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2000년 정도인 것 같다. 아는 동생이 운동권(?)이었는데 진중권이란 사람의 책을 읽고 또 방학에 그의 강의를 듣고 그랬다고 했다. 그리고 종종 매체를 통해 보이는 그의 글을 보면서 그냥 단순한 이유, ‘뭔가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때문에 이 책을 빌리게 되었다. 이 책이 진중권씨가 쓴 책에서 가장 먼저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학이란 말의 뜻을 정확히는 모른다. 책의 부제에 ‘에셔와 함께 자유자재로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란 말이 붙어 있는 것으로 그 뜻을 유추했다. 책은 원시예술로부터 근대까지 시기적으로 분류하여 ‘미’의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내용이 방대하다보니 각 시기별 모든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고 스토리에 맞게 몇 개씩을 넣은 것 같다.
가상과 현실이란 소제목으로 전개되는 앞부분에선 먼저 동굴벽화의 의미에 대한 것이 나온다. 내용은 예전 고등학생 때 국사시간에 잠깐 언급이 되어진 부분이다.
“수렵무도 마찬가지다.(중략) 이 춤을 통해 그들은 사냥의 절차와 테크닉을 반복학습할 수 있었다. 또 언제나 승리로 끝나는 극의 구조는 사냥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격렬한 동작은 사냥에 필요한 신체 단련을 대신해 주었다.” p.35
흥미로운 사실은 고대의 사람들이 자연현상을 신의 역할로 믿으면서, 사람을 신으로 대입시켰다는 것이다. 마치 우상숭배와 비슷한 내용이 나올 것 같지만, 사실 누구도 신의 역할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변화가 있을 때(즉 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약해졌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신을 죽임’으로서 다시 봄-사람들이 바라는 계절-이 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신 본인보다는 신의 아들이나 대리인이 죽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사람이 아니라 양이나 염소 따위가 대신 제물로 바쳐졌다고 한다. 결국 신을 설정한 것도 사람이면서 자신들의 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을 죽인 것도 사람이란 말이다.
“디오니소스 축제도 갈갈이 찢겨죽은 디오니소스를 추모하는 행사였다. 왜 그들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그토록 흥청대는 ‘축제’로 기념해야 했을까? 거기엔 징그러운 이유가 있다. 신이 살해되면, 그 시체를 뜯어먹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신의 육신을 먹으면 신의 영험함이 자신에게 옮아온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신 또는 그 대리자의 목을 벤 날엔 흥겨운 축제가 벌어졌다. 디오니소스도 그렇게 뜯어 먹혔을 게다. 유럽에서 초봄에 행해지는 ‘카니발’(글자 그대로 하면 인육을 먹는다는 뜻이다)의 원형이 바로 이거다. 호이징가에 따르면, 이와 유사한 관습이 중세까지, 그것도 기독교 신앙 아래 버젓이 행해졌다고 한다.” p.43~44
종교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생겨났다. 너무 신을 설정했다 말았다 하니까 귀찮기도 하고, 또 일정한 패턴이 생기니까 아예 틀을 마련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속된 말로 미학과 나오면 미술학원도 못한다는 식으로 그것이 실용적으로는 별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하는데, 뭔가를 알아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 역시 미학을 배우기보단 미학을 전공한 사람이 쓴 책을 읽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이렇게 세계를 이해하고 개조하려는 인류 최초의 시도가 좌절하여 오히려 인간의 창조적 활동을 질식시킬 때, 인간은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대안을 찾는다. 주술로 소망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인간은 이제 신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이 위대한 존재의 권능에 매달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종교가 발생했다.” p.49
다음으로 이집트와 그리스의 초기 미학의 차이점에 대해서 나온다. 말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별것은 아니다. 이집트 예술은 ‘정면성의 원리’를 중시해서 사물의 형태를 온전히 전달하는데 치중했으며 사막이라는 주변 환경의 척박함 때문에 추상성을 중시했다고 한다. 정면성의 원리란 보통 우리가 이집트관련 그림 등에서 볼 수 있는 얼굴은 옆을 보고 있고 몸통은 앞면이면서 발은 또 옆을 보고 있는 그런 류의 장면을 말한다. 반면 그리스예술은 ‘단축법’이라고 해서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중시했다고 한다. 물론 그리스의 환경은 이집트에 비해 훨씬 풍족하고 살기 좋았다고 한다. 한편 여기선 재미있는 말이 나오는데, 이집트의 투탕카멘이나 미라의 관등에 나오는 입가의 은은한 미소를 전문용어로 ‘archaic smile'이라고 한단다. 한번 따라 웃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평소에 저렇게 웃어볼까?
수학적 대칭과 비례는 실제 사람의 시각에선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고 해서 엄격한 비례속에 약간의 빗나감을 집어넣은 것이 ‘우미’라고 했다. 예를 들어 라오콘상-그림은 인터넷을 찾아보길-의 모습처럼 말이다. 라오콘은 트로이의 신관으로 하늘의 비밀을 누설한 죄로 두 아들과 함께 뱀에 휩싸이는 벌을 받은 사람이란다. 이런 말은 미팅에 나가서 할법한 말이기도 하지만 박물관이나 관련 서적을 보면서 하면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이기도 하다.
그 후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나온다. 라파엘로의 유명한 그림, ‘아테네학당’의 모습을 전개하면서 이야기는 진행되는데 그 가운데의 두 사람이 앞으로 책에서는 계속 나오면서 문답식 진행을 한다. 그들이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은 하늘 위, 즉 이데아를 가리키고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땅, 즉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플라톤은 그 이데아가 실생활에선 척도와 비례로 나타난다고 해서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반대였다. 이와 비슷하게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 대한 것도 나온다.
“니체는 이 의문을 추적한다. 빙켈만은 그리스 예술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특징지었다. 니체는 그리스 예술의 이런 특징에 ‘아폴론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예컨대 그리스의 조형 예술은 이 밝고 명랑한 아폴론 정신의 산물이다. 하지만 비극은? 비극의 우울한 그림자까지도 이 명랑한 정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없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 예술을 지탱해준 또 하나의 힘을 찾아낸다. 그게 바로 저 깊은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광포한 힘, 바로 ‘디오니소스적’ 충동이다.” p.92
“(전략) 하지만 아폴론적 가상은 디오니소스적 세계 위에 드리워진 얇은 베일일 뿐이다. 이 베일 뒤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비극의 주인공을 여지없이 파멸로 몰아간다. 아폴론이 개별화로 생긴 세계를 긍정하면, 디오니소스는 개체를 파괴하여 원래의 근원적 존재의 품 안으로 되돌린다. 이때 무서운 삶의 진실이 드러난다. 개체화 자체가 고통이다. 이 땅에 행동하는 개체로 태어난 것부터가 고통의 근원이다. 비극이 주는 지혜는 바로 이 가혹한 삶의 진리다. 이 디오니소스의 지혜를 아폴론의 아름다움으로 감성화한 것, 그게 바로 비극이다. 비극 속에서 전혀 상반되는 성격을 가진 그리스인들의 두 주신은 이렇게 한 몸이 된다.” p.94
비극은 희극보다 앞서며,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 사조였다는 주장이다. 어차피 그게 진실이라면 항상 희극처럼 살기 위해 노력해야 적어도 개체로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비극이 무얼까?
“아리스토텔레스: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악행이 아니라 악의 없는 중대한 ‘과오’의 대가로 불행해져야 합니다. 가엾다는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기고, 두려운 감정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기니까요.” p.105
이야기는 이제 중세로 넘어간다. 중세의 미란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라톤주의가 몇백년 동안 지배해온 세계이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태초의 말씀’이란 단어를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같다고 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노스가 좀 더 오래 살았던들,”단어 몇 개만 고침으로써 기독교도가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p.122
그 후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통해서 감각세계의 ‘가상’을 포기하고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 아마도 종교적 이상향-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미의 역할이 된다.
“중세 예술의 임무는 감각적인 것으로 ‘초월적 진리’를 표현하는 데 있었다. 물론 감각적 매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감각적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선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알레고리다. 중세 회화에 등장하는 양은 그냥 양이 아니라, 아뉴스 데이(신의 어린양),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알레고리에서 눈에 보이는 형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알레고리는 글자 그대로 ‘다른 걸 말하는’ 거니까. 중요한 건 이 가시적 형체가 말하는 ‘다른 것’,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의 신성함이다.” p.127
지금 도서관에서 빌린 책 중에는 세계사책도 있는데 거기에 나올만한 내용도 조금씩 언급된다. 11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아치공법과 “신의 성채”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벽을 중심으로 쌓은 건축양식을 말하며 그 다음으로 나온 고딕양식은 스테인드글라스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하며 관련된 내용을 서술한다. 책의 내용이 주제가 ‘미’에 있는 만큼 일관되게 정리하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가상과 현실의 관계라는 명확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책을 서술했다고 하지만 너무 급하게 읽은 탓에 모호한 점이 꽤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예술을 모방으로 본다. 예술은 신의 예지에 의해 창조된 질서정연한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는 모방이다.” p.160
“토마스 아퀴나스는 미의 조건으로 그 유명한 세가지 조건 외에 ‘적절성’을 들었다. 즉, 모든 사물은 제 모양을 제대로 갖추고 있을 때에만 아름답다는 거다.” p.173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소설 중 하나인 '장미의 이름‘을 가지고서 중세시대의 미학을 설명하는 부분은 흥미진진했다(하지만 아직 저 소설을 읽지 않은 나에겐 바로 스포일러가 나와서 당황스러웠다.’범인은 A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윌리엄 수사와 맹인 수사인 호르케의 대립구조로 소설은 진행되는데 실제로 윌리엄은 윌리엄 오컴이란 중세의 유명론자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그는 중세의 형이상학적 신학자들이 쓸데없는 사변을 일삼는 데 반발하여, 불필요한 사변적 개념들을 철학에서 도려낼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물론 호르케는 토마스 아퀴나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중세 수사를 의미한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라진 저서 ‘희극론’의 향방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은 이렇게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이 이야기-장미의 이름-는 허구다. 하지만 어쨌든 희극론이 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시학’의 제1부 ‘비극론’만 남기고 제2부 ‘희극론’만 고스란히 없어지다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어쩌면 제2부는 정말 고의로 불태워졌는지도 모른다. 웃음을 두려워하는 자에 의에 말이다. 또 만약 그랬다면, 그건 에코의 상상대로 아마도 엄숙한 시대였던 중세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중세 뿐일까? 이런 일은 절대적 진리를 참칭하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일어날 수 있다.” p.166
그리고 중세를 넘어 근대예술로 넘어온다. 저자는 각 파트의 도입부에 간단하게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말해주는데 여기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뒤러의 실험실, 바로크시대 및 바움가르텐과 칸트, 그리고 헤겔에 대해서 나온다.
“다방면에 능한 보편인universal man이 르네상스의 이상이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 이상의 실현이었다. 그는 회화는 물론, 조각도 할 줄 알았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학자이자 건축가였고, 또 기술자이자 발명가였다.” p.179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은 예술 활동으로나, 이론 활동으로나 모든 면에서 서로 적대적이었다. 다 빈치가 회화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면, 미켈란젤로에게는 조각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었다. 다 빈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과학적 관찰과 실험에 관심이 있었다면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다 빈치가 자신을 합리적 규칙에 따라 작업하는 과학자라고 생각했다면, 미켈란젤로는 영감에 따라 작업하는 고독한 천재로 의식하고 있었다.“ p.185
"다빈치는 예술의 목적을 외부 세계의 과학적 인식에 두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아름답다고 항상 좋은 건 아니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게 있어서 예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의 창조’에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미와 예술을 밀접히 결합시켰다.“ p.188
어떻게 이 둘이 닌자거북이에서 동료로 지낼 수 있었을까? 어쨌든 그 후에 1525년에 원근법을 증명하는 실험을 한 뒤러의 실험이야기가 나오고 바로크 시대의 푸생과 루벤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점점 이야기는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근대에 이르러서는 미학을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접근하려는 사조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혼자 생각해본다. 물론 계속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답식 서술은 나오지만 그래도 헤겔의 이야기를 할 때 철학적인 접근을 한다거나 단어선택 시에 어려운 말들을 쓴다는 것 등은 지금까지 읽어왔던 책의 중반부까지의 페이스를 떨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는 2권에서 보자-이 책은 3권으로 이루어졌다-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이제 당신은 내가 왜 ‘그리는 손’을 책의 표지로 선택했는지 알았을 거다. 미학의 과제는 미와 예술의 본질을 밝히는 데 있다. 하지만 미의 본질을 밝히려 하자마자, 우린 이 두개의 손과 똑같은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상한 고리’는 예술의 세계에도 있고, 나아가 논리학과 철학에도 있다. 어쩌면 그건 인간의 정신 구조 자체와 관련된 건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우린 에셔의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다음 권에선 에셔의 작품이 지닌 철학적 의미로 초점을 옮기게 된다.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과연 우리가 저 ‘악마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p.291
책이 주제에 비해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았고, 역시 진중권이란 사람이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만한 글 솜씨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또 에셔라는 네덜란드 판화가의 선판이 잊을만 하면 나온다. 그 판화의 내용은 거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가상과 현실을 혼동시키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이 조금 어려워지면 판화를 보면서 머리를 좀 식히라는 작가의 배려같다. 한편 지난 번 의대도서관에서 진중권씨의 놀이와 관련된 책을 빌렸다가 읽지 못하고 반납한 적이 있는데, 이런 식의 글 솜씨라면 재 대출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하지만 아직 읽을 책이 산더미가 되어 나를 억압하고 있는 관계로 근시일내로는 힘들듯). 기억에 다음 구절이 남는다(중간에 넣을 만한 부분이 없어서 그냥 마지막에 덧붙인다).
“플라톤: 아까 말했듯이 인간은 누구나 미를 사랑한다네. 그걸 ‘에로스’라 부르세. 에로스는 슬기로운 아버지와 무식하고 아둔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와 덕과 지혜를 온전히 갖추지 못했어. 말하자면, 반쪽이인 셈이지. 그래서 그는 항상 나머지 반쪽을 갈망한다더군(하략).” p.84
★목차
지은이의 말
글머리에|별밭을 우러르며
원시 예술|가상과 현실 벌거벗은 눈 유희, 노동, 주술 황금가지 - 에셔의 세계 1 피그말리온 - 에셔의 세계 2
고대 예술과 미학|가상의 탄생 오시리스의 땅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 아테네 학당 - 에셔의 세계 3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원형 극장에서
중세 예술과 미학|가상을 넘어 빛과 어둠 아뉴스 데이 - 에셔의 세계 4 돌로 된 스콜라 철학 성당에서 성자의 유혹 - 에셔의 세계 5 장미의 이름
근대 예술과 미학|가상의 부활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뒤러의 실험실 - 에셔의 세계 6 바로크의 거장 에스테티카 - 에셔의 세계 7 파리스의 심판 유리알의 유희 극장에서 정신의 오디세이 - 에셔의 세계 8 카페 앞에서
아름다움에 관하여|아름다운 가상 비너스와 네페르티티 - 에셔의 세계 9 미적 범주들 유클리드와 산책을 - 에셔의 세계 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