴하는 탐욕스런 기업가들도 다 바보라고 말일세. 그

     렇다면 이승을 떠나는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자

     네는 매우 만족해서 마음놓고 이 바보들의 골짜기를 떠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자 크리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선생님, 그런 생각은 언제쯤 하는 게 좋을까요?"

  "너무 일찍 하면 안 되네. 스무 살이나 서른 살쯤에 세

   상 놈들이 모두 바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바보나 하

   는 짓 일세. 그래서는 절대로 지혜에 도달할 수가 없네. 서

   두르면 안 되지. 우선은 남들이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그러다가 마흔 살쯤에 미심쩍다는 생각을 처음

   으로 품고, 쉰에서 예순 살 사이에 이제까지의 생각을 수

    정한 다음, 백살에 이으러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 확신에 도달하면 될 걸세.

    다만, 명심할 것이 있네. 우리 주위에 있는 50억의 사람

    들이 모두 바보라는 확신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

    심하고 사려 깊은 노력의 결과라는 것일게. 귀고리 코걸이

    달고 찢어진 청바지 입고 껄렁대는 날라리들은 꿈도 못 꿀

    일이지. 재능도 있어야 하고 땀도 흘려야 하는 게야. 모든

    걸 한꺼번에 이루려고 하면 안되네. 조급하게 둘지 말고

    천천히 나아가야 해. 시간에 딱 맞추어 담담하게 죽을 수

    있게 말일세.하지만 죽기 전날까지는 이 세상에 바보가

    아닌 존재,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재가 하나쯤은

   있다고 생각해야 하네. 그러다가 적절한 순간에-미리 하면

    안되고- 그 사람 역시 바보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일세.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가 담담하게 죽을 수 있을

   걸세.

   그러한 지혜를 얻는 방법은 보편적인 사상을 조금씩 조금씩

    공부해 가면서, 세태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고, 미

    디어의 정보와 자신만만한 예술가들의 주장과 제멋에 취

    한 정치가들의 발언과 비평가들의 난해한 논증을 매일매

     일 분석하고, 카리스마적인 영웅들의 제안과 호소와 이미

     지와 외양을 연구하는 것일세. 그래야만 결국 그자들 모두

    가 바보라는 놀라운 계시를 얻게 될 테니까. 그러고 나면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는 것이지...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견딜 수 없

    는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하네. 다시 말하면, 사

    람들은 이치에 맞는 것을 더 좋아한다라든가, 어떤 책이

      다른 책들보다 낫다라든가, 어떤 지도자는 진실로 공동선

     을 추구한다라는 식의 생각을 어떻게든 고집해야 하네.남

    들은 하나같이 다 바보다라는 믿음을 거부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인간적인 본성일세. 그렇지 않다면 인생을 살 필

    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크리톤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선

   생님께서 혹시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자네 벌써 죽을 때가 되어가는구먼!"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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