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V_한국사 상식 바로잡기(책과함께)

Posted 2009. 7. 1. 20:17, Filed under: Hobbies/Books

 

 이런 종류의 책이 재미있다. 요즘은 세계사는 이미 사라져가고, 국사도 필수과목에서 해제되었다고 알고 있는데(맞나?)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모두 필수과목이었다. 그래서 그때 교과서도 보고 독학국사란 책도 보고 참고서는 당연히 많이 보고 했는데(그때 시기별로 쭉~역사그래프를 만들고 거기에 깨알처럼 설명을 옮겨 쓰던 일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때 간혹 의문이 들었던 적이 많다. 예를 들면 강물을 사람의 힘으로 막았다가 한번에 풀어서 수장시킨 전쟁이야기가 과연 말이 되는 것인가란 생각을 많이 했었다.

 우연히 알게된 책이지만 나름 재미있어서 이틀만에 다 읽었다. 요즘 방학이라 시간이 많은 것도 있지만 내용이 chapter별로 흥미롭게 읽혀서 전혀 지루하지 않다.



* 목차

저자의 말

1. 어원에 관한 잘못된 상식
고조선의 ‘고’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성은 ‘왕’씨다?
백정은 도살업자를 일컫는 말이다?
내시는 거세당한 남자를 일컫는 말이다?
고려장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풍습이다?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고려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려장은 고려시대의 풍습이다?'라는 문제를 O,X 형태로 낸다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혼동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만큼 흔하게 들었던 것이었고 실제 그런 풍습이 옛날에 있었구나라고만 대충 넘어갔던 기억이 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설화가 사실로 혼동되어 굳어진 것이다. 흔히 들었던 할머니를 지게로 버리고 돌아오던 아버지가 자신도 똑같이 나중에 하겠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깨우쳐 다시 할머니를 데려온다는 것(중국의 '효자전'에 실린 원곡 이야기)과 옛날 기로국에서 국법을 어기고 몰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던 대신이 아버지의 지혜를 빌려 어려운 문제를 풀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아버지도 편히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고려대장경에 수록된 기로국 설화)가 대표적인 설화이다. 이 두 유형의 이야기가 뒤섞이기도 하고, 버리는 대상이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바뀌기도 하면서 구전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 이야기가 된 것이며, '노인을 버리는 나라'라는 뜻인 기로국이 고리국 또는 고려국으로, 기로의 장례라는 뜻인 '기로장'이 고려장으로 변해 굳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p48

 고려장을 고려 때 실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게 된 것은 일제시대부터라고 생각된다.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 나온 역사책, 지리서, 수많은 문집들 중 어디서도 노인을 산 채로 버리는 고려장 얘기는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일제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일제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고려장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자기 동네에 고려장했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나 굴이 있었다는 기억까지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일제시대에 고려장 이야기가 널리 보급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그런데 일제시대에 고려장 이야기를 보급하는 데 견인차 노릇을 한 것은 놀랍게도, 동화였다. 1919년 일찍이 평양고보 교사를 지낸 적이 있는 일본인 미와 다마키가 '전설의 조선'이란 책을 간행했는데, 여기에 '불효식자'란 제목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이것이 현재까지 확인된, 문헌에 남아있는 최초의 고려장 이야기다.....고려장 이야기 보급에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동화집'이었다.....여기서 잠깐. 조선총독부가 '조선동화집'을 편찬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자...책을 편찬한 곳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이곳은ㅇ 식민지 조선의 교육에 필요한 학교 교과서 편찬과 각종 교육 관련 발간물을 담당하는 부서로, 지금ㅇ로 치면 교육부 산하 교육개발원이나 국사편찬위원회 같은곳이다...때문에 '조선동화집'의 편찬동기와 의도를 일제의 식민통치와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다.p49~52

 '노인을 버리는 지게'라는 제목 아래 고려장을 마치 고려 때 실제 있었던 일처럼 써놓은 전래동화집이 지금도 버젓이 팔리고 있다. 심지어는 현행 교과서에도 고려장 이야기가 아무런 배경 설명없이 실려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읽기' 교과서의 '소년과 어머니', 초등학교 5학년 '도덕' 교과서의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실려 있는 어머니를 업고 고려장 하러가는 아들의 모습을 담은 삽화가 그것이다...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주로 화장을 했다...다음은 1882년에 간행된 그리피스의 저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 실려 있는 고려장에 대한 짤막한 글이다...(궁금하신 분은 직접 찾아서 읽어보세요~조선왕조가 한국인의 미신 속 잔인한 악습 2가지를 철폐했다고 쓰여있으며, 그것은 바로 고려장과  인제(산신령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라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그리피스는 도쿄 제국대학의 전신인 카이세이 학교 화학교수를 지낸 일본통 미국인이었다. 그의 '은자의 나라 한국'은 19세기 말 한국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책임에 틀림없지만, 일본 측 자료에 의거하여 쓴 것이기 때문에 시종일관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고려장과 인신제사에 대한 그의 지식 역시 한국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얻었다고 생각된다. 그리피스는 3년 동안 일본에서 살았다. 그러나 한국에는 짧게 두번 다녀갔을 뿐이다.p52~54

행주치마는 임진왜란의 행주대첩에서 나온 말이다?
 
 행주산성은 초등학교 시절 한번쯤은 소풍으로 가봤을 만한 곳이다. 이름에서부터 친숙한 터라 다들 행주산성과 행주치마를 연관시킬법 한데, 사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한다. 더불어 어릴 때 가졌던 의문은, 정말 치마폭에 돌을 날라 투석전을 해서 전투를 이겼다면? 아무리 조선시대라 하지만 좀 말이 안되지 않나란 생각이었다. 그에 대한 설명도 나와있다.

 행주치마와 행주산성은 행주대첩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각각 따로 존재했던 이름이다...이렇게 음운의 유사함으로 어원을 유추하는 것을 언어학에서는 민간어원설이라 한다.p58

 생각해볼 것이 또 있다.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것이 순전히 행주치마의 활약에 힘입은 석전이었을 까 하는 점이다. 행주대첩은 3천의 병력으로 3만 왜군과 싸운 필사의 격전이었다. 돌멩이와 애국심만으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그 어디에도 행줏산성에서 부녀자들이 동원된 투석전으로 승리했다는 기록이 없다. 행주산성에는 화차라는 무기가 있었다. 신깆전, 비격진천뢰, 총통도 있었다...p59

 행주치마의 활약은 매우 소중하되 그것만 부각시키는 것은 또다른 왜곡이 아닐 수 없다.p60

 

두문불출은 고려 말의 충신 두문동 72현에서 나온 말이다?
함흥차사로 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현모양처는 조선시대 여성의 이상형이다?

2. 인물에 관한 잘못된 상식
 이 부분 부터는 chapter별로 바로 두괄식으로 예/아니오를 명확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원시원하게~

바보 온달은 평강공주 때문에 출세했다?
 역시 바보 온달은 바보도 아니었고, 출세를 했기 때문에 평강공주를 만날 수 있던 것이다..

원효대사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귀신을 만난 것이 더 정설이라고 한다.

최영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말했다?
 No!~최영의 아버지가 최영장군에게 늘 하던 말이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에서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아 대승을 거두었다?
 귀주대첩은 지상전이었으며, 실제 병사도 적군에 비해 2배이상 많았고 강물의 힘으로 이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예전에 귀주대첩을 묘사한 그림에서 엄청난 강물이 적군을 몰살하는 장면을 보며 이게 정말 가능한가? 저정도의 물살을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막을 수 있지? 댐이 있는 것도 아닌데...라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역시 실제로 있던 일은 아닌듯 싶다. 참고로 살수대첩도 강물을 막거나 그런 일은 없다. 물이 등장하는 것은 맞지만!

문익점은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감춰 왔다?
 목화씨는 국외반출 금지품목도 아니었고, 더욱이 문익점은 그 지방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문익점의 업적을 평가절하하지는 않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붓두껍이든 상투 속이든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숨겨온 것이 아니라 주머니에 넣어 왔으며, 강남에 유배간 일이 없었다고 해서 그의 업적이 빛을 잃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가 가져온 목화씨는 우리 의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안겨주었다. 문익점 이전에 원나라에 사신 갔던 수많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문익점처럼 목화씨를 가져와 백성들에게 따뜻한 면옷을 입힐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가 문익점에게서 높이 살 점은 바로 그것이다. 귀국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잊지 않고 목화씨를 주머니에 넣어 온 마음, 칭송의 대상은 그것이지 그의 정치적 행보가 아니다.p135'

신숙주 부인은 남편의 변절이 부끄러워 자살했다?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홍길동은 분명 소설 속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허균이 썼다는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이다....그러나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홍길동의 이름이 무려 열 번 넘게 등장한다...홍길동은 연산군 때 조정 벼슬아치들의 근심거리였던 도적이었던 것이다. 왕 이하 지배층의 통치행위를 기록해놓은 관찬사서 '조선왕조실록'에 일개 도적의 이름이 열 번 넘게 등장한다는 것은 그의 행적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지배층의 주목거리가 될 만큼 매우 중요했다는 뜻이다.p148'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론을 주장했다?
김정호는 쇄국론자 흥선대원군에 의해 국가기밀 누설죄로 옥사했다?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 일주를 3번, 백두산을 7번 오르락 내리락 했던 김정호의 이야기, 그리고 흥선대원군에 바쳤다가 국가 기밀 누설죄로 대동여지도를 몰수 당했고 그것이 불태워진 이야기, 그리고 김정호가 옥사 했다는 이야기 등은 어릴 적부터 많이 봐왔던 스토리이다.

 그러나 총 60여매 중 12매의 목판이 아직 남아있고, 불탄 흔적이나 그을린 흔적도 전혀 없다. 그리고 대동여지도의 축소판으로 알려진 많은 저작물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라지지도 않은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당시 조선에서는 지도만들기가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18세기부터는 국가 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지도 만들기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정상기의 '동국지도', 윤두서의 '동국여지도' 등이 이 무렵 민간에서 개인이 만든 대표적인 지도다.p169'

 그렇다면 대규모의 대동여지도를 과연 김정호 개인이 혼자 만든 것일까?

 '흔히 김정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김정호에게는 후원자들이 있었다. 중인 출신으로 무관이었던 최성환, 병조판서를 지낸 신헌, 실학자 최한기가 그들이다. 이들은 재정 지원을 비롯하여 자료와 정보 제공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만약 김정호가 국가기밀 누설죄로 체포되었다면 그를 도와준 이 3명도 같은 죄로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신헌은 흥선대원군 치세에 병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는 조선 대표로 참석할 정도로 요직을 지켰다. 또한 김정호가 죄인으로 옥사했다면 이들의 문집에 김정호와의 관계를 누출시키는 내용은 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김정호가 국가기밀 누설죄로 옥사했다는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p171'

 그리고 김정호의 전국 답사와 백두산 등반 이야기 및 옥사에 관련된 이야기는 일제시대때 생긴 것이라 한다. 일본이 조작을 했다는 말이다. 

 '...대동여지도를 힘들게 완성했지만 흥선대원군이 지도판을 압수하고 김정호와 딸을 옥사시켰다면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한 조선, 특히 흥선대원군의 편벽됨을 비난하고, 진흙에 묻힌 옥을 발견하듯 대동여지도의 가치를 알아본 거은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p175'

 그렇지만 여기에 더불어 육당 최남선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런데 실은 '조선어독본'보다 먼저 옥사설과 전국답사설을 말한 사람이 있다. 바로 육당 최남선이다...최남선은 평소 지리학에 큰 관심을 갖고 '봉길이 지리공부'라는 글을 잡지에 연재하기도 했다...그런 최남선인 만큼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심을 기울인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최남선의 동아일보 기고문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세상으로 끌어내 다시금 빛을 보게 한 최초의 근대적 손길이었다.p177' (그런데 역시 최남선이 어떤 근거로 옥사설과 전국답사설을 말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p178부터는 일제가 조선어독본에 김정호 이야기를 실은 의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세요~^^). 요컨대 식민지 교육의 일원으로 그랬다는 것과, 일제시대 친일의 길을 걸은 최남선의 행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한편 아쉽게도 김정호의 최후, 그리고 언제 어디서 죽었으며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내용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명성황후의 신분이 한미한 집안이었다고 알려진 것은 일본의 역사학자 기쿠치 겐죠가 쓴 글에 있는 것이며...그는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 때 일본의 '국민신문' 특파원으로 시해에 직접 가담했던 인물이다....그의 책을 읽다 보면 조선은 마치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두 사람의 권력다툼 때문에 망한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든다. 뿐만 아니라 "이씨 왕조의 멸망을 불어온 것은 명성황후요 그의 정치요 성격"이라면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며느리와 대립하던 시아버지 대원군이 주모한 일이라고 사실을 왜곡시켰다....기쿠치 겐죠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왕비감이 못되는 한미한 집안의 고아를 왕비로 만들어주었더니 고마운 줄 모르고 유약한 남편을 좌지우지하며 시아버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파멸을 자초한 교만한 여인일 뿐이다.p185~187'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단식사했다?
 대의적인 명분에 의해 단식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측의 사죄로 2틀만에 단식을 그만 두었다. 최익현은 오히려 풍토병에 의해 앓다가 사망하였다 한다.

3. 유물·유적에 관한 잘못된 상식
고인돌은 남방식, 북방식으로 분류된다?
 '한반도는 고인돌 천국이다. 세계 고인돌의 40%에 달하는 약 4만기가 한ㅂ나도에 모여 있고, 그 중 약 절반이 전라도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전라남도에는 약 2만기의 고인돌이 밀집되어 있다....천년이란 오랜 시간동안 한반도 전역에 존재했던 고인돌. 누구나 잘 안다고 여기는 고인돌은 그러나 알지 못할 수수께끼를 아주 많이 간직하고 있다.p208~209'

금관은 왕이 평소 쓰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나, 실은 일상생활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뒤 묻어준 부장품, 그것도 머리에 쓴 것이 아니라 시신의 얼굴을 덮는 마스크였을 가능성이 높다...혹시 평소에 머리에 쓰드ㅏ가 죽은 뒤에 얼굴을 덮는 마스크로 쓰인 건 아닐까? 그러나 그 같은 추론은 금관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금관은 머리에 쓰고 다닐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두께가 1밀리미터도 안 되는 얇은 금판으로 된 관테에 높다란 세움장식을 세우고 수십 개의 곡옥을 달아놓아, 조금만 움직여도 세움장식과 관테의 연결부분이 무게를 못이겨 꺾일 듯 흔들린다. 이런 금관을 쓰고 일상생활을 하기란 건의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금관은 모두 무덤에서 발굴된 것이다.p211'
 하긴 평소에 봐도 안정성이 매우 없어보였긴 했다. 아마도 특정 행사에서 앉아 있을 때만 쓰고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한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발굴된 고대 금관은 10여점 뿐이다. 그중 신라 금관이 6점이니 신라는 금관의 나라라고 부를 만하다.p217'

포석정은 왕의 놀이터다?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성스러운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시기상을 보나 위치상으로 보나. 고려와 조선의 식자들에 의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주 첨성대는 천문대다?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이자 세계 최고의 천문대'라고 알고 있는 첨성대. 과연 그럴까?
제기된 의문과 여러 설들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첨성대에 대해 이렇게 여러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첨누대라고 하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많기 때문이다. 경주에 가서 첨성대를 직접 본 사람은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첨성대는 그 명성이 불러일으키는 상상과는 딴판으로 너무 소박한 모습이지 않은가?....칭송의 대상이 되곤 하는 우아한 곡선미는 천문대로서의 실용성에선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p227'

 이런 의문은 예전부터 늘 가졌던 것이다. 흠...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다?
 거북선은 철갑선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문헌에도 철갑선이 아닌 '장갑선'이란 말도 많고 다들 그렇게 인식하지만 오히려 외국의 저서에 의해 '철갑'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럼 철갑선설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철갑선을 주장하는 기록은 하나같이 일본 아니면 서양의 것이다.p239'

 그리고 덧붙여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한다.

 '그럼에도 거북선 철갑선설이 오늘날까지 위력을 발휘하게 된 데는 아무래도 1960년대 초부터 20년간 계속된 군사정권이 끼친 영향이 크다. 박정희 군사정궈너 시절, 무인이요 난세의 영웅이었던 이순신을 군사정권의 정통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우상화하면서 거북선 철갑선설은 요지부동의 자리를 굳힌 것이다. 광화문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선 것은 그 즈음의 일이었다.p241'

광화문 앞 해태는 화기를 막기 위해 세웠다?
운현궁은 조선시대 궁궐 중 하나이다?
독립문은 반일의 상징이다?
 독립이란 어디에서의 독립일까?
'독립문은 반일이 아니라 반청의 상징이다.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된 자주국이라는 것을 천명하기 위해 세운 문이 독립문이다. 독립문이 들어선 위치가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라는 사실이 그를 웅변한다.p263'


태극기는 처음부터 지금 같은 모양이다?
 태극기 탄생과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태극기는 박영효의 즉흥적인 작품이 아니라 고종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며, 애초의 도안에서 팔괘가 사괘로 바뀌었고, 태극기를 직접 그린 사람은 박영효 일행이 탄 메이지마루호의 영국인 선장 제임스였다는 사실이다. 메이지마루호에는 영국 영사 애스턴(아수돈), 일본 공사 하나부사도 타고 있었다.p275'

 또 여러가지 도안이 있었으며 그 중에 지금의 태극기로 정착이 된 것이라 한다.

4. 책, 문헌, 사진에 관한 잘못된 상식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
백제의 왕인 박사는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다?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대사는 왕건에게 "도선비기"를 주었다?
이규보의 시 "동명왕편"은 민족의식을 드높이기 위해 쓴 것이다?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홍길동전에 대한 의문이 많은 까닭은 시기상으로 몇몇 맞지 않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홍길동전의 지은이가 허균임에 틀림없다 하더라도 허균이 쓴 홍길동전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홍길동전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홍길동전의 가장 유명한 대목,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하소연하던 홍길동이 아버지 홍판서에게 꾸중을 듣고 어머니 춘섬에게 달려가 집을 나가겠노라고 결심을 밝히는 바로 그 대목에서다.p319' (그의 말에 '장길산'이 나오는데, 그는 숙종때 실존 인물로 허균이 죽은 지 80여년 뒤의 사람이다)

 '홍길동전이 허균이 쓴 한글 소설임에 틀림없다 해도 '최초'라는 자리는 내줘야 할 것 같다. 홍길동전보다 먼저 쓰인 한글 소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허균보다 약 100년 먼저 살았던 채수라는 사람이 쓴 '설공찬전'이 그것이다.p322'

한국 최초의 서구기행문은 "서유견문"이다?
교과서에 실렸던 명성황후 사진은 진짜다?
 이건 아주 흥미로운 chapter이다. 직접 사진을 보면서 읽어야 재미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 국사 교과서에 있던 사진이 나오는데, 이제는 교과서에서 삭제되었다고 한다. 왜 그럴까?(궁금하시면 책을 읽어보세요)
 
 덧붙여 당시 인물이던 고종은 사진을 찍기를 즐겨했던 것 같다 하는데, '그리스도 신문'의 정기구독 신청자에게 사은품으로 그의 브로마이드를 줬다고 한다. Wow...

5. 정치, 사회, 생활에 관한 잘못된 상식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것은 신라 여성의 지위가 높았기 때문이다?
 요즘 하는 드라마, 선덕여왕과 관련하여 몇몇 내용이 나온다. 여성의 지위라기 보다는 성골만이 왕이 되는 전례를 따르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덕만공주, 천명공주 등의 이름이 친근한 것은 요즘 가끔 왔다갔다 하며 들었던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름때문이다.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은 여진족의 간청 때문에 돌려주었다?
 사실 이건 말이 안된다고 어릴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전쟁과 피로 얻은 영토를 '간청'때문에 돌려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실은 인심 좋게 돌려준 것이 아니라 지키기 어려워 포기한 것이다.p365'

각종 물자와 인력부담도 있고, 게릴라전도 있고 해서 지키기 어려웠는데, 바로 그때 여진에서 화친 사절을 보냈고 매우 공손하게 행동했다 한다. 즉 여진의 '간청'은 포기의 '명분'이었다는 점!

그리고 동북 9성 개척에 앞장섰던 윤관은 패전의 책임으로 관직과 공신 칭호를 박탈당했다(물론 얼마 안있어 다시 관직을 되돌려 주었다고 하지만 복직 5개월 후에 사망한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정치란...).

 흥미롭게도 당시 '왜!?' 문관들이 윤관의 여진 정벌에 소극적이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나온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이란...

 '여진 정벌 때 문벌 세력이 정벌에 소극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아들들이 전쟁터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별무반의 핵심인 신기군에는 '말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동원되었는데, 당시 말은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소유했으므로 자연히 일반인보다는 문벌 귀족 집안 아들들이 차출되었다. 재신과 추밀, 그러니까 지금의 국무총리 이하 각부 장관쯤 되는 최고위 관리의 아들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결과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자, 동계병마사 오연총은 왕에게 재추(재신과 추밀)의 아들로서 지원자가 아닌 경우는 면제해주자고 건의한다. 있는 집 자식들의 군대 기피는 예나 지금이나 한가지인 듯하다.p371'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불태운 건 성난 백성들이다?
 아니다. 간단히 말해 왕과 백성들 모두가 빠져나간 경복궁에 들어온 일본의 장수가 쓴 일기에 경복궁의 모습이 나와있다.

 '그럼, 당신 텅 빈 한양에 입성했던 왜군 장수들이 남긴 기록을 보자. 다음은 왜군의 선봉대로 가장 먼저 한양에 입성했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장수 오오제키의 전기 '조선정벌기'의 한 대목이다. 5월 3일에 입성한 그는 경복궁을 처음 본 소간을 적어 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적어도 5월 3일까지 경복궁은 건재했다....이에 따르면 궁궐은 4월 30일이 아니라 왜군이 입성한 5월 4일부터 5월 7일 사이에 불탄 것이고 방화범은 백성이 아니라 왜군이 된다.p378~379'

 저자는 또한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당시 왕 이하 고관대작들이 보인 행태는 400여년 뒤 한국전쟁 때 수도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친 이승만 대통령 이하 고관들의 행태와 놀라우리만큼 닮았다. 선조는 떠나기 전날까지 "내가 한양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염려말라"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비 쏟아지는 새벽에 성문을 빠져 나갔고, 이승만 대통령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라디오 녹음 방송을 틀어놓고 한강을 건넜다.

 수도를 되찾은 다음의 행동도 꼭 닮았다. 3개월 만에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 못 가고 서울에 남았던 시민들을 공산당에 부역하지 않았느냐고 닦달했고, 1년 반 만에 돌아온 선조는 그 사이 왜놈 말을 익혀 지껄이는 자나 왜놈에게 빌붙었던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영을 내렸다. 

 경복궁이 누구에 의해서 불탔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 손에 불탔던들 어떠랴. 중요한건 백성이든 왜군이든 또 다른 누구에 의해서였든, 당시 궁궐을 태운 불길은 지배층의 나태와 무책임을 질타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는 사실이다.p380'

 지금은 어떠한가? 2009년 대한민국은!?


조선시대에도 담배는 어른들만 피웠다?

 민속촌이나 경주 등 지방에 놀러가면 꼭 장사하는 아저씨들이 파는 것 중에 담뱃대가 있었다. 그리고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이란 말은 할머니가 해주시던 동화의 도입부로 늘 쓰이는 레퍼토리 이다. 그럴 때마다 정말 그때도 담배가 있었나란 생각을 했었다.그런데 13년 동안 조선에 살았던 하멜씨는 말한다.

 '담배가 매우 성행하여 어린아이들까지도 4,5세 때 담배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녀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p382'

 '조선시대에 아이들에게 담배가 허용된 까닭은 당시 사람들이 담배가 약효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담배는 약초로 여겨졌던 것이다.p383'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안했다?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의 발명품이다?
 발명가는 아니다!
 '우장춘은 씨없는 수박을 우리나라에 널리 알린 사람이지 그것을 발명한 사람이 아니다.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는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 우장춘과 친밀한 교류를 나누었던 교토대학의 교수다.p405'

 '씨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일본에서 귀국 후 우장춘은 새로운 채소 종자 개발에 힘을 쏟았다...때문에 우장춘의 잉름은 물론 새로 개발한 채소 종자를 널리 알릴 계기가 필요했다. 씨 없는 수박만큼 그에 적절한 것은 없었다...한국 전쟁 직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사람들 마음에 우장춘의 씨 없는 수박은 자부심과 희망을 일깨워주는 한줄기 단비와 같았다. 사람들은 우장춘하면 씨 없는 수박을 떠올렸다...그렇지만 정작 우장춘은 "수박은 검은 씨앗 한두개를 깨물며 먹는 쪽이 훨씬 맛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p406~408'

 어렸을 때 한두번 쯤 씨없는 수박을 먹어봤는데, 당도가 너무 떨어지고 또 아삭하는 맛도 없어서 정말 이건 씨없는 수박이라 신기할 뿐이지 '먹는 수박'으로써는 최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우장춘 역시도 그런 생각을 했나 보다.

 우장춘은 위인인가? 영웅인가? 이에 대한 평가는 쉽게 내리기 어렵다(왜 어려운지는 이 chapter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가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있던 조선인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으며, 또한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워 연못에 뿌린 당사자로까지 알려져있다는 것. 그리고 일본엣서 재혼해서 낳은 아들이 우장춘이며 우장춘 본인은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 등 흥미로운 꺼리가 많다. 귀국 후 이승만 대통령이 농림부장관자리를 제안했으나 거절한 사실도 대단하다고 느끼지만, 무엇보다 그가 이후에 집중한 모습에서 그는 위인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한국에서 우장춘의 연구와 활동은 당시 한국에 절실히 필요했던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되었다. 과학자로서 좀더 수준 높은 연구에 몰두하고픈 내밀한 소망은 조용히 묻어두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들을 자체 개발하고 재배하게 되어 '씨앗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의 재래종 채소들은 우장춘의 손을 거쳐 한층 맛좋고 질 높은 품종으로 재탄생되어 한국인들의 밥상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먹는 배추, 무, 강원도 감자, 제주 감귤이 모두 그런 것이다.p413'
 
 그는 죽기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고맙다. 조국은...나를 인정했다"

대한민국은 UN이 인정한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다?
 이 chapter는 꼭 찾아서 읽어봐야 한다.
쉽게 이야기 해서, 만약 지금 북한이 붕괴된다면 과연 북쪽은 땅은 대한민국의 일부가 될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책에 나온 그대로라면 UN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 우리가 예전부터 누누히 들었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의미에 의거하여 다시금 미국, 중국을 위시하여 일본, 러시아 등이 가세해 문제가 커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이 위험하겠지. 누군가 이슈화를 시켜야 하는데...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구 때문이었다?

'베트남 파병은 약소국 한국이 강대국 미국의 요구를 거절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실은 미국이 요구하기 전에 한국 정부가 먼저 제안한 것이다.p422'

 그리고 읽다 보면, 우리가 그때 받았던 +와 -를 생각해 볼때, 절대 괜찮았던 deal은 아니었으며 그에 앞서 전쟁이라는 상황과 국내 사정을 고려했을 때 정말 파병을 가야만 했는지에 대한 입장이 잘 나와있다(이승만이 그 전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프랑스와 독립국가들(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간의 전쟁에 프랑스를 돕는 군대를 보내겠다고 한 것이 최초의 파병'제안'이라는 말도 나온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항거해 평생을 바쳤다 자부해온 독립운동가 출신 이승만 대통령이 한 행동치고는 괴리가 엄청나다).

 어쨌든 이 chapter에는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잘 나와있는데 저자의 정치적 관점이 많이 포함된 느낌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상황은 정말 약소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점이 많다는 것이다.



* 출판사 리뷰

(1) 이 책은 왜, 어떻게 쓰게 되었나?

1990년대 이후 교양역사서 시장의 화두는 ‘역사 대중화’였다. 그렇게 시작된 교양역사서 붐은 2007년 현재까지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큼 양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교양역사서의 범람 속에 잘못된 내용이 확대 재생산되는 등 질적인 성장은 그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학계는 교양역사서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고, 교양역사서 저자들에 대해서도 대중추수적이라며 비판을 가해왔다.

(2) 교양역사서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다!

최근의 교양역사서는 독자들이 역사하면 떠오르는 딱딱함과 외워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다양한 형식을 추구하고 팩션을 가미하는 등 재미를 추구하는 책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성인물뿐 아니라 어린이 책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접근방식은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자칫 위험할 수 있다.

교양역사서 시장의 질적 성취에 대한 반성과 문제제기에서 출발한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단순히 흥미와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머물지 않고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며 꼼꼼한 사료 분석을 통한 충실한 교양역사서로, 독자들에게 기존의 교양역사서와는 한 차원 다른 지식 정보와 읽는 재미를 제공한다.

이 책을 쓴 박은봉은 3년 여에 걸친 집필 기간 동안 일반인들이 왜 이렇게 잘못된 정보를 ‘사실’로 알고 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하고 이유를 밝혀냄으로써 한국사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또한 수많은 자료를 검토하고 최근의 연구 성과까지 반영해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였으며, 학계의 뜨거운 논쟁거리도 과감히 채택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여부’(‘교과서에 실렸던 명성황후 사진은 진짜다?’, 333쪽)나 ‘대동여지도에 관한 오류와 그 원인’(김정호는《대동여지도》 때문에 국가기밀 누설죄로 옥사했다?, 174쪽)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밝혀내지 못한 새로운 성과를 거두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교양역사서가 한 단계 진일보하는 데 밑거름이 될 만하며 매우 시의적절한 책이라 하겠다.

(3) 독자와의 오랜 소통을 통해 얻은 값진 결과물!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총 5부 44꼭지로 구성되었다. 이는 지은이가 지난 15년간 교양역사서를 써오면서 독자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받은 수많은 질문들 중 가려 뽑은 것들이다. 이러한 피드백 역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교양역사서 베스트셀러 필자인 박은봉만의 강점이며, UCC 등으로 콘텐츠 참여에 익숙한 최근의 젊은 세대에까지 어필하는 박은봉의 매력이라 하겠다. 그렇게 엄선된 44꼭지는 고조선에서부터 베트남 파병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전반의 문제를 심도 있으면서도 명쾌하게 풀어나가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발전적 시각을 제시한다.

1부 ‘어원에 관해 잘못 알려진 상식’에서는 ‘고조선의 ’고‘는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함흥차사는 모두 죽었다?’ 등 9개의 주제를 다루었으며, ‘인물에 관해 잘못 알려진 상식’을 다룬 2부에서는 ‘바보 온달은 평강공주와 결혼한 덕분에 출세했다?’,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론을 주장했다?’ 등 11명의 인물에 대해 다루었다. 또한 3부 ‘유물이나 유적에 관해 잘못된 상식’은 ‘금관은 왕이 평소 머리에 썼던 것이다?’, ‘독립문은 반일의 상징이다?’ 등 9개 꼭지에서 잘못 알려진 오류와 그 연원을 파헤쳤으며 4부 ‘책이나 사진에 관한 잘못된 상식’에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민족의식을 드높이기 위해 쓴 것이다?’, ‘《홍길동전》은 허균이 쓴 최초의 한글 소설이다?’ 등 7개의 자료의 오류에 대해 논의하였다. 마지막으로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의 발명품이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구 때문이었다?’ 등을 다룬 5부 ‘정치·사회·생활에 관한 잘못된 상식’ 에서는 8개의 주제를 선정해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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