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책을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바드 의대를 졸업한 한 글 재주가 있는 사람이 쓴 것이며, 책으로까지 인쇄된 것을 보니 내용은 불굴의 투지와 고귀한 사명감을 가지고 뛰어든 의학의 길을 졸업한 소견 정도겠구나?...로 약간은 시니컬 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런 추측은 빗나갔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맨 처음 떠올랐던 그 순간부터 이 책이 미국 의학교육과 근대 의학을 비판하리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나는 두려워졌다. 내가 대단히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p.10

저자인 멜빈 코너는 인류학자출신으로 서문에서부터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인문학을 배운 나이든 의대생의 신분에서 그가 겪었던 의대교육의 실상을 ‘까발리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역자의 서문에서도 드러난다.

“...의학을 배우는 단계에 있는 학생들은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의사들을 현실 세계에서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학생들이 이 책을 통하여 ‘훌륭한 의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괜찮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라도 임상교육은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인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미래의 의사들이 이 책을 통해 실험실에서 진행되는 과학과 진료실에서 이루어지는 의술이 왜 의학의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게 된다면, 그들이 보건의료사에서 새로운 지평선을 보여줄 가능성은 커지게 될 것이다...” p.16

이 책은 역자에 따르면 멜빈 코너 본인이 한국의 역자들이 번역료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한국어판 저작권을 무료로 허락해줬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현재 내가 읽은 버전은 절판되었고 시중에는 같은 책을 다른 사람이 번역한 책이 나와 있다.(저 위의 겉표지는 지금 나와 있는 책이다. 두 판 모두 의사가 번역을 했기 때문에 차이가 그렇게 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어쨌든 내가 읽은 책의 목차는 이렇다.



서문
역자 서문
1. 대상성 휴지기
2. 첫번째 만남들-기초임상 수기
3. 응급수술 병동
4. 잠재우는 도사들-마취과학
5.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6. 영혼의 병변-신경외과와 신경과
7. 정신과 신체-정신과
8. 어린이들을 경험하다-소아과
9. 산과
10. 생명을 창조하는 기계-부인과
11. 병리학
12. 심부전-내과 (1)
13. 임종 지켜보기-내과 (2)
14. 치유와 희망-내과 (3)
15. 잊을 수 없는 사건과 사람들-본과 4학년
16. 의사라는 직업
역자 소개



저자가 인류학 교수라는 직업에서 하바드의대에 늦깍이로 들어온 후 2년의 공부를 거친 후 겪기 시작한 임상의 현장에서 그는 각 과별로 자신의 느낌을 서술하고 있다. 요즘 ER이란 미국드라마를 보고 있어서 인지 책의 내용에 나오는 사람의 지위(?)-어텐딩, 치프, 인턴, 의대생 등-를 하나씩 떠올리며 읽으니 더 재미있었다. 한편 이 책도 다른 책들처럼 읽으면서 하나하나의 감상을 적어갔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지쳤다. 책의 양도 방대하긴 하지만(510페이지) 너무 개인의 주관에 엮인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만족스러웠던 점은 각 과에 대한 이야기가 임상을 기준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각 과에 대하여 무슨 일을 하는지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산부인과는 산과와 부인과이고 산과는 애를 낳는 것을 주로 하고, 부인과는 유방암 같은 부인질병을 주로 한다는 정보 등이다.

“...마취과 의사는 인간의 의식을 다루는 화학자이고, 통증의 정도를 조정하고 결정하는 사람이다. 또한 이들은 환자들과 함께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게 된다. 마취과 의사들의 조심스러운 눈빛 아래 환자들은 혈관과 뇌를 통하여 스며드는 약물의 힘으로 망각의 안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p.116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만 어떤 수술에서 최악의 위험은 전신마취 때문일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마취와 관련되어 환자가 죽는 경우가 일년에 만이천 건 정도 발생한다. 때문에 마취과가 완전히 독립된 전문과로 존재한다. 그래서 많은 수술에서 마취과 의사가 없이 수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되고 있다. 또한 전공의가 당직 다음날까지 계속해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임상 전문과이기도 하다.” p.133

또 의대생이 아니면 그냥 쭉 넘어갔을 몇몇 의학용어들도 관심을 가지고 봤다. 마치 ER을 보기 전에 매니아사이트에서 관련 용어와 속어를 프린트해서 봤듯이 말이다. 사실 전문적인 의학적 증례는 실제 본과 때 배운다. 그러므로 지금 읽고 있는 이런 종류-흥미위주-의 책이 예과생인 지금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너무 쫄지 않게 해주며 또 너무 낭만에 빠지지도 않게 해주니 말이다. <대상성 휴지기 파트에서 나온 [수련의 4원칙]은 조크인데 새겨들을 만 했다. 첫째: 그 치 료법이 잘 듣는다면 계속하라! 둘째: 그 치료법이 잘 듣지 않는다면 중단하다! 셋째: 만약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때는 아무 것도 하지마라! 넷째: 그리고 (환자가 수술을 간절히 원하지 않는 이상)외과의사를 부르지 마라~! 였다. > 그러나 L.O.L in N.A.D(little old lady in no acute distress, 특별한 급성 질환이 없는 노인)처럼 별 증세도 없으면서 근심스런 마음에 공짜로 치료받고 가는 노인들이 꽤나 있다거나, 유아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어도 의사들이 관찰하다 보면 숨겨졌던 병이 드러나기도 한다는 소아과적인 예방의학을 언급할 때는 마치 ER의 수간호사인 캐롤이 의대생인 카터에게 유용한 임상 팁을 알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모든 부분에 걸쳐 저자는 의사도 사람이고, 또 환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뛰어난 의학 기술을 통한 치료 외에 환자와의 교감을 강조한다. 환자들은 거의 언제나 의사나 의대생(PK도는)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원하고 있다고 한다. 즉 환자의 의견은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라기 보다는 존중되어야 한단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아주 크게 본다면 두 가지 정도로 저자의 의견을 정리할 수 있다. 우선 현재 의대의 교육 시스템이 잘못 되어있다는 점과 현직 의사들이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후자의 이유를 비정상적인 의대교육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주된 부분인 각 과별 실습 때 만난 레지던트와 의사 이야기에서 그들에 대한 칭찬은 거의 찾기 힘들다. 물론 대놓고 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또 빠질 수 없는 전문화에 따른 인간 소외도 지적한다. 대표적인 예는 의대생도 잘 알아먹기 힘든 그들만의 약어와 은어의 남용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무지 역시 그가 지적하는 문제점의 하나이다. 안락사, 불치병에 있어서의 고지관련문제 등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런 많은 것들 역시 조금씩 언급이 되어있다. 그렇지만 말했던 것처럼 책의 내용 대부분이 자신이 겪었던 임상실습에서의 인간관계-선배와 환자들-에 치중해 있던 만큼 후반부로 갈수록 지루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가 원래 전공한 학문이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에 관한 것 이였기 때문인지 그는 연세대학교 시절 미국문화의 이해란 교양을 가르쳐 주신 K교수님을 생각나게 했다.(그 선생님은 멜빈 코너와 반대되는 길을 가시는 분이시다. 연대 의대 재학시절 흥미를 잃고 다시 인문학을 전공한 후 현재는 인류학을 공부하고 계신다.) 그때 수업에서 난 과목의 이름과는 약간 다르게 미국과 미국문화를 비판적으로 보는 법을 배웠는데, 당시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부분은 결국 '인간성의 회복'과도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일반인이 본 의료계의 아쉬운 점을 전문적으로 파고들어 책을 쓴 것과도 유사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제 의대생이자 예비의료인인 내가 보고 배울 점은 무엇일까?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한 두가지 조건, 뛰어난 기술과 따뜻한 마음! 이것을 함께 이루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내가 되길 원했던 그런 의사란 모두 저 두 가지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배워왔던 많은 지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내 마음을 형성한 것이라면 앞으로 몇 년간은 평생의 내 직업인 ‘의술’을 위해 투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선 수준 높은 지식과 방대한 양에 치여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기 쉬울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난 내 우상들처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을 이번 방학을 통해 다짐해 본다.

기억에 남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게인스 선생은 의사가 반드시 알고 전달해야 될 ‘퇴원시 주의사항’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요약한 기록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것 자체가 때로는 생명을 구하는 응급 구조 활동보다 더 필요한 일이 될 수 있음을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터득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p.371

"...그들의 말대로 어머니날에 죽기를 희망했던 또 다른 어머니인 틸리 해믈린은 81세 할머니로 어찌할 도리가 없이 진행된 유방암 환자였다. 기본적으로는 건전한 사고를 갖고 있는 이 평범한 중류층의 여성은 한쪽 유방 전체와 흉벽의 상당부분이 징그럽고 바위같이 단단한 노란 오렌지색을 띤 종양에 먹혀들어 갈 때까지 의사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에 대부분의 의사들은 반사적으로 환자를 비난하지만 나는 항상 부분적으로 의사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 여성은 어디선가 어떤 특별한 의사라기보다는 의료인 전체를 대상으로 의료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치료가 가능했던 암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신뢰를 얻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p.387

나의 요구를 보세요.
내 말 듣는데 시간을 할애해 주세요.
제발 내가 아직 여기에 있는 걸 알아주세요.
겉으로 나는 약하고 아프고 초췌할 뿐이지만,
속으로 나의 가슴은 두려움을 안답니다.
나는 너무 할 말이 많아요.
너무 못한 일도 많구요.
나는 차가운 기계로 가득찬 세상을 바라지 않아요.
나는 단지 당신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은 열을 재고 맥박을 측정하지요.
그리고는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버립니다.
오, 제발 앉아서 제 손을 잡아주세요.
단 몇 분만이라도 머물 수 없나요?
나의 목욕을 건너뛰어 주세요. 침대보를 갈지 마세요.
대신 이 시간을 사용하세요.
내가 알고 있는 두려움을 같이 나누어요.
제발 내 침대 곁에 앉으세요.
속으로 전 갈구해요. 그러나 애원할 수는 없어요.
당신의 시간은 당신만이 줄 수 있어요.
당신의 도움과 보살핌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살아갈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에겐....
내가 가진 시간을 다 써버렸어요.
나는 지금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신이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제발 여기에 머물 사람을 보내주세요.


p.s. 멜빈 코너는 현재 에모리대학의 인류학과 및 정신과 교수로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인 '16. 의사라는 직업'에 나온 말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만 읽어도 아마 책의 내용을 대충 유추하기엔 충분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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