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두편의 이야기
Posted 2008. 8. 21. 15:46, Filed under: Ex-Homepage/Essay 시인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지 매우 궁금했었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시인의 삶을 알게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서 그 시인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면 무슨 기분일지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시집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는 내 잘못 반, 내 잘못이
아닌 것이 반이라고 본다. 나의 무관심도 문제지만 딱히 맘에 드는 시인(시가
아닌)을 찾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 몇 편 정도는 쏙
마음에 드는 것을 읽었느냐하면 그것 또한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친구들처럼 화려한 연애시를 볼 때면 나 또한 로맨티스트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 남는 것은 없었다. 단지 그 때 그 순간만의 기억뿐(그것조차
가물거린다).어떻게 보면 그것이 속편한 시의 감상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그대로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보편적이면서도 상대적으로는 쉬운
일일 거라 생각한다.
시험 주간에서 거의 모든 시험이 월요일에 끝이 났기 때문에 화요일 오전에
송파 도서관에 갔다. 좀더 많은 작가들의 더욱 다양한 시들을 접해보겠다는
생각보다는 시집에는 돈을 들이지 않는 내 버릇 때문에 간 이유가 더 크다.
독서에 있어서의 나의 주된 관심사는 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약간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처음 시집이 많은 곳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매우 작은 책들이다라는 거였다. 그리고 또 매우 많은 시인이 있다는 것도
느꼈다.
시와 시인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게 선뜻 들어오는 책은 없었다. 제목만 봐도
끌리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정도로 참신한 이름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몇
권 정도 그러한 책들을 살펴보니 십중팔구 사랑이야기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랑이야기는 가볍다. 물론 내가 사랑에 대하여 편견을 가진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란 주제 말고도 어두운 습지에 묻혀있는 많은
것들이 있고 그러한 것들은 상대적으로 가려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난 내
관심의 얼마만이라도 그러한 곳에 주고 싶었으며 시를 고르는 데에도
적용시켰던 것이다. 결국 도서관에서의 시집 선정에서부터 난관이었다.
그러다가 백석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백석의 시를 처음 알게된 것은 고등학교때 '여승'과 '고향'이란 시를 수업
중에 접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물론 그때는 단지 문제를 풀기 위한 정도였고,
그러다가 다시 백석이란 이름을 들었던 것은 작년 교양 국어 수업 시간에
친구와 이야기를 했었을 때였다. 당시 좋아하는 소설, 수필, 시, 영화 등의
감상을 말해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느 학생이 백석의 시를 낭독했었다.
그때의 기억이라곤 당시 발표자가 언급했었던 '백석'이란 이름이
'흰돌'이라는 의미라고 했던 것 뿐 이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계속 나의
기억에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책을 뽑았다. 그리곤 대출을 했다. 시집 전면에 있는 백석의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잔잔한 미소와 투명한 눈빛, 그리고 개성있는
머리스타일에 난 더욱 호기심을 가졌었던 것이다.
시집 전체에 나와 있는 시를 다 읽고 싶었으며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다행히 시간은 충분했고 관심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렇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아래에 주석이 있었지만 어휘가 너무 어려웠다. 특히 다
읽고 나서 문맥적인 의미는 파악이 되었으나 내포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감조차 못 잡은 시도 몇 편 있었다. 그렇지만 대체로 만족이었다.
대체로라 한 것은 일주일의 기간으로 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래도 만족한 것은 약간의 갈증이 해소되어서인 것 같다.
2번의 정독 중에 고른 것은 7편이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수라','내가 생각하는 것은','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설 의','마을은 맨천 귀신이 돼서','늙은 갈대의 독백'
그러나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그 중에서 다시 2편을
뽑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과 '설의'였다.
1.
'고독함'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다. 시인이 이 시를 지을 때의 고독한
심정을 생각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세 자리 수의 나이가 들 때까지는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벌써 20%의 삶을 살은 것이다. 그 와중에 최근의 1년
6개월 가량의 시간은 나에게 방황과 고독의 시간이었다고 본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러한 것은 젊은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고뇌면서 또한 내
개인적인 상황과 내 자신의 성격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거미줄과 같은
고독이다. 이 시를 감상할 때면 이 구체적인 내용들이 나의 실제 삶에
있었음을, 있음을 그리고 있을 것임을 느낄 수 있다. 결국 나는 그의 말대로
'가슴가가 뜨거워 짐'을 잠시나마 느낀다.
이 시는 나에게 오로지 현실 인식만을 하라고 말한다. 마치 동물원에서처럼
한발자국 나로부터 떨어져서 관조하라 한다. 이런 명령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묵묵히 따르는 것은 내가 어느 정도의 허무주의에 심취해 있는 것도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가정도 해본다. 만약에 백석이 이러 이러한 방법으로
지금의 방황을 타파하라고 말했다면, 이 시를 지금처럼좋아하진 않았을 것
같다. 훈계조의 말투가 싫은 것이 아니라 인위적임이 싫기 때문이다.
백석은 결코 고독함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 시인 스스로가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함에 대해 아쉬워한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다. 그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배가
항해하도록 놔두는 것이다. 고독과의 대화, 그리고 그 안에 살아 숨쉬는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가 아닌 그가 위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 읽고 있는 책은 '하루키 문학수첩'이다. 얼마 전에 서점에서
할인판매를 해서 충동구매로 산 3권의 책 중의 하나인데, 백석의 시와
하루키의 작품을 동시에 읽게 된 것이다. 우연찮게도 그 둘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들은 고독을 즐긴다. 나아가서 그것을 다룰 줄 아는 것 같고
그래서 난 그들을 존경한다. 나 스스로는 아직 고독과 동반자인 관계일 뿐 그
이상의 단계는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 시에는 정 반대되는 두 존재가 있는 것 같다. 외로움과
눈물이다. 외로움이 있기에 눈물이 흐르는 것이고, 눈물로 인하여 외로움은
승화되는 것 처럼 느껴진다.
2.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아직도 이 시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시를 읽는
것은 영화 한편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시를 느낄 때면
어떠한 장면도 생각하기가 그렇게 힘들다. 가까스로 생각나는 것은 하얀 눈
내린 적막한 평원에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몇 방울의 물기정도이다. 이
시는 앞의 시에서의 '고독'이란 주제와는 거리가 있으며, 그러한 점이 백석의
시를 더 좋아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어떤 백지가 있다. 말 그대로 점하나 없는 하얀 종이가 있는데, 거기에 검은
색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하나 그린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가지고 신촌의
거리에 나선다. 학교 앞에 횡단 보도의 중간에 서서 신호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그 종이를 손에 들고 위로 치켜세운다. 그리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사람들, 그들의 눈이 바로 그 흰 종이의 검은 원을
주시할 것이다. 바로 그때 검은 원이 느끼는 기분을 몇 방울의 물기는 느꼈을
것만 같다. 이것이 혹시 그가 사랑했던 어는 한 여인을 위한 시라고 해도
내가 이 시를 감상하는 데에 그다지 상관은 없다. 나에게 있어서의 관심은 그
여인보다는 그 여인의 가슴속 한가운데의 빛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시인에겐 약간 미안하지만) 내 마음껏 해석을 하니 어찌보면
'설의'란 꼭 방금 전에 나온 듯 뜨거운, 젤라틴으로 된 나의 마음 같기도
하다. 엔트로피의 법칙이 너무나 싫을 때가 지금이다. 차가운 눈도 뜨거운
젤라틴도 녹으며 식는다. 백석은 나에게 '눈은 녹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 듯하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쉽게 인정하기 싫었다. 어쩌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나의 이기주의란 참 우스웠다. 심지어는 착한 일을 했어도 스스로 현실을
부정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내가 잘못을 해도 '미안'이란 말
한마디를 못해서 안타까웠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 난 미안함을
예전보다는 쉽게 표현한다. 물론 그 안에는 진심을 포함시켜서 말이다.
그것이 적응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대한 또 나에 대한 적응, 그것이 나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넘치는 것도 모자란 것도 제자리를 다시 찾는
것이 삶의 이치'라는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기 때문에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인다. 나 자신조차도 완벽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것보다는
기쁜 것이다. 물론 아프게 기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설의'를 느낄 때면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은 듯 하다. 한계가 있는 기쁨을 수용하는 것도 때로는
좋은 인생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그의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우칠 수
있었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그의 시집과 그의 평전을 몇 권 더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생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삶을 살았길래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백석은 아웃사이더였다. 정열을 가슴에 담아둔 아웃사이더였던 것이다. 나
역시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람과의 교감은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혼자서
생각하기만도 벅찰 정도로 많은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특히 나에게 있어서
최근은 더하다. 가끔 이런 내 자신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가만히
놔둬야 할 것 같아 그대로 둔다. 이런 와중에 백석의 시를 만난 것은 적잖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뽑아서 수용했기 때문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의
시와 그의 사상이 내 맘에 들기 때문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백석을 천재시인이라고 한다고 들었다. 난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치 말이 잘 통하는 옆집형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그만큼 수수하게 느껴졌다.
삶을 사는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안경을 갈아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듯하다. 다양한 안경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해
보인다. 나 또한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백석의 시를 느꼈던 안경은 20대에
막 들어서면서 쓰게된 안경이다. 점차 시력은 나빠지겠지만, 실명을 하는 그
순간까지도 지금의 이 기분을 잊지는 못할 것이며 왠지 이 안경이 앞으로
당분간의 나의 시력을 지켜줄 것만 같다.
p.s. 이번에 이것에 관한 숙제를 내는 것이 있어서 쓴 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좀 (많이) 긴 것 같습니다..^^;;
또 막쓴 티도 많인 나고요...-_-;
오늘도 좋은 하루되시길...
-199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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