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Posted 2008. 8. 22. 01:52, Filed under: Ex-Homepage/Essay

사람들은 힘들 때마다 신을 찾곤 한다. 심지어 무신론자의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는 ‘신’을 찾는다. 시나 소설, 대중가요의 가사에서도 신은 소재로 자주 등장하며 각 나라의 전통문화나 종교 속에서도 신은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브루스 올마이티’란 영화에서는 그러한 신의 모습을 희화화 하고 있는데 그 영화에서 우리는 인간이 신에게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짐캐리가 분한 신의 역할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원 이메일을 받고 그에 대해 판단하며 성취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세계의 수많은 꼬마들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에 관한 이메일을 받거나, 너무 많은 이메일 때문에 귀찮아서 자동응답으로 하려고 했다가 낭패를 당하는 일 등은 아주 재미있는 영화소재였는데 막상 생각해보면 정말로 신이 있다면 그는 그런 종류의 일을 담당할 것 같다고 느꼈다. 조금 덧붙이자면 사람이 죽고 사는 일에 있어서도 업무가 더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돌아가서 정말 신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흔히 복권에 당첨되기를 바라며 신께 기도하던 사람도 낙첨이 되었다고 신을 원망하지는 않으며 설사 당첨이 되어도 신보다는 자신이 타고난 행운, 복에 흥겨워 할 뿐이다. 그만큼 신은 인간 개개인의 희노애락에 있어서는 가변적이기도 한 것이다.

 이 세상을 만든 자는 신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것을 보통 디자인 논증이라고 한다. 디자인 논증이란 세상은 복잡하지만 매우 조화롭게 잘 돌아가는 곳이며 그렇다면 분명 이런 세상을 만든 디자이너가 있을 테고, 그것은 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결과로부터 원인을 유비추론을 통해 도출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유비추론의 과정에 있어서의 오류이다. 유비추론이란 두 개체간의 유사성이 전제되어야만 하는데, 시계나 자동차 같은 일반적인 물품들과 비교하기에 ‘세상’이란 너무 거대하여 상호간에 비슷한 점을 쉽게 끄집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근거로 신의 존재, 적어도 디자이너로서의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 진화론자들이 생각하는 지구와 생명체의 탄생은 오랜 시절동안 개체의 자연선택에 의한 적자생존 원칙의 필연적인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신론자들은 최근 ‘지적설계론’이란 새로운 가설을 신의 존재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다. 지적설계론이란 일종의 ‘과학적 창조론’으로 생명체의 진화를 인정하면서도, 결국 진화의 근원에는 신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 1원인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말이며 그래서 제1원인 논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며 그러한 사실에 대한 원인의 시작이 바로 신이라는 논리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반론은 있다. 신이 그러한 인과의 과정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분명 그 신에 대한 원인 또한 있어야만 한다. 무신론자들은 왜 하필 그러한 절차상에서 ‘신’이란 존재가 마지노선을 이루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렇듯 논리적인 측면에서만 신의 존재를 묻는다면 분명 유신론의 입장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오히려 신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의 측면에서 접근해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이 없다거나 혹은 신은 불완전하다는 가설에 근거를 제공한다. 신이 세상을 디자인했든 아니면 세상의 원인이든, 왜 전지전능한 신이 있음에도 우리는 테러나 범죄, 전쟁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악의 존재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신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이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경우에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이나 친구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강력한 것은 절대자의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매우 나약한 개인이며, 때로는 신이 있어야지만 인간은 나름대로 존재의 목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삶이나 천국과 지옥, 윤회사상 등 여러 종교에서 강조하는 사후세계의 삶은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현재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하는 기도처럼 우리의 소망에 대한 간절함이나 나와 가족의 무사안위를 비는 그러한 행동들은 그것에 응답해 줄 수 있는 절대자의 존재가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기에 신이란 그것이 우주 속이든, 아니면 우리의 마음 속이든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신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다. 신의 존재는 인간의 사고와 언행에 적절한 규범을 제공하기도 한다. 교회나 성당, 절, 사원 등에서 어린이 교육에 관련된 프로그램이 많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종교가 제공하는 것 중에는 한 개인이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라날 때 필요한 가치체계와 개인적인 성장에 필요한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에서는 언제나 절대자의 존재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인간이 모여 살면서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사회문제들이나, 개인이 겪는 육체적, 심적 고통에 대한 마지막 비상구 역시 절대자인 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고대사회에서부터 내려온 절대자의 위상이 과학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많이 쇠락할 수밖에 없었고, 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의 존재가 우리의 일상에서 농담의 소재가 될 정도로 그 신성성이 보편화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설정한 근본적인 신의 존재 이유는 명확하며 따라서 신은 존재한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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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읽고

Posted 2008. 8. 22. 01:51, Filed under: Ex-Homepage/Essay

미디어(media): 매체(媒體). 매개체. 수단. 특히, 전달의 수단이 되는 문자나 영상 따위

 캐나다 출신의 미디어 이론가인 마셜 맥루한은 금세기 최고의 미디어 이론가로서 추앙받고 있다. 그는 1962년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부제:Typographic Man), 1964년 미디어의 이해(부제: Extension of Man) 라는 두 권의 저서의 출간을 통해,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의 사후인 1990년대부터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예언자' 로서 재평가 되고 있다.

 이 책에서 맥루한은 세 가지 종류의 기술 혁신이 인류의 문명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한다. 그 첫번째는 알파벳 문자의 발명, 두번째는 구텐베르크에 의한 활판 인쇄술의 발명, 세번째는 1844년 이탈리아의 마르코니에 의해 전신이 발명된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인류사에 있어서의 기술 혁신에 의해 세상을 인식하는 선형적인 감각의 균형이 깨어지며, 인간의 문화 공간, 심지어는 정치, 경제 등의 분야를 포함한 사회전반까지 그런  미디어가 확장되어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맥루한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의 서술에 있어서 '모자이크적인 서술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을 채택하게 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고대시대 인간들이 사용하던 구어는 인간의 5감 전체를 사용하여 종합적인 감각(그는 이를 통감 또는 촉각이라 표현하였다)의 필요를 통해 의미를 인지해 들어가는 방식이지만, 문자는 종합적 감각의 일부인 시각에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고 중점적으로 의지시킴에 따라 5감의 균형적인 사태가 파괴되고, 최면상태를 필연으로 야기시킴으로서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인식을 제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제한은 사물과 세계의 분절을 야기하고, 표준화시켜 균질성, 획일성, 선형성이라는 개념의 지배 아래 인식의 틀을 고정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맥루한은 문자가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분리성을 막고 복합적이고 감각적인 인식의 방법을 찾기 위하여 모자이크적인 서술방식을 채택하였다고 밝혔다.

 한편 맥루한은 이러한 미디어를 그 '미디어 자체의 정세도'와 '수용자의 참여도'에 따라 '핫미디어'와 '쿨미디어'로 분류하였다. 핫미디어는 정세도가 매우 높은 미디어로서, 메시지의 재구성을 위한 상상력이 투입될 틈이 매우 적기 때문에 수용자의 참여도가 작다. 이는 미디어의 정보와 그 방식이 매우 정교하고, 다분히 조작되어 있기 때문에 수용자의 특별한 노력 없이도 인간의 감각기관이 스스로 반응하게 된다. 맥루한은 이러한 핫미디어의 대표적인 예로서 서적과 영화를 언급하였다. 반면에 쿨미디어는 핫미디어의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정세도가 낮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의 수용자가 메시지를 재구성 할 수 있는 여유가 많아진다. 이에 따라 수용자는 의미의 구성을 위해 상상력을 적극 활용하여 생각하고, 분별하며, 비판, 수긍하는 일련의 피드백 과정을 가지게 된다. 맥루한은 이러한 쿨미디어의 대표적인 사례로 텔레비전을 지칭하였는데, 그것은 텔레비전이 원시시대에 행하여 졌던 청각과 촉각에 의지한 커뮤니케이션의 장을 다시 만들어 내며, 음성언어와 인쇄술이 만들어놓은 불완전한 인간(그는 이를 ‘조각난 인간’이라 표현하였다)을 다시 '전인the Whole Man'으로 복귀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텔레비전을 왜곡된 커뮤니케이션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미디어로서 칭송하였던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서 맥루한은 기술발전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미디어의 변천사와 그를 통한 인간의 인지 방식의 변화, 그 결과 발생하게 되는 사회, 문화적 모습을 고찰하여 지금까지의 세상을 3개의 시대상으로 분류하였다. 그의 책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다양한 논점을 제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가 나눈 시대적 흐름을 언급하면서 그의 주장을 고찰하고자 한다.

1_1.원시부족시대

 원시부족시대는 글자란 것이 없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구두 커뮤니케이션에 의존하였으며, 인간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의 오감을 동시에 사용하는 공감각적형 인간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을 함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감각이 총동원되어 대상을 종합적으로 감각하게 되어 완전한 이해가 가능한 시대였다. 맥루한에게 있어 이는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오감의 조화로운 균형이 발현된 이상적인 사회였다. 그 결과,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대상 그대로를 왜곡없이 인식하게 되고, 맥루한은 이를 '고결한 원시인' 이라 칭송 하였다. 맥루한은 고대 그리스의 호머 등을 예로 들어 청각적 감각이 시각적 감각에 의해 우선되는(맥루한은 청각이 시각보다 우선하는 감각이라 주장하였다) 고대의 이상적인 사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 시기는 구어문화시대로서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언술에의 의존도가 컸고 시각과 청각을 함께 사용함으로서 감각의 균형을 이룬 시기였다. 

1_2. 과도기 (로마중세): 표음문자의 태동

 고대 희랍시대에 음성언어가 생겨나면서 그 동안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던 귀는 눈에게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의 지배적 역할을 내어주게 되고, 감각의 균형은 비교적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눈의 세계로 서서히 옮겨가게 된다. 음성언어는 읽고 쓰는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오감 중 청각에 집중되어 있던 위상은 시각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음성언어의 등장과 함께 시각과 청각의 분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권력이 시각에 서서히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인지에 있어서 오감의 균형적인 상태가 서서히 균열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 강한 구어적 전통이 존재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감각의 균형유지가 가능하였다. 또한 음성언어로 쓰여진 글은 글줄을 따라 내용을 수용자가 주체적으로 이해해야 했기 때문에, 통시적이고 동시적인 사유를 가능케 하였다

2. 구텐베르크 시대(이성적자율적중심화되고 안정적인 개인)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자 구어문화는 매우 빠르게 몰락하기 시작하였고, 문자문화가 폭발적으로 팽창되었다. 문자의 발달과 더불어 인쇄술의 발명은 근대사회를 태동케 한 것이다. 이 시기는 음성언어의 사용과 더불어 시각공간의 형성이 인쇄문화의 등장에 따라 더욱 극단적인 형태인 선형공간으로 바뀐 시기이다. 선형공간은 질서, 분절성 등의 개념에 의존하며,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형식의 변화는 인간집단을 탈부족화 시켰다. 맥루한은 이 시기에 표음알파벳, 인쇄술 등이 모두 시각을 강조하다 보니, 다른 감각은 거의 퇴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파괴현상은 활판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사람들은 책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고, 묵독이 성행하고, 혼자 생각하게 되어 개인주의가 필연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정치적으로 볼 때, 개개인의 '관점'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 결과 이데올로기의 탄생까지 가능하게 하였다.

 맥루한은 인쇄의 특징을 분석적, 단계적, 순차적인 공정을 통한 무한정의 반복성으로 규정하고, 이는 결국 기계화의 원리로서 경제에 있어서 분업 및 전문화, 대량생산과 생산라인 형성을 가능케 함으로써 산업사회를 도래케 한 원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시각적 인식을 중요시하는 미디어(활판인쇄)가 발전함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의 인간은 내성적이고  이성적, 개인적인 인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음성언어를 통한 대화보다 글 읽기가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대체되는 가운데, 부족사회가 와해되고 탈부족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들은 소외되고, 더불어 정서적, 감각적인 생활은 점점 소멸되어 갔다.

 반면에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보다 쉽게 글을 읽을 기회를 접하게 되고, 그에 따라 지식이 증가하게 되어 이성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문명이 자리 잡게 되는 결과도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인쇄기술의 발전은 지방어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모국어로 승격시키고, 이 모국어는 사람들을 결속하는 획일적 미디어의 역할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내셔널리즘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맥루한은 이러한 인쇄문화시대의 인간은 시각에만 편향되어 있는 조각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조각난 인간은 선형적 순차, 일률적 단위를 통한 재해석, 재배열된 이성의 지시에 따라서만 사유한다. 이에 따라 모든 것이 분리되고, 전문화 되며, 예술과 과학, 시와 음악, 사고와 행동이 분리 되는 심리적 파편화를 필연적으로 발생시켰다. 이러한 논리들에 의해 맥루한은 이 시기에 태동한 자본주의, 산업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속주의 등은 모두 구텐베르크 은하계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하며 이것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인쇄술의 등장과 그 결과 파생된 읽기 문화는 합리적, 이성적으로 특징지어지는 서구적 삶의 방식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믿고 수용케 하였다. 맥루한은 이를 문자로 대표되는 시각 의존형 미디어가 인간에게 강요하는 '시각적 공간'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공의 결과물이라 지적하고, '무의미한 추상체로서 문자발명과 함께 시각은 다른 감각들로부터 분리되었고 이는 시각적 공간이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 한다'고 주장한다.

3.전기 전자시대

 19세기 말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전신을 발명하면서 맥루한은 '마르코니의 전신이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를 침식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며, 서구 사회는 내부폭발을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 인쇄형식에서 전자 형식으로 변천하게 되면서,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절대적 형태인 선형공간의 세계는 공명 공간 또는 음향공간으로 변화하게 된다. 전파미디어의 발달은 기존의 인쇄문화에서의 일방통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탈피하여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고 대면교차와 즉각적인 피드백이 가능케 해 인간의 중추신경을 지구의 전역으로 확장시킬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문자시대의 단절되고  분리된 단편적인 파편들을 시공을 초월하여 통합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세계는 지구촌락으로서 사람들은 누구나가 서로서로 관련을 맺게 되었으며, 결국 인간 확장에 있어서의 최종국면까지 이르게 하였다.
 
 서론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맥루한은 인간의 5감을 촉각>미각>후각>청각>시각으로 서열화 하였다. 그는 이러한 전자전기시대는 촉각(공감각에 의해 경험이 교환되어 하나의 이미지로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감각)과 시각 사이의 간격이 좁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전자미디어는 내부 확산적 효과를 일으키는 매체이다. 이는 수용적 미디어로서 조각난 사람들을 퇴행시키고, 단편적인 것 들을 한 군데로 통합시킴으로써 인간을 재부족화게 된다. 맥루한은 전기전자시대의 대표적인 미디어로서 TV를 꼽았다.

 텔레비전의 등장은 시각이나 청각 등의 단 하나의 감각에 의존케 하는 단일감각 커뮤니케이션에 종지부를 찍게 하고 인간의 세상을 인식하는 틀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고 그는 주장한다.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전자미디어는 오감의 사용방법과 반응 방법체계를 전체적으로 변화시켜 결과적으로 인간 전체의 삶, 그리고 전체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능을 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 결과 구텐베르크 은하계 시절 이전의 고대의 잊혀진 청각과 촉각 문화를 되살려 내게 되고 세계를 누구나 서로 관련 맺게 하는 '지구촌'으로 만드는 주역이 된다고 주장한다.


맥루한이 조금 늦게 태어났더라면...

 맥루한의 미디어(매체)론은 한마디로 감각비율에 따른 미디어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가 인간의 사회, 경제, 정치 등의 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를 테크놀로지에 따른 인간감각의 변화라는 측면과 이로 인한 사회의 변화라는 측면으로 설명한다. 오늘날 미디어는 의미의 중립적 전달자의 역할을 추월하여 그 자체가 인간의 의식, 그리고 사고를 형성하는 의미생성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환언하면, 미디어는 인간정신의 구체적 표현인 동시에, 그 자체가 의미 분석의 핵심적 텍스트인 것이다. 미디어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 속에서 그 기능을 한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의사소통 과정에 있어서 단순한 중립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미디어가 달라지면 메시지도 달라지고, 그 결과 수용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바로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의 내용이다. 

 맥루한은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왜곡시킨 미디어로서 인쇄기를, 왜곡된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미디어로는 텔레비전을 예로 들었다. 텔레비전은 낮은 정세도로 인해 시청자의 참여와 보완의 정도가 높은 쿨미디어라고 주장한다. 그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청자의, 정보에 대한 적극적 개입과 보완은 인쇄시대에 갇혀버린 나머지 감각을 부활시킨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많은 부분,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선형적 추론 및 인과관계가 중심적인 요소로 작용하지만 맥루한은 인간의 문화라는 더욱 포괄적인 측면에서의 ‘선형성’은 인간을 기술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맥루한의 주장은 그 찬반이 극명하게 양분되어 있다. '금세기 최고의 미디어 이론가'라는 찬사에서 '바보상자의 도사' 라는 평가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이 책은 사실상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모자이크식 설명은 가뜩이나 난해한 내용을 더욱 이해하기 힘들게 했다. 아마도 본인이 구텐베르크 시절의 선형적 사고방식에 물든 눈으로 하는 독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맥루한의 주장은 논리적 설명이 부족하고 직관과 통찰력에 의존함으로써 매우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들을 수긍하거나 반발할 만큼 본인이 교양인은 못되는 것 같아서 아쉽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소위 말하는 정보화 사회(인터넷 제국)의 도래로 인하여 전사적이고 전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공간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자체가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점점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언급한 ‘전자 매체’란 것이 현재 인터넷이라는 새롭고도 강력한 미디어로 존재하고 있으며 나란 개인은 이미 그 속에 파묻혀 자란 문화적 소시민의 한명이다. 그러므로 산업화와 문예부흥시기를 거치며, 진리인양 선형화된 서구의 가치관 자체가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만연과 더불어 본질을 위협 받고 있는 현 시점에서, 맥루한이 주장한 내용은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예언적 주장이나 많은 예언의 실현들은 미래를 연구함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자료들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가 조금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그래서 냉철한 시각으로 앞으로 다가올 우리 세대가 겪을 미래사회의 모습을 더 심도있게 집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번 독서는 매스미디어라는 거대한 공룡에 잠식되지 않고 그것을 외부에 서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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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XXX님.


님의 글 잘 보고 있는 이 카페 회원 중 한명입니다.

사실 광우병 파동에 있어 크게 관심이 있던 열혈청년은

아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라관대님이 쓰신 글을

보고, 반론까지는 아니지만 몇글자 적어볼까 합니다.



-광우병은 발병메카니즘 조차 밝혀지지 않은 병이다?


http://gene.postech.ac.kr/bbs/zboard.php?id=bric_bs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6


발병메카니즘이 이것보다 더 "완벽"히 밝혀진 병은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완벽히 밝혀진 병이란게 있기나 할런지도..


발병 메카니즘이 잘 알려져 있는 다른 병들에 대한 예는 들지 않겠습니다

(님께서 밝히신 것처럼 의치학쪽 관련 전공이시라면 이미 충분히 님께서

알고 계실테니까요.저 역시 현대의학을 맹신하지는 않지만, 희망을 가지고

보는 입장이며 Pubmed나 해리슨, 세실 등 전문서적을 보신다거나

아니면 과학동아나 대중매체에서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들-요즘은 생화학쪽

이 많긴하지만요-의 업적에 대한 것을 읽어보시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각설하고, 님께서 링크해 주신 Bric의 광우병 토론 카테고리에 가봤습니다.

전 거기의 내용이 광우병의 발병메카니즘이라기 보다는 광우병에 대한 전반적

인 내용과 가설 뿐이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Bric의 신뢰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글의 내용을 보시다시피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로 가능한..."
"해명되어야 하는 문제는..."

"추측컨대..."
"보충.."
"관련논문==>??"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축적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최종업데이트가 5월 24일인데, 중간에 화장품

관련된 FDA의 발표가 있었음에도 업데이트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마 이 페이지

의 관련 글들이 대부분 5월 20일경에 거의 올라온 기본 정보제공용 글들이며

이미 다른 곳( http://gene.postech.ac.kr/bbs/zboard.php?id=note006 )에서 더

따끈따끈한 논의가 있기에 최대한 초기에 관심or 의문이 가는 테마에 한해 글을

'갈무리'해서 올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올해 3월에 출간된 Harrison's Internal Medicine 17ed> Chapter 378. Prion Diseases

에 있는 내용입니다. 중간중간에 xxx님의 의견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대로 올려봅니다.


[Epidemiology


 CJD is found throughout the world. The incidence of sCJD is approximately one case per million population, and thus it accounts for about one in every 10,000 deaths. Because sCJD is an age-dependent neurodegenerative disease, its incidence is expected to increase steadily as older segments of populations in developed and developing countries continue to expand. Although many geographic clusters of CJD have been reported, each has been shown to segregate with a PrP gene mutation. Attempts to identify common exposure to some etiologic agent have been unsuccessful for both the sporadic and familial cases. Ingestion of scrapie-infected sheep or goat meat as a cause of CJD in humans has not been demonstrated by epidemiologic studies, although speculation about this potential route of inoculation continues. Of particular interest are deer hunters who develop CJD, because up to 90% of culled deer in some game herds have been shown to harbor CWD prions. Whether prion disease in deer or elk can be passed to cows, sheep, or directly to humans remains unknown. Studies with Syrian hamsters demonstrate that oral infection with prions can occur, but the process is inefficient compared to intracerebral inoculation.]


이번에는 작년 9월에 출간된 Goldman: Cecil Medicine, 23rd ed.에 있는 내용입니다.

역시 그대로 올립니다.


[Future Directions


 Much is unknown about the nature and properties of the transmissible agent associated with prion disease. Furthering our understanding of these issues will, it is hoped, lead to presymptomatic screening, methods to identify and remove infectivity from biologic and food products, and development of a treatment to reverse or prevent the disease. ]


 즉 잘 모르기 때문에 스크리닝과 동정방법, 그리고 음식에서의 감염성 제거 등에 대해

저자들은 기대를 하고 연구를 진행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을 포함해 전세계적으로 의사들에게 가장 신뢰를 받는 것은

그리고 그들의 진단 및 처방에 근거가 되는 것은

Pubmed에 막 올라온 새로운 논문이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장 대표적인 내과학 교과서입니다.

(제가 알기로 해리슨과 세실이 대표적인데 혹시 아니라면

알려주세요~그리고 굳이 두 책의 출간일을 적은 것은,

보통 내과학책이 나올 때 한 2년(정확하진 않습니다)정도 전의

내용까지를 포함해서 나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2005년이나

2006년에 의사-그래도 가장 전문가라 할 수 있는-집단에서

미래의 의사가 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경전'에

저 내용이 있다는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에 또 적겠습니다)
 


-미국은 안전하다는 과학적 근거..?


http://www.fsis.usda.gov/Science/Risk_Assessments/index.asp


http://www.avma.org/onlnews/javma/feb02/s020102a.asp


2001년에 발표되고 2005년 업데이트된

하버드연구팀의 보고서는 미국은 광우병 안전지역이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연구팀에 의하면 미국은 영국형광우병에 노출되었을 가능성도 낮고

행여 광우병에 노출되었더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생할 환경이 되지 않기 때문에

최대 생존기간을 5년으로 예상했습니다.


물론 하버드도 미국학교니까 믿지는 않으시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행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위해도 분석센터(Harvard Center for Risk Analysis)에서

개발한 모델을 사용한 것입니다(아! 전 하바드 대학교의 연구모델을 믿습니다).


xxx님께서 링크걸어주신 곳에 있는 summary의 내용입니다.

( http://www.fsis.usda.gov/PDF/BSE_Risk_Assess_ExecSumm_2005.pdf )


[We have used the simulation model developed by the Harvard Center for Risk Analysis 
(HCRA)(Cohen 2003a; Cohen 2003b) to evaluate the risk of BSE spreading among cattle in the
U.S. and the potential for humans to be exposed to contaminated tissues.]


그런데 이 연구 결과에 대해서 대한의사협회에서 발표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 http://blog.ohmynews.com/heifetz725/216780 )


[ 2001년과 2005년 하버드 보건대학원의 위해도 분석센터(Harvard Center for Risk Analysis) 연구에서는, 특정 위험 부위를 제거한 육류 섭취의 위해도는 무시할 만한 수준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가급적 30개월령 미만 소의 섭취를 권장하고 있으며, 30개월령 이상의 경우 잠재적인 위해성(potential risk)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하고 있습니다.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부분에 임팩트를 맞춥니다.

그런 와중에 이 보고서가 누구에 의해서 작성이 되었는지(미국 농무부의

후원-논문에서의 후원의 개념-이 있었다는 정치적 입장도 매우 중요하죠)

그리고 그 결과를 해석할 때 있어서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도

정치경제적인 문제가 복합되어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참고로 초기 우왕좌왕하던 대한의사협회의 성명서에서는 전반적인 결론을

이렇게 내고 있습니다.


[질문 10. ‘사람광우병’(vCJD)의 예방대책은 무엇입니까?

 소광우병과 ‘사람광우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과 보다 확고한 감시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소광우병과 ‘사람광우병’ 환자가 발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장, 뼈 등도 식재료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식습관을 고려하면 향후 ‘사람광우병’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합니다.
‘사람광우병’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국내 소광우병 발생을 예방하고, 쇠고기에 대한 완전한 검역 등 관리 시스템을 수립해야 하며, 국내의 사람 및 동물들에 발생하는 모든 프리온질환에 대한 체계적인 감시 및 추적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


 이 문제에 대해 정치적인 입장을 최대한 지양한다고 작정하고

발표한 의협의 발표는


[...이에 대한의사협회는 의학적으로 정확한 정보를 국민에게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런 식으로 살살 빠져나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전 미국이 정말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언젠가 여기 비스게에 나왔던 것처럼, 그냥 워낙에 복잡하고 다양한 의견이

많으니까 아니 좀더 정확히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광우병에

많기 때문에 경험에 의존하여-'설마 나겠어?'-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나요?


옆나라 일본을 보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독도문제 등은 어이없지만)

광우병이 발생했을 때 그들이 대처한 방식과 지금 수입조건을 봐도

그렇지만 일본 내부적으로도 자국의 소와 미국에서 수입한 소에 대한

비교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입니다. 그들만의 더 안전한 가이드라인을

정하기 위한 수순인 것이죠.

(http://www.ncbi.nlm.nih.gov/pubmed/18468036?ordinalpos=4&itool=EntrezSystem2.PEntrez.Pubmed.Pubmed_ResultsPanel.Pubmed_RVDocSum )


우린 아직 광우병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아마 발생한다고 해도 분명

일본식의 대처방안이 나올 가능성은 현 정부에선 희박해보입니다.

그렇다면 발생하기 '전'에 뭔가 해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대처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문갑네 하는 사람들도 논문몇편 읽고 발췌하는 정도...?


필요한 논문을 제깍제깍 찾아서

내용을 이해/발췌할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논문 한편 찾아 읽는데 죙일 걸립니다..

평생 과학논문 한번 안 읽어본사람들이 선무당 잡는소리 하면서

이런 이야기 하는건 좀 웃긴거죠..


물론 저도 '전문갑네 하는 사람들도 논문몇편 읽고 발췌하는 정도...?'라는

발언이 좋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어투의 차이일 뿐이지


"아직 광우병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알려진 사실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습니다. 저 댓글을 쓰신 분이

meta analysis를 아실 것 같지는 않아서요.



-광우병은 5년안에 사라질것인가...?


 광우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우려하고 있는,

영국을 발발 기점으로 한 광우병은 수 년 이내에 사라질 질병이라는 것은 확률높은 예측입니다.


이 광우병들의 다른점들을 헷갈리기 쉬워서 광우병공포가 확대재생산 되는거 같은데...

같은 광우병이라 하더라도 영국에서 만들어진 육골분 사료가 원인이 되는 광우병과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자연발생하는 광우병은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무작위로 발생하는 유전병인 자연발생광우병,

다르게 말하면 L-strain 프리온은 인간에게 전염성이 불가능에 가깝다는게 낮다는게 과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참고로, 현재 미국에서 발생한 광우들은 모두 자연발생광우로 보고되었습니다.

현재로썬 미국소와 영국광우를 이어줄 연결고리가 입증된것이 없습니다.)


또한, 현재 세계적으로 육골분 사료 금지를 통해서 더 이상 재순환이 지속될 수 없는 상황에서

영국과 같은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이것은 일부 과학자들의 판단이 아니라, 사리분별을 할줄 아는 사람이라면 전부 내릴수 있는 결론입니다.


예를들어, 어떤 학교에서 상한우유급식을 통해 대대적인 식중독이 발생했다 가정합시다.

우유급식을 중단한다고 그 아이들이 식중독에 걸릴가능성이 영영 없어집니까?

아니죠. 하지만 우유로 인해 전교생에게 유행처럼 식중독이 퍼질 가능성은 0에 가까워지는거죠..


제가 가장 의문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연히 외국의 여러 의학저널을 보다가 미국에서 발생된 광우병에 대한 연구를 봤습니다.

( http://www.jvdi.org/cgi/content/full/19/2/142 )


간략히 abstract와 결론의 일부만 따왔습니다. 2007년에 발표된 것입니다.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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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urces and manufacturers
 Abstract
 Introduction
 Material and Methods
 Results
 Discussion
 References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BSE) is a transmissible spongiform encephalopathy of cattle, first detected in 1986 in the United Kingdom and subsequently in other countries. It is the most likely cause of variant Creutzfeldt-Jakob disease (vCJD) in humans, but the origin of BSE has not been elucidated so far. This report describes the identification and characterization of two cases of BSE diagnosed in the United States. Case 1 (December 2003) exhibited spongiform changes in the obex area of the brainstem and the presence of the abnormal form of the prion protein, PrPSc, in the same brain area, by immunohistochemistry (IHC) and Western blot analysis. Initial suspect diagnosis of BSE for case 2 (November 2004) was made by a rapid ELISA-based BSE test. Case 2 did not exhibit unambiguous spongiform changes in the obex area, but PrPSc was detected by IHC and enrichment Western blot analysis in the obex. Using Western blot analysis, PrPSc from case 1 showed molecular features similar to typical BSE isolates, whereas PrPSc from case 2 revealed an unusual molecular PrPSc pattern: molecular mass of the unglycosylated and monoglycosylated isoform was higher than that of typical BSE isolates and case 2 was strongly labeled with antibody P4, which is consistent with a higher molecular mass. Sequencing of the prion protein gene of both BSE-positive animals revealed that the sequences of both animals were?within the range of the prion protein gene sequence diversity previously reported for cattle.

Key Words: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 cattle • immunohistochemistry • Prnp gene • Western blot


(중략)


It is concluded from the studies reported here that 1) the PrPSc profile from the first US BSE case showed similar molecular properties to the typical PrPSc pattern described for the May 2003 Canadian and European BSE isolates,45 and 2) the PrPSc profile from the second US BSE case showed unusual molecular properties similar to atypical high molecular weight BSE cases reported in France and Germany.5,9 Both cases were identified by the USDA surveillance program in place and the carcasses did not enter the human or animal food chain. IHC staining in brainstem sections for an unusual high molecular BSE case is described here for the first time. A germline mutation as an etiological possibility for the disease conditions of both cases can be most likely ruled out. Future work will address the question whether brain material from both US BSE cases are infectious in cattle after intracerebral and oral inoculation. ] 


생화학적인 방법론을 떠나서, 결론부분의 1)에 나와있는 참조문헌 45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45. Stack M.J., Balachandran A., Chaplin M., et al.: 2004, The first Canadian indigenous case of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BSE) has molecular characteristics for prion protein that are similar to those of BSE in the United Kingdom but differ from those of chronic wasting disease in captive elk and deer. Can Vet J 45:825–830. ]


그리고 위 논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 http://www.ncbi.nlm.nih.gov/pubmed/15532881?dopt=Abstract )


제가 하고픈 말은 xxx님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많은 공신력 있는 연구자와 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바드의대의 A교수의 의견과 동경의대 B교수의 의견이 다를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지금 논의되는 광우병문제이며 누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긴 어렵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온 국민이 알다시피 그렇게 광우병이 위험하다면,

그 병에 걸릴 가능성을 확률을 근거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아예 그 가능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최소화하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의사들의 내과학 교과서인 해리슨에 나온 말입니다.


[Prevention and Therapeutics


There is no known effective therapy for preventing or treating CJD. The finding that phenothiazines and acridines inhibit PrPSc formation in cultured cells led to clinical studies of quinacrine in CJD patients. Although quinacrine seems to slow the rate of decline in some CJD patients, no cure of the disease has been observed. In wild-type mice, quinacrine treatment has been ineffective. Recent studies indicate that inhibition of the P-glycoprotein (Pgp) transport system results in substantially increased quinacrine levels in the brains of mice. Whether such an approach can be used to treat CJD remains to be established.

Like the acridines, anti-PrP antibodies have been shown to eliminate PrPSc from cultured cells. Additionally, such antibodies in mice, either administered by injection or produced from a transgene, have been shown to prevent prion disease when prions are introduced by a peripheral route, such as intraperitoneal inoculation. Unfortunately, the antibodies were ineffective in mice inoculated intracerebrally with prions. Several drugs, including pentosan polysulfate and porphyrin derivatives, delay the onset of disease in animals inoculated intracerebrally with prions if the drugs are given intracerebrally beginning soon after inoculation.

Structure-based drug design predicated on dominant-negative inhibition of prion formation has produced several promising compounds. Modified quinacrine compounds that are more potent than the parent drug have been found. Whether improving the efficacy of such small molecules will provide general methods for developing novel therapeutics for other neurodegenerative disorders, including AD and Parkinson's disease as well as 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ALS), remains to be established. ]


의학계에선 아직 해결책이 뚜렷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니 해결책이 언젠가는 나오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그 병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그 해결책이 나와도 금방 변종이

또 나타날 것입니다. 의학계에서 항상 그래왔듯이...)


또다른 내과학 책인 세실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Treatment


No medication has been shown to alter the course of genetic, sporadic, or variant CJD. Information on patient care and infection control issues has been published by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and is available at http://whqlibdoc.who.int/hq/2000/WHO_CDS_CSR_APH_2000.3.pdf ]


그만큼 의학계에서는 난제인 것이고

그러므로 광우병-그것이 영국에서 나타나건 아님 어디서 나타나건-이 5년안에

사라질 가능성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xxx님, 제가 계속 님 글에 드렸던 질문인데

'5년안에 광우병은 사라질 것이다'라는 근거가 있는 논문이나 링크를 좀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광우병은 5년안에 사라질것인가? 2


광우발생보고는 급속한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피크였던 1992년엔 37,316건이 었다가,

15년만에 약 300분의 일 수준(141건정도)으로 줄어들었고  

올해(08)는 현재까지 23건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언제 완전히 사라질것인지는 모르지만 급격한 감소추세라고 봐야죠..


잠복기간이 긴걸 감안하면,

광우병 발병자는 앞으로도 종종 나올수 있겠지만,

새로 광우병에 걸리는 사람들의 수는

광우의 수와 비례해 줄어든다고 봐야 합니다..


광우발생보고가 급속한 감소추세를 보이는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해석차가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팩트만을 따진다면 감소추세는 맞습니다. 하지만 또 다시 이런 의견도

있습니다. 해리슨에 있는 말입니다(맨 첫인용에 있는 말이지만 다시 씁니다.


[ CJD is found throughout the world. The incidence of sCJD is approximately one case per million population, and thus it accounts for about one in every 10,000 deaths. Because sCJD is an age-dependent neurodegenerative disease, its incidence is expected to increase steadily as older segments of populations in developed and developing countries continue to expand.]



-미국의 사료제한


97년부터 최근까지 합리적인 대책이 될수준의

육골분사료제한을 해온게 사실입니다.

광우병발생 가능성을 사실상 0으로 보게되고,

농부들이 생산성저하를 호소하여

최근에 국제기준에 미흡한 사료정책으로 후퇴했지만요..


또한, 미국의 사료정책은

내년부터 다시 OIE권고에 맞춰 업그레이드 될 예정이며

그때까지 30개월령 쇠고기의 한국수출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미국농무부 대변인 같다고 한소리 들을랑가요.. ㅋㅋ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그나마 안심시켜준 후속책인데요,

얼마전 한승수총리께서 하신 말이 생각납니다.


[한승수 총리는 18일 한미 쇠고기 협상과 관련, "미국이 일본, 대만을 상대

로 진행중인 쇠고기 협상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다"며 "만일 우리와 다른

조건으로 협상한다면, 그 조건을 검토해 우리보다 좋을 경우 당연히 개정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http://kr.blog.yahoo.com/badasok2004/1381723)


본인이 하신 말을 꼭 지키시길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꼭 바랍니다.

그런데 저 결과는 언제 발표되는 것인지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국이 또 새로운 기준에 자신들의 이익을 가져다 붙이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며 로비를 할지는 안봐도 눈에 선하지만 팩트에 근거해서 하나 더

인용하겠습니다. 해리슨에 있는 내용입니다.


현 상황에서 과학적으로 가장 안전한 것은,

오염된 고기가 사람의 식탁에 올라서는 안된다는 것 입니다.


[Variant CJD


The restricted geographic occurrence and chronology of vCJD raised the possibility that BSE prions have been transmitted to humans through the consumption of tainted beef. More than 190 cases of vCJD have occurred, with >90% of these in Britain. vCJD has also been reported in people either living in or originating from France, Ireland, Italy, Netherlands, Portugal, Spain, Saudi Arabia, United States, Canada, and Japan.

Because the number of vCJD cases is still small, it not possible to decide if we are at the beginning of a prion disease epidemic in Europe, similar to those seen for BSE and kuru, or if the number of vCJD cases will remain small. What is certain is that prion-tainted meat should be prevented from entering the human food supply.

The most compelling evidence that vCJD is caused by BSE prions was obtained from experiments in mice expressing the bovine PrP transgene. Both BSE and vCJD prions were efficiently transmitted to these transgenic mice and with similar incubation periods. In contrast to sCJD prions, vCJD prions did not transmit disease efficiently to mice expressing a chimeric human-mouse PrP transgene. Earlier studies with nontransgenic mice suggested that vCJD and BSE might be derived from the same source because both inocula transmitted disease with similar but very long incubation periods.

Attempts to determine the origin of BSE and vCJD prions have relied on passaging studies in mice, some of which are described above, as well as studies of the conformation and glycosylation of PrPSc. One scenario suggests that a particular conformation of bovine PrPSc was selected for heat resistance during the rendering process and was then reselected multiple times as cattle infected by ingesting prion-contaminated meat and bone meal (MBM) were slaughtered and their offal rendered into more MBM.]



-나의 결론


정 광우병에 걸리시고 싶으시다면요...

광우병, 그중에서도 영국식 H-strain프리온을 가진 광우병에 걸린 소만을 골라서

살코기 약 5톤 혹은 SRM 약 50킬로그램(대략 소 천마리분)을

삼일안에 다 먹을수 있으시면 50%의 확률로 인간광우병(vCJD)에 걸립니다..


어떻게든 광우뇌를 구해서 날로 먹지 않는한은 걸릴래야 걸릴수가 없는 병이에요..광우병이란게..


요건 물론 일차감염 이야기고, 이차 삼차까지도 가능성은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영국외의 나라들에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봐도 되죠..

일단 일차감염된 사람이 쫌 있어줘야 이차 삼차를 걱정하죠...


"과학에 절대란건 절대 업ㅂ어" 라고 말하지만,


미국쇠고기 먹고 광우병 걸릴사람은 절대 없을거 같습니다..


xxx님도 그동안 많이 조사하시고 글 올리시느라 힘드셨을텐데

(지금 저도 해보니 이게 쉬운 일은 아니군요)

이런 식의 결론은 별로 좋을 것이 없다고 봅니다. 설사 미국산 쇠고기

먹고 광우병 걸릴 사람이 절대 없더라도 말이죠.


저도 광우병이 안걸릴 것이다란 님의 의견에 많이 동의합니다.

그러나 꼭 미국이 아니더라도(미국도 물론 포함해서) 그 사육과정이나

유통과정에서 뭔가 꺼림직한 것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완전 의학/과학적으로 까발려 져야 그제서야 미국산 쇠고기 먹을

것이냐?!라고 하신다면,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지나간다면

즉 촛불시위가 서서히 없어지고 사람들이 무덤덤해 진다면..

이런 경우 일본처럼 제도적인 보완장치가 없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간

의 악덕 정치인/상인들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문제가 있는" 고기가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검역주권과 공문화

된 계약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유능하고 양심적인 학자(정치인은

포기했습니다)'가 아닐까요?


한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 학계-아마도 수의학계가 되겠죠?-에서도

관련된 연구를 진행해야 합니다. 괜히 다른 나라로부터 '쇄국주의'라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이제 한우도 화두에 올려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걱정도 됩니다. 다른게 아니라 그만한 시간과 비용을 누가 감당해야

하는지요).


============


몇몇분들과 대화를 하다보며,

갑갑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했던게 사실이었는데요..


제일 당황스러웠던건 역시

"아직 확실히 아는건 아니니 위험요소로 판단"하겠노라던 분들이었죠..


이건 맞다고 봅니다.

위험의 수위를 어디까지 조절하느냐는 개인에 따른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일반인들에게는 당연하다고 여겨지구요.


"확실히 알고 싶은 노력을 얼마나 하고계시는지"에 대한의문은 일단 접어두고요..



다시한번 말하지만, 확실한건 없습니다.. 적어도 생물학에서는요..

하지만 어느정도의 확률이 되면 편의상 인제 이걸 안전하다고 판단하는거죠.

이런 현실적인 안정성의 밸런스를 잡는건 전문가들의 몫이에요.


어딘가에서 본내용인데요..

산부인과에서 선척적 기형아 출산확률이 250분의 1을 넘으면 위험하다.. 고 판정합니다.

그래서 산모에게 통보하고 방법을 모색합니다.


기형아 출산확률이 한 만분의 일 되면,

이건 우리가 생각할땐 어쨌든 위험한거라 생각할수 있지만,

의학적으론 위험하지 않은겁니다.

의사는 신이 아닙니다. 의학적으로 위험하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산모가 이사실을 알게되면 걱정해 환장하겠죠..

입장을 바꿔서, 님의 아이가 만분의 일로 기형아가 될것입니다.. 하면 어떠시겠어요..

일만분의 일이지만 이게 꼭 나한테 일어나면 어떡하나.. 사람 미치겠죠..


하지만 의사들은 이걸 "안위험하다"고 판단합니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합니다.


그럼 안위험한거에요. 

그런게 어딨냐구요? 

생물학이란게 다 그래요..


위험요소가 "절대없다"란 있을수 없는 일이고, 

특정한 위험요소가 일반적인 위험요소보다 

크지 않으면 이건 "위험하지만 위험하지 않다"라고


모순된, 하지만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겁니다..


결국 하나의 명제에 대한 상반된 해석이 여기 비스게에서 광우병

토론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어느 토론이라도 마찬가지겠지요).


매우 희박한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판단은,

분명 존중되어야 합니다. 예전에 베르캄프가 비행기 사고가 두려워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고 했던 기사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의 생각을 존중해줬습니다.

저 역시 좀 우습긴 했지만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분명 그 비행기가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매우 적은 확률이지만 가능

성은 있습니다. 통일교 문선명씨의 헬기도 불시착 하잖아요?


그렇다면 그러한 우려 및 걱정은 반드시 존중받아야하며

그것이 일반 국민들, 개인의 힘으로는 정말 어쩔 방법이 없는 일반 소시민들

이 모여서 그 의견을 개진하더라도 나라에서는 그것을 항상 고려해야만 합니다.

(제가 촛불집회에는 직접 참여해 보진 않았지만, 촛불집회를 대단하다고 여기

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할말은 다 한거 같고,

아니 실은 진작에 다했지만 

지금까지 말을 해도 소통이 안되는 부분은

앞으로 영영 안될거란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래도 비스게에 xxx님같은 분이 계셔서 건전한 토론이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지만

꼭 그것이 100%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그니까 님이 진심으로 졌다고 생각하셨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후의 xxx님의 글들은 그냥 생략했습니다.^^;


사실 과학을 맹신할 수는 없습니다.

광우병처럼 아직 과학적으로도 모르는 것 투성이고

상극의 의견이 대립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1. 과학/의학적으로 의심스러우면 우선 보류,

2. 사회경제적인 위치에서 논하자면 적어도 다른나라(까다로운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는)의 기준에는 부합하는 수입조건,

3. 우리나라에서 가질 수 있는 권리-검역주권 포함-를 확보


이 3가지가 보장이 되면, 맘놓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맨날 비스게 눈팅만 주로 하는데, 가끔 댓글 달구요...

이번에는 너무 궁금했기에 검색 좀 해보고 길게 글 남겨봅니다.


p.s.

제가 즐겨 찾는 다움카페의 게시판에 올린 글입니다.
사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하다보니까 토론 중간에 끼어들게 되었네요.
제가 글을 쓰기 위해 투자한 시간만큼 나름 유익한 공부였습니다.

Response : ,

2005년 1학기, 수화를 배우다.

Posted 2008. 8. 21. 16:23, Filed under: Ex-Homepage/Essay

2005년 1학기 교양으로 '수화'수업을 들었다. 흥미를 가지고 접근한 수업이었고 실제 배우고 시험보고 그럴때는 힘든 면도 없진 않았지만 학기가 끝난 지금 돌아보면 참 재미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는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자란 평범한 한국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여러 기대에 부풀어 산다. 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는 꽤 오래된 늦깎이 신입생이지만 비슷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일어나 불어 같은 제2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강신청 기간에 이 수업을 선택했다. 수화가 나 같은 청인에게는 또 다른 제2 외국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수화가 청인과 농인 사이의 제2외국어란 생각을 가지고 접근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수화란 의사소통의 도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대한민국에서 조차도 미국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써야만 한다는 우리나라 사람의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필요와 국력의 논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언어문제에서 수화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를 익혀 서로가 소통할 순 있지만, 농인들과 구두로 소통하기 위해선 청인들이 수화를 배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농인과 ‘농인이 아닌 사람들’로 구성된 이분화 된 사회는 마이너리티로써의 농인의 권리와 의식을 억압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비단 농인과 청인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러 기준에 따라 누구나 다수와 소수의 입장에 서게 되니까 말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농인에 대한 청인의 편견이다. 나 역시 그러한 고정관념이 없다고 부정하진 못한다. 이미 청인들만의 세상에서 20년이 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그들과 교류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편한 것도 없었고 그래서 무관심했다. 바로 다수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만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농인의 입장에선 이러한 상황이 넘기 힘든 큰 벽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농인을 포함한 많은 장애우들에 대한 배려와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기엔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는 후진국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링컨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위해 내전을 겪어야만 했고, 마틴 루터 킹 박사와 말콤 X는 흑인해방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지만 아직도 인종 차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종속에서 대등으로의 관계로 진보한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측면에서 기득권층과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갈롯데 대학의 신임총장 선임문제도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이자 선진국의 하나인 미국에서조차 저렇게 걸음이 더딘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과연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일까?


농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소수의 입장에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다. 그것은 농인들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에게 그러한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은 무관심한 청인들에게도 분명 잘못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차 농인 스스로가 그들의 권리를 찾고자 목소리를 높여 간다면, 분명 우리 사회도 변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운동에 청인들 또한 참여해야만 하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함께 사는 사회이자 이상적인 공동체에 한발 더 다가가는 모습일 것이다.



 언제나 세상은 청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 역시도 그 사회에서 ‘非농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 면에서 비욘드 사일런스의 라라는 쉽게, 아니 거의 볼 수 없는 특별한 케이스의 생활로, 나에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非농인’이 소수자일 경우에 느낄 수 있는 점을 암시해준 흥미로운 영화였다.


 처음에는 농인의 삶이 우리의 삶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란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평범한 가족의 삶이 펼쳐지는 영화를 보며 농인들은 단지 의사소통에 약간의 문제가 있을 뿐이며 사회의 제도적이고 능동적인 뒷받침만 있다면 충분히 그들도 ‘우리’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능력이 있으며 단지 사회로부터 배려 받지 못했기에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래 그럼 이제부터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여기고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권리와 의무를 주자..’, 이런 생각을 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조금 여유가 생겨서 였을까? 친구를 만날 때나 혹은 수화 수업을 같이 듣는 친구들이 포함된 자리에서 가끔 수화로 대화를 해보고 또 수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곤 했다. 사실 대화라 해도 내가 배운 내용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제한된 의사소통만이 가능했지만 그러한 단순한 움직임, 즉 느낌을 최대한 살린 제스처 하나 유추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확실히 우리 사회의 다수가 농인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십중팔구 수화를 보면 마치 신기한 율동을 하는 것처럼 마냥 재미있어만 했다. 그리곤 ‘사랑, 학교, 대한민국’처럼 흔히 사용되는 단어를 수화로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곤 했다. 차라리 지문자를 물어봤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그들과의 괴리감이 생긴 것 같아 씁쓸했다. 그들 대부분에게 수화는 단지 ‘율동’에 불과했으며 결정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농인문화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혈안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힘의 차이에 대한 이런 암묵적인 동의가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선진화된 모습을 배우고 익히는 자세에는 조국 대한민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것에 가장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농인의 역할이 드러난다. 농인을 포함한 많은 장애우들이 세상과는 고립된 상태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이유로부터 연유되었든 간에 결과적으로 농인들은 계속 사회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인들이 시작해야 한다. 갈로테 대학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약자가 존재한다. 인종, 장애, 국적, 성별 등을 통한 차별에서 가장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위'를 향한 저항일 것이다. (저항이란 말을 쓴 것은 그것이 그만큼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권리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노력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표현이 선행 되어야만 청인사회에서도 그들에게 귀를 기우릴 것이다. 따라서 나는 농인과 청인이 공존하기 위해선 그들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청인이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사실 이 사회를 이루어 온 것은 대부분 청인들의 몫이었으며 특히 소수집단인 파워엘리트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가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사회란 구성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그러므로 구성원 개개인이 가진 권리는 보장해줘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인이 나서서 그들에게 교육과 문화, 취업 등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소외받지 않게 배려를 해줘야만 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직장에서 장애우 들에게 쿼터제를 적용하고 의료기관, 교통시설, 공공기관 이용시 불편함을 최소화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농인과 청인의 유토피아가 만들어 질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청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벨의 모습과 농인의 입장에서 본 벨의 평가가 큰 이견을 보이듯 지금까지 말했던 방식을 통한 사회통합은 자칫 농인과 청인 사이에 더 굵은 경계를 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청인이 농문화를 먼저 이해하고 나서 동등한 인간으로서 농인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왜 청인만이 농문화를 이해해야 하고 농인이 청인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냐고 말이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현재 사회의 주류문화는 농인을 비롯한 비주류에게 가혹할 만큼 무관심하며 이미 농인들이 그 사회로부터 많은 불평등을 겪어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농문화가 형성될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청인들이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우리 사회를 합치는 작업 역시 청인들에게 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농문화를 이해하고 또 그들을 이해하며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아무리 양쪽에서 각자 노력한다고 해도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수화를 배운다는 것은 농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언어에 있어서 그들은 객관적인 약자이기 때문에 청인은 수화를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의학, 공학의 발달로 청력장애에 대한 예방과 치료 및 청력개선도 가능하겠지만, 이미 그들의 문화가 형성이 되어있는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수화도 언어로 인정하고 더 많이 보급할 제도적인 장치와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그 다음으로 그들도 청인과 같다는 ‘동등성’에 대한 인정이 농문화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선 저런 면들을 볼 수 없다. 농인들도 여전히 웅크리고 있으며 청인사회도 무관심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란 영화나 ‘리얼’이란 일본만화 등 장애우들의 삶을 다룬 문화 컨텐츠가 늘어, 일반인의 농인을 포함한 장애우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시금석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먼저 서로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니 내가 한 학기동안 수화를 배우며 겪은 세 가지 단계가 있었다. 처음에는 수화를 통한 농인과의 유창한 대화가 가능할 정도까지 수화를 익히고 싶었다. 나름대로 노력도 하면서 수화를 익혔지만 냉철하게 지금의 내 수화실력을 평가해보면 필수적인 회화를 조금 할 수 있고 농인이 (의도적으로 천천히) 수화를 해준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인 것 같다. 이렇게 처음 생각에 약간 모자랐던 두 번째 단계를 거치며 다음 레벨을 생각해 봤다. 그것은 아마 학기 초에 가졌던 수화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습관화 하여 앞으로 계속 그것을 익혀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화도 언어로 인정을 한다면 그건 한학기 동안 내가 수화를 마스터 할 수는 없다는, 즉 살아가면서 쭉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화를 배움에 있어 딱히 의도적인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외국어에 관심이 있는 여느 친구들처럼 단지 수화에 대한 관심, 농인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하고 나면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지금까지 살면서 무관심 했었는지 반성해 본다. 또 내가 배우는 수화가 농인과의 의사소통 수단만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농인과 내가 친구가 되기 위한 단순한 다가섬이며 그들이 아직까지는 청인의 ‘말’을 들을 수 없기에 내가 당연히 ‘수화’를 배워야 하는 거라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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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널드화와 어플루엔자

Posted 2008. 8. 21. 16:22, Filed under: Ex-Homepage/Essay

*이글은 2004년도 교양수업 '미국문화와 예술'을 들을때 쓴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입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란 책과 '어플루엔자'라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의견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두 책은 모두 미국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저자들이 비인간화 및 소비중독에 대한 현재 사회의 모습을 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수업 이후에 제 나름대로 패스트푸드와 여러가지 쓰잘데기없는 낭비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데요.....실제로 알면 보인다고, 그렇게 생활패턴을 조금씩 바꿔가니 돈도 절약되고 시간도 아낄 수 있고 일석이조였습니다. ^^ 내용이 그렇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이 글을 읽어보시면 자신의 귀한 자산인 시간과 '돈'이 조금씩 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바꿔보는건 어떨까요?




 3월에 개강을 하면서부터 집에 있는 시간이 부쩍 줄었다. 같은 서울 안에 있지만 학교가 꽤나 먼곳에 있는 이유로 아침에 집을 나오면 밤 늦은 시간에나 집에 돌아간다. 당연히 집은 종종 비게 되는데 그때 가장 귀찮은 문제는 택배를 받을때 생긴다. 언제부턴가 나는 발품을 파는 수고를 덜고 가격 면에서도 조금 싸게 살 수 있는 온라인 쇼핑몰을 자주 이용하곤 한다. 그런데 택배는 도착하는 날짜를 알 수는 있지만 정확한 배달시간을 알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오기로 한 날은 물건을 받기 직전까지 매우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물건을 사면 살수록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 한가지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새로운 종류의 스트레스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물건을 왜 산것일까? 내가 소비를 하는 이유는 그 물품이 꼭 필요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필요를 넘어서는 지출을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는 ‘행복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물건을 산다. 그러면 정말 그것을 사니까 행복한것일까? 굳이 물건의 전달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문제점들이나 의미없이 쇼핑몰을 방황할 때 생기는 시간적인 소모를 들추지 않아도 ‘나는 그것을 구입해서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꽤나 깐깐한 고객이라고 자부하지만 한두번만 더 캐물어 볼때 나는 쓸데없이 돈을 낭비한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없었다면 모든 문제들 그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골치덩어리의 여러 속성과 발생 과정 등을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와 ‘어플루엔자’, 이 두책은 내용면에서는 가볍게 여길만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다른 사회과학서적들과는 달리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많은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내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는 맥도날드화를 일종의 비정상적인 합리화의 패러다임이라고 정의한다. 처음 읽을 당시에는 이름 자체부터 쉬워보인 맥도날드화였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그리 만만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맥도날드화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적으로 합리화가 가지고 있는 효율성 등의 장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 사회와 그 밖의 세계의 많은 부문에서 현대문명의 ‘악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맥도날드화는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방식으로 번지는데 그는 그것을 합리화 과정에서의 한 단계로 보고 있다. 그는 합리화의 궁극의 모습이 관료제라고 여겼던 막스베버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얼핏 생각하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나치의 유대인대학살,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 포드의 컨베이어시스템, 레비타운, 쇼핑몰 등을 차례대로 설명하면서 그러한 것들이 현재의 맥도날드화가 나타난 배경이자 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합리화 단계의 할아버지격인 관료제를 언급할때는 베버가 우려했던 ‘철장감옥(Iron Cage)'이라는 합리화의 부정적인 언급하며 현재의 맥도날드화가 그때 그 시절의 철장감옥의 변형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철장감옥이 의미했던 것은 사회 전체가 합리적 제도로 이루어진 빈틈이 없이 견고한 그물망, 즉 감옥이라는 것인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현대인들은 더욱 단단해진 감옥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교육, 스포츠, 정치, 종교 등의 사회 전 범위에 걸쳐 있다니 이건 감옥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교도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얼핏 생각해보면 ‘합리’라는 말이 그리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반적으로는 좋은 의미로 쓰이는 경우를 많이 볼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우리와 우리 사회가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 책을 읽을때는 곳곳에서 거부감이 들거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주장들을 볼수 있었는데 그것 또한 습관처럼 일상을 살아온 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합리화의 오류는 무엇일까?

 우선 저자는 합리화 자체는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만들지는 몰라도 사람 자체는 바보로 만든다고 한다. 에코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야만이 그 지배가 수월하다고 했는데, 합리화는 어딘가에 숨어있는 빅브라더들이 인간을 지배하기 용이하도록 해준다. 합리성과 관련하여 조금 더 맥도날드화의 특성을 분류해 본다면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그리고 통제라고 볼수 있다. 형식적 합리성의 전제조건인 효율성과 ‘양=질’이라는 희한한 등식을 성립시키는 계산가능성 및 시스템적인 자동화로 고객을 통제하는 일 등은 각기 나름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고 있다.

 맥도날드화는 최대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덩달아 패스트푸드점에 익숙해진 살마들은 그들의 삶에 모든 분야에서 또한 효율성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효율적’이라는 말 자체의 어감은 현대인을 좀더 세련되고 살아가는데 적합한 인간형이라는 뉘앙스를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질에는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묻는다면 또 궁금적인 효율 모델만을 찾아 올라갔을때 그 결말이 어떤 모습일지를 묻는다면 우리의 합리화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알수 있다. 뿐만아니라 효율이라는 미명아래 감추어진 지극히 잘못된(그러나 쉽게 인식할 수는 없는) 비효율적인 사항들, 예를 들자면 고객의 선택의 폭을 좁게 만들고 또 그들로 하여금 부수적인 일등을 하게 시키는 따위의 일들을 현대인이 당연한 듯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면 효율성 자체에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큰 장점만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셀프서비스는 마치 우리의 의무가 그 서비스의 과정에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단지 상황에 익숙한 소비자들이 무감각해서 그렇지 따지고보면 이미 우리가 지불한 돈에는 서비스에 대한 비용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소비의 주체인 고객의 권리와 의무가 혼동되기 쉽다. 그러면 가장 기본적인 소비자의 권리인 ‘만족’이 침해를 받을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인간은 사회시스템에 종속되어간다. 맥도날드화를 우려하는 글쓴이는 그러한 폐해가 대학사회, 의료기관, 오락 등 어느 분야에서도 예외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효율성은 비인간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고객이나 종업원을 대할때는 한 가족처럼 여겼던 예전의 개념이 사라졌다. 자동화에 따른 단순노동직의 증가와 비정규직의 증가, 저임금 체계의 만연은 지금도 문제이지만 종국적으로는 소유자에 의한 인간지배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뿐만아니라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이 사라지면서 가정의 붕괴 조짐이 나타난다. TV만을 보며 식사를 하고 바쁜 생활 속에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는 일상에서는 가정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창의성,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적이고 무덤덤한 것들만이 활개를 치는, 인간은 그 와중에 숨이 막히고 있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해도 원가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만들때 들어가는 정성, 즉 질의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패스트푸드의 가격이 슬로우푸드의 값과 거의 비슷하다는 사실은 합리화의 인간통제 가능성과 ‘합리의 불합리’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맥도날드화의 철장감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책의 저자는 그 원인을 돈, 가치 그리고 적응력에 두고 있다. 실제적으로 들어오는 단편적인 경제수익과 맥도날드화 자체를 목적시하는 미국의 문화 및 사회에 자체적으로 적응해가는 맥도날드화의 본유적인 속성 등이 우리를 계속 묶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후기산업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합리화에서 탈피해보려 시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시기 내에서 조차도 맥도날드화는 변형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즉 사라지기에는 너무 오래되고 전체적으로 퍼져버린 암세포같은 맥도날드화는, 영화 가타카에서 경고했던 유전자조작에 의한 하이테크임신이나 자동화된 장례상품 등 합리화란 단어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것만 같았던 삶과 죽음의 영역에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가 사회의 구속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면 ‘어플루엔자’는 우리가 왜 돈과 물질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잘 설명해 준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세대가 물질적으로 계속 풍족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경제적 팽창에 대한 강박적인 욕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러한 현상을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라고 이름지었다.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한 가장 큰 문제점은 공동체, 즉 이웃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에 있다. 예부터 내려온 지역 모임에 대한 소속감이나 이웃간의 화목함은 사라지고 있다. 이웃사촌끼리는 집안의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던 우리 선조들의 미덕은 각박한 현실과 경제의 행정시스템에 묻쳐 찾아보기 힘들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는 단지 소비하고 있을 뿐이지 우리 자신을 돌보지는 않는 것처럼 분명히 누군가 언젠간 치러야할 번영의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은채 앞으로만 나아간다. GDP는 늘어나면서도 사회건강지수는 오히려 감소하고 아동학대와 청년실업은 증가하는 부작용은 곧 곪아서 터질 사회의 부조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풍요병에 의한 정신적인 타격 역시 큰 문제이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기에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며 자괴감에 시달린다. 또 사회적으로도 풍요의 모습 뒤에 숨겨진 극심한 빈부격차와 같은 불공평한 모습들은 어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얼마나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질병을 유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프리카에는 매일 기아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지구촌 한편에서는 과소비와 남는 음식물처리가 문제가 되는 남북문제는 원인에 대한 분석 뿐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자원이 고갈될 수도 있다는 경고는 아마도 가장 현실에 와닿는 문제일 것이다.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모든 물자가 어느 하나 자연에서 오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의 재생능력을 심하게 벗어날 정도로까지 지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있는 것들의 가치를 잘 안다면, 아마 지금처럼 많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당연한 듯이 이것 뿐 아니라 저것마저 소유하려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의 욕심이 생물종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며 점차 자원의 전체량을 줄인다. ‘환경의 역습’이라는 연초의 TV프로그램에서 경고했듯이 환경호르몬인 다이옥신과 새집증후군의 원인물질인 포름알데히드 등은 모두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의 움직임은 제품의 비용에 환경세를 추가하고 여러 시민단체에서 가시적인 개선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 너무 익숙해진 편리함에 우리는 쉽게 기존의 방식을 고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라는 공익광고처럼 좀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자원의 많은 부분을 사용하는 선진국들의 작태도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퇴치하는데 큰 걸림돌이다. 미국, 중국이나 러시아는 겉으로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며 세계의 평화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여러 가지 협약이나 규정을 무시하고 있다. 리우환경회의 등에서 시작한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이산화탄소규제에 대한 안건도 몇몇 강대국의 로비와 횡포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힘을 앞세워 자기들만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국제, 정치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면에서 브루스커밍스의 글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반세기에 걸쳐 남북한 양측에 얼마나 잘못된 권리를 행사해 왔는지 알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구소련의 해체와 독일의 통일을 기점으로 이미 이념의 시대는 가고 자본주의 체제하의 지구촌이 무한경쟁의 시대에 돌입했다고 한다. 물론 냉전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면이런 글 자체를 볼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겠지만 현재가 있다고 해서 과거가 모두 용서가 되고 인정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지금의 우리 세대도 이런 글을 통해 무엇이 진실에 가깝고 또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하는지를 생각해 볼수 있었다.

 내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얼마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핵읜 존재는 미국이나 또는 우리나라에 대한 선제공격이나 위협용이라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의 제도권교육이나 군대시절, 여러 매스컴을 통한 교육의 결과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브루스커밍스는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핵이라는 것은 누구를 먼저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한 방위전략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북한이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전쟁억제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핵개발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정말 미국이 핵무기가 폐기되어야만 한다고 북한에게 요구한다면 왜 그들은 먼저 그들의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는 것이며, 북한이 공개적으로 요구한 IAEA의 미국내 감사는 어째서 수용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물론 이 글 하나만을 가지고 정말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이며 북한은 시간이 꽤나 흐르기는 했어도 남침을 했던 과거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내재적인 위험요소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경찰국가 미국’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미국은 매년 ‘악의 축’이란 이름을 단 적대국가 명단을 발표한다. 물론 북한은 그 명단의 단골 손님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 명단의 다른 국가들은 현재 어떤 상황일까? 알다시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침략으로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시리아, 쿠바, 북한 등 다른 나라들도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는 ‘악’이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인권에 대한 문제와 독재정치 등 잘못된 점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미국이 무슨 권리로 다른 주권국가에 대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인가? 이 간단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에 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북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미국은 안하무인격으로 자신들의 힘을 남용했다. 대선 당시 항상 떠도는 소문에 이미 한국의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정해놓은 것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미국은 분명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다. 분명 미국은 우리나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의 힘든 상황에서 미국을 중심으로한 원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만들기까지 좀더 긴 시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 특히 90년대부터 시작된 탈냉전시대의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분명히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독주를 시작한 미국의 태도는 전세계적으로 너무나 독단적이었고 특히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는 마치 북한은 악의 근원이며 남한은 미국의 51번째 주인양 행세해 온 것이다.

 아직도 남북한이 대치해 있는 분단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이라는 두 국가를 비교하며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국이 보이고 있는 세계 여러 곳에서의 행태들, 특히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한 오만한 행동들은 분명히 월권행사이다. 그럴 수 있는 자격은 어느 단일국가에도 없다. 굳이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러한 권한은 UN에 있는 것이고 UN의 모든 구성원들은 평등한 주권을 가진다는 UN헌장의 말처럼 북한도 엄연한 한 국가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UN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모습을 볼때 혀재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파워게임이 얼마나 무력의 사용이 없이 지속될수 있을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그것은 어느 누가 유리하고 또 누가 누구의 편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애시당초 게임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이런 식으로 북한에 대해 요구를 하고 간섭을 한다면, 미국은 동네깡패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우리 부모님 세대분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초콜렛의 단맛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한두개쯤은 가지고 계신다. 그만큼 힘든 상황에서 미국은 분명히 대한민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면 관계 또한 변화를 주어야 한다. 다시말해 한미간의 새로운 관계의 틀을 모색해 보아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미군 장갑차 사건에 대한 촛불시위가 벌어질 당시에 미국의 정가에서는 혈맹국가인 한국에 대해 강한 불만과 서운함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국가간의 관계란 것은 기본적으로 독립된 주권을 서로가 인정해 준다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것이며 미국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현재 한국과의 관계에서 잘못 설정이 되어 있는 SOFA규정 등의 불평등한 조약들을 개정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그동안 미국식 자본주의를 여과없이 받아들이며 부정적인 면 또한 그대로 수용하고 숭배해온 태도를 반성해야 한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나 ‘어플루엔자’에 나오는 사례들은 주로 90년대 초중반의 미국사회를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이미 그런 징후들이 사회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선진국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의 올바른 기준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극단적인 말이 아니라 지킬 것은 지키며 진정한 발전을 도모해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화가 문제라고 하여 사회에 뿌리박힌 그 시스템 자체를 한번에 없애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선된 모습으로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환경 친화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면을 가미한 개성있는 시스템을 사회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어 있어야 한다. 익숙해진다는 것의 문제는 당연한 권리 또한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인데 흔히 말하는 클레임성 고객 또한 다른 관점에서는 적극적인 소비자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권리를 지켜가야 한다. 우리는 합리화된 사회구조 및 물질의 홍수 속에서 우리와 우리 자손들 및 전세계의 인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따져보며 생활할 의무 또한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유도함으로 인해 자신에게 생기는 ‘변화’를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의 노력에 못지않게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지원 또한 필수이다. 인간의 욕심도 무한한 것이며 또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구조 내에서는 개인의 노력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환경, 교육, 복지 등의 여러 조건들을 포괄할 수 있는 국가차원의 개선 노력도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단순히 소비세를 늘리거나 소비를 제한하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어릴때부터 올바른 습관을 가질수 있게 가정과 학교에서 똑바로 배울 수 있다면 더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학생과 시민단체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그 모은 뜻을 행정적인 측면과 연계시킬 수 있는 장치 또한 필요하다.

 우리는 앞으로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온 모델은 미국식 자본주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장점들 뒤에 숨겨진 많은 폐해가 있다. 그러한 부정적인 면을 고려한 우리 나름대로의 새로운 사회, 문화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고 단순하게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합리화는 무엇을 위한 합리화인지, 우리 모두가 한배를 타고 순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혼자만 잘 살면 아무런 재미도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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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문화와 예술 수업을 마치며

Posted 2008. 8. 21. 16:21, Filed under: Ex-Homepage/Essay

 감기는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하게 볼수 있는 병중 하나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퍼지는 감기의 경우에는 그 원인바이러스의 변종이 워낙에 다양해서 완전한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병에 걸려도 금방 건강을 회복할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국민병’이라고 불릴 만큼 흔한 병인 것이다. 문제는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차츰 감기를 당연한 듯이 여기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어플루엔자’란 책의 제목을 봤을때 들었던 생각도 같은 맥락에서 책의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덧붙이자면 두책 모두 내용적인 면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수긍하면서 읽을 수는 없었다. 여지껏 내가 단지 ‘소비주체’로만 머물렀던 탓도 있지만, 내가 배웠던 많은 것들로부터 이미 난 합리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사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는 책의 제목이 흥미로웠지만 그 내용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합리’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하는 좋은 자극이었다.)

 웰빙족이라는 말이 얼마전부터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여러 ‘족’들을 상기해 볼때 그 트렌드의 한계는 명확하지만, 적어도 잘(well) 살아(being)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했다는 점만은 정치,사회,경제적 조류에 치우치던 예전의 ‘족’들과는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그러고보면 유사한 부류의 말들이 꽤나 많아졌다. 다운쉬프트, 참선, 느림의 미학, 그린연대 등의 문화코드들은 모두 인간에게 양보다는 질을, 달리기보다는 산보를 추천한다. 그렇지만 이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것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그 의미를 정말 알고는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실천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에 본 물건중에 컴퓨터에 꽂아쓰는 ‘USB 음이온 발생기’가 있었다. 제품 설명을 보니 그것을 컴퓨터에 간단히 장착하면 방안의 탁한 공기와 담배연기, 전자파 등을 제거해 준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획기적인 아이디어인가? 그렇지만 곧 씁쓸했다. ‘제주도 맑은 공기 스프레이’를 사서 뿌리는 도시인과 다를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지구 바깥의 외계인들이 보면 지금 지구인들이 생쑈를 하고 있다고 여길지도 모를 그런 물건들을 난 종종 구입하곤 했다.

 세상은 포화되어간다. 흔히 인문과학의 발전 속도가 자연과학의 발전속도에 뒤쳐진다고 우려하지만 어떻게 보면 어떤 방향으로든 양자 모두가 세상을 배탈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사람들은 공허함을, 지구는 고갈을 느끼는 것이다. 어플루엔자의 저자는 그런 현상을 ‘의미의 결여로 인한 통증’이라고 표현했다. 물적으로는 풍요로워 졌음에도 영혼은 가난하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또 여전히 국가간, 사회계층간 자원 배분문제의 불평등함이 난무함을 꼬집으며 여러 자원들의 절대량이 결코 무한한 것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잊기 쉬운 명제를 끄집어 낸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의 산업혁명, 과학혁명과 소비혁명은 그 시대에는 세상을 멋지게 바꿀 수 있는 좋은 패러다임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그들은 당시 보이던 발전에 따른 부작용의 징후들 조차도 똑같은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으며, 그  팽창의 중심에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몇몇 나라가 있었다. 물론 그러한 발전 단계에서 사람들은 많은 편리함을 얻었다. 과학기술자들은 조금 더 풍요롭고 편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는 사람들을 시간적으로 해방시키는 역할도 했다. 그러나 합리성에 의한 불합리함을 간과한 나머지 발전이 ‘지속 불가능한’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가질만큼 가졌다’는 인식으로의 전환이다.(우리는 너무 가지고 싶어한다. 범주를 좁혀 그 대상을 물질에만 한정해 봐도 인간은 너무 만족할 줄 모른다. 단지 아이디어 계획안만이 발표된 시점에 벌써 그 제품을 리뷰하는 얼리어뎁터라는 신부류의 사람들도 있는 마당이니 인간이 얼마나 호기심이 많고 또 이기적인지 알수 있다.) 개인적으로 군대에서의 경험은 나에게도 있던 그런 잘못된 생각들을 어느 정도는 깨쳐주었다. 예를 들어 야외에서 일주일정도 훈련을 할때는 기본적인 세면과 수면시간 등이 보장되지 않을때가 많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화도 났지만 차츰 훈련에 익숙해지자 그런 모든 것이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배가 아플때는 반드시 약을 먹어야 한다고 여겼었지만, 약을 굳이 먹지 않아도 곧 복통은 사라진다는 것을 배웠다. 그곳이 꼭 군대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내가 해왔던 또는 하고 싶은 몇몇 일들(주로 ‘소비’)은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그리고 내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여러 사회단체나 매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문제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자신과 연관하여 자각을 한다는 일이 쉽지는 않는 것 같다. 너무 그런 생활들에 익숙한 나머지 타성에 젖어버린 탓이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더 많은 부분의 교육에서는 20세기 초반부터 걸어왔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불리는 여러 방식들을 그 주제로 삼고 가르치고 있다. 내가 배우는 전공과목 중 경영공학에서는 테일러와 포드로부터 시작하는 효율적인 생산시스템을 합리적 생산공정의 시초로 보고 있다. 사회적 가치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녔지만 제도권의 교육에서는 한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더 높은 비판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깨달았으면 행동해야 한다. 글쓴이들은 우리가 하는 일이 개인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도 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에 언급했던 여러 사회문화운동들이 목표로 하는 것의 본질도 결국은 어느 정도 ‘소비병의 타파’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자발적 단순성’만이 어플루엔자를 치료하기 위한 가장 근본인만큼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항상 ‘생각좀 해보고’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또 경영공학 수업의 기말레포트는 일종의 기업컨설팅에 관련된 것인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평가 기준 중에 사내복지와 사회공헌도 파트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것도 요즘 추세와 무관하지만은 않는 것같다.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생활속에 늘어나는 인간소외, 질을 고려하지 않은 합리성과 효율성의 결과는 결국 우리 자신과 사회로 고스란히 돌아온 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결국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근본적인 기준은 인간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개발이 있고 소비가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남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는 그러므로 인간을 위해서 쓰여져야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이며 풍요일 것이다. ‘빅맥’세트를 먹으면서 ‘어플루엔자’바이러스에 걸린채 허걱거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곧 대다수 현대인의 모습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회복할 수 없을만큼 사람과 환경이 변해버려, ‘행복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후회할 날이 올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에 신문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서울시가 영어 공용화를 추진하려다가 강한 반발에 부딪혀서 없던 이야기가 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조기영어교육 열풍에 어린이들에게 영어발음을 좋게 하기 위해 혀수술을 해줄 정도의 극성인 정도이니, 영어는 벌써 준 공용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영어가 세계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쓰여지는 언어이기에 그것을 외국어로써 받아들인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미국의 문화는 오직 소위 말하는 선진문화, 즉 좋은문화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한국의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것을 빨리 수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계화시대에 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흔히 미국의 정신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개척정신’이나 ‘도전정신’이라고들 한다. 그것은 미국의 초기시대때의 모습을 표현한 Frontierism을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여기에는 흔히 착각하기 쉬운 오류가 숨어있다. ‘개척’이라는 말은 ‘미개척지’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하는 것인데 당시 미국의 사람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무지한 존재로 간주했으며 그들의 토지를 약탈했던 것이다. 그러나 땅의 소유개념은 예로부터 기존의 거주자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이고 대대로 그 땅에 살아왔던 원주민들이야말로 그 지역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미국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개척과 도전의 이름으로 미화해 왔었다.

 그후 이어진 두차례의 세계대전, 경제공황, 냉전시대 등의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며 미국은 더욱 거대한 괴물이 되어갔다. 미국의 서부‘팽창’시대부터 이어져온 그들의 팽창주의는 이제 거대한 미국의 침공으로까지 불리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는 한국 전쟁을 연결점으로 지금까지도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물결에 더욱 크게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시작된 노무현 정부에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세대간의 이념적 갈등 또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두 세대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경험과 그 안에서 혼합적으로 작용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감이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어릴때부터 미국문화를 접하며 자랐다. 우리 사회는 이미 서구화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다 못해 추종까지 하는 풍토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미국중심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 매우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전쟁을 모르는’세대 임과 동시에 전세계의 사람은 천부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동남아 사람들을 은연중에 무시하듯, 국적이나 인종에 따른 차별의 문제는 그 사람이 속한 나라의 힘이나 피부색에 대한 편견에 따라 흔히 발생한다. 이런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세계의 문화, 정치,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한 조류 특히 미국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각 개별 국가나 문명의 문화의 다양성과 공존성을 무시한채 자국의 문화만을 강요하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는 결국 맥도날드화되어가는 사회와 급증하는 풍요병에 걸린 사람들의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의 장점을 부각시키며 들어온 미국문화는 인간성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하며 또한 문화사대주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문화는 한 사람을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병이 들었다고,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잘못된 문화때문이었다고 그 나라 탓만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문호를 개방할 당시 역사적인 판단 착오에서부터 시작된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어진 냉전시대를 거치며 우리 스스로를 돌볼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여유가 부족했던 100여년의 시기에 미국은 분명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도 많이 주었다. 그러나 구소련의 붕괴 이후 시작된 미국의 독주체제에서 미국이 보이는 여러 모습은 예전보다도 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급변하는 사회에서 미국의 팽창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우선 지금 우리의 상태는 어떠한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미국문화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화를 완전히 차단하고 국수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선별하여 받아 들이고 또 개선해 나갈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예를들어 우리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자연 친화적인 건축물을 합리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합리’일 것이다. 또한 점점 교묘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미국식 세계화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 반세계화운동과 이라크전에 대한 반전운동 등은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문화침투의 경우에는 더욱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개개인의 뜻을 모아 시민운동이나 서명운동 등의 방식으로 표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을 지키고 또 그들의 잘못을 막을 수 있는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본 잭 니컬슨의 영화는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이었으며 그 전에는 ‘어바웃 슈미트’가 기억이 난다. 물론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연기자이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는 항상 모랄까 개구쟁이와 같은 그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년의 모습, 즉 중후한 연기를 기대할 수 없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오래전 젊은 시절의 그의 연기 또한 지금보다 얼굴의 주름살만 조금 없을 뿐이지 그때도 매우 개성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역시 유명배우의 명성은 그냥 얻는 것이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그가 열연한 맥 머피는 범죄자인데 그는 교도소 생활이 싫어 일부러 미친 척을 하고 정신병원으로 온다. 아마도 그는 감방보다는 병원이 낫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편 병원의 환자들은 부인과의 갈등문제, 말을 더듬는 문제, 말을 안하는 문제 등 마음의 병을 한두 개 정도씩 가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서 머피는 정상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곧 주간호사의 주도로 행해지는 집단상담 시간과 투약 시간에 머피는 환자들 자신의 문제가 아닌 병원의 치료 시스템과 병원관계자들의 환자를 대하는 태도 등이 오히려 환자들을 더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어느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지 않은 그 모든 환경에서 머피는 마치 ‘정상인’인양 그러한 부조리들을 헤쳐 나가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병원의 동료환자들도 역시 그러한 머피의 행동에 동조를 해나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머피의 행동은 여태껏 그들이 해왔던 일상적인 삶과 억압된 병동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억울함 같은 것을 직접적으로 파헤쳐 나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구중계방송을 보지 못 하게하는 병원의 모습과 그러한 상황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그것이 당연한 대우인 것인 양 받아들이는 군중의 모습에서 나는 과연 우리 사회의 여러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생활해 나가는지 반성해 보았다.

 사회의 제도란 것은 참 잔인한 도구이다. 왜냐하면 제도에 맞추어 살아가고 또 제도에 알맞은 모습으로만 살아가면 그 틀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도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무뎌지게 한다. 그건 익숙해짐의 문제인데, 우리는 이미 그것에 종속되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제도가 맞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능력을 마치 병원의 환자들처럼 상실한 것이다. 내가 지금 그러한 느낌을 강하게 가지면서도 선뜻 그 대상을 떠올릴 수 없는 것 또한 타성에 젖어 버린 내 모습일 것이다. 세상의 모습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아웃사이더이자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문제라면 무시해 버리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의 모습에서, 친구들에게 낚시를 해볼 수 있게 해주고 같이 운동을 하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려 노력하는 머피의 행동은 박애라는 개념을 떠나 ‘과연 나는 이 제도 안에서 얼마나 무지했던가..’라고 생각해 보니 억울하고 조금 짜증이 났다. 한마디로 정상처럼 보였던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 비정상적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정상인 사람일까?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난 모던타임즈에서의 찰리채플린의 모습에서 그 일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 이름을 많이 들어봤던 유명한 영화 모던타임즈를 보고난 소감은 교수님께서 상영 전에 언급하신 것처럼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깨달음을 주는 영화란 것이다. 기계화에 대한 언급과 여러 시대적 배경 등 지금과 달라 보이는 영화 속의 많은 모습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에 의한 암묵적인 지배현상은 여전하다는 점이다. 초반의 우스꽝스런 광대의 모습을 보며 웃다가 순간 웃음이 가신 것은 그가 허공에 대고 너트질을 해대는 장면을 보았을 때였다. 단지 그의 모습이 우습다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저 상황에서 저 작업을 맡고 있었다면 과연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란 생각이 들자 문득 찰리채플린의 공장 동료들이 싫어지고 무섭기까지도 했다. 물론 그들 역시 당하는 입장이고 거기서는 영화의 초반에서 유일하게 말을 하는 공장장 아저씨가 ‘악의 축’으로 설정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회사의 기계화나 비인간적인 모습에 흡수되어가는 우리 모두가 공범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만큼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 영화를 봐도 크게 감동을 받는 것은, 역시 찰리채플린 개인의 역량도 역량이지만 그때부터 대두되었던 문제들 중에는 여전히 현대사회에도 잔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현재 상황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것은 바로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의 목을 죄어오는 사회의 틀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물질의 노예로 살고 있다. 그것은 돈과 같은 재화일 수도 있으며 또는 시간이라는 무형의 올가미일 수도 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창조되어진 그러한 개념들조차도 결국에는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것이 되었다. 세상 어디에도 시간과 돈이 인간을 재촉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좀더 빠른 교통수단을 찾고 싶어 했으며 좀더 빨리 일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 물론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제도 역시 그러한 현상을 부추겼다. ‘효율’이란 원래 ‘통제’의 개념을 그 기반으로 깔고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 하나하나가 그러고 보면 다 불만이다. 매점에서 기다리기 위해 번호표를 받으면 기분이 나쁘고 그 뒤에 받아든 조잡한 햄버거세트에 또 기분이 나쁘고...   

 찰리채플린은 사슴처럼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물론 영화에서 그가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하는 역할을 맡은 것은 아니다. 단지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던 안타까웠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지금의 너희들은 어떤가?’하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영화상으로 그가 처했던 하나하나의 상황은 모두가 그의 의도였던 것은 없었다. 단지 그는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외의 여러 가지 사건들, 예를 들어 자동급식기계에 당하고 자기도 모르게 시위행렬에 끼어들게 되고 노래가사가 없어 즉흥적으로 쇼를 하는 일 등은 모두 그가 얼마나 수동적으로 치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찰리채플린과 맥머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각각 바보와 범죄자라는 객관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사회적 약자의 시각에서 잘못된 사회에 다가간다. 그들의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눈을 통해 비추어지는 그 시대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에서의 그들의 진짜 역할이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모던타임즈는 정말 깔끔한 구성을 보여준다.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결국에는 행복이 올 것이니 끝까지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되다는 교훈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뻐꾸기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참한 결말을 맺는다. 의학적인 입장에서의 환자란 당연히 보호를 받으며 치료를 받아야 타당하겠지만 그 외의 잘못된 병원시스템이나 간호원들은 어떤 개인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고쳐질 수는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은 거라고 말한다. 즉 나는 찰리채플린이 그렇게 강조했던 ‘희망’도 현대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우울한 기분으로 다시 병원에 들어선 머피를 볼 수밖에 없었다.(그렇다고 모던타임즈에서 찰리채플린이 싸움에서 승리했다란 뜻은 아니다. 단지 그는 희망을 안고 떠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두 영화에서는 모두 정신병원이 나온다. 정신병원이라는 어감에는 나는 정상이지만 너는 정신이 이상하니 그곳에 있는 거다라는 선입견을 먼저 가지게 된다. 그런데 누가 정말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는 우리의 후대 사람들이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류의 정신병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급증하는 부류에는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어플루엔자와 같은 현대의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또는 생성되는 것을 방조한 탓으로 나타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면 또 우리는 다시 병원을 찾아 심적 고통을 줄이고 싶어 하는 악순환이 계속 되는 것이다. 아마 정신병원이 등장한 이유에는 그러한 뜻도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병을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발현이 되느냐가 관건이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병의 종류도 다양해졌지만 증세도 더 심해지는 경향이 빨라지고 있다. 그것은 철창감옥과도 같은 위압감으로 우리를 제압하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예전처럼 수수방관하는 입장만 아니라면 찰리채플린이나 맥머피와같이 우리와 우리 사회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그런 시도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란 점에서 이번 영화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P.S. 수업 후기....

  이 수업을 들으면서 실제로 미국에 대한 설명을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여기서 말한 ‘설명’이란 것은 정말 외적인 내용들 그리고 가시적인 현상들을 말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수업계획서에 있는 볼꺼리 중에 ‘보이즈 인더 후드’란 다큐멘터리영화를 수업시간에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운데 왜냐하면 군에 있을때 그것을 보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자막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흑인들이 그 비디오테이프 자체를 하나의 생활필수품처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당사자의 입으로 들었을때 그때까지 눈에 보이는 흑인 음악이나 NBA같은 문화예술이 전부인양 알았던 내 마음은 조금은 중립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수업시간에 나누었던 여러 사회문화적인 문제점들이 대부분은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나 서유럽의 국가로부터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때, 그런 것들을 폭넓은 시각에서 바라보며 우리를 반성해 볼수 있었다는 사실은 진정한 문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어느 면까지를 포괄해서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뿐만 아니라 수업 시간 내내 강조되었던 ‘그럼 나는 어떤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자칫 시대나 유행의 흐름에 휩싸여 자기도 모르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그런 소중한 것들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사실 마음속에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문자화하기란 쉽지 않은 얼마 전의 ‘내’가 가지고 있던 나에 대한 생각들을 조금이나마 정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물론 지금의 ‘나’는 그것을 바탕으로 좀더 탄탄하고 바른 방향으로 내 스스로를 이끌어 갈 것이다.





 

Response : ,

미국문화와 예술 수업의 쪽글 모음

Posted 2008. 8. 21. 16:20, Filed under: Ex-Homepage/Essay

*2004년도 1학기에 들은 미국문화와 예술 수업시간에 적은 쪽글들입니다.

수업시간에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비판적인 글쓰기(!)가 쪽글의 주된 방향

이었습니다...미국문화와 예술이란 과목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수업은 아니

었지만 꽤나 괜찮았답니다. 쪽글은 일종의 간단한 리포트와 비슷한 형식이

었구요....아마도 쪽글모음을 읽어보시면 이 수업이 어떻게 진행이 되었구나

란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교수님의 이야기도 듣고, 관련영화도 보고, 학교

뒷산도 올라가보고....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을 알고 싶은 것은 굳이 연애를 할 때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이 ‘미국 문화와 예술’이란 수업을 들으려 했을 때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얼핏 강의의 타이틀을 보면 떠올릴 수 있는 그런 류의 수업이 아님을 처음 강의 시간 때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는 희소식이었을 뿐이다. 일반인으로서의 보편적인 미국인의 모습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나에게는 그들의 단편적인 모습과 문화의 현상보다는 오히려 좀더 구체적으로 미국 문화의 시작과 연원,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그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음으로 인하여 그것을 나를 포함한 우리의 문화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사실은 내가 이 수업에 대해 바라던 바와 유사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어떠한 운동에도 직접 참여하지도 않는 방관자적 입장에 있으면서도, 현재의 내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현실 상황에 대해서는 항상 불만에 차있는 이중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그때부터 항상 마음 한구석에 내 주변의 삶, 친구,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접근은 실패했었다. 그것은 당연히 그때 그때의 내 자신의 역량이 부족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현상을 관찰할 때는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한 자기 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인 이상 무언가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중립적인 마음가짐으로 그 사물을 바라 봐야 만이 진정한 깨침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나라는 존재는 이 넓은 세계에서 어느 위치에 어떤 비중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개인적으로는 자랑스러운 그 국명 앞에서도 알게 모르게 약소국의 한 국민으로서의 자괴감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괴감이란 것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비교란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들을 굳이 가늠해 보려고 할 때 은근히 나타나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2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스스로가 제도권의 교육과정과 그 안에서의 여러 체험을 통해 주입해온 그러한 것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내가 아는 친구들 중에 A라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여대에 다니는 학생이며 나보다는 4살이 어리다. 그러나 그가 행해온 여러 가지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난 항상 ‘부끄러워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어떠한 주제, 그것이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나 인권, 미국의 팽창주의에 대한 저항 등에 대한 그녀와 그녀의 소속 집단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무관심하게 바라봤었다. 한편 그런 와중에 내가 이 수업을 들으면서 집요하게 내 자신에 대해 물어본 사항은 바로 이것이다. 과연 너는...지금까지 네 자신에 대한 탐구만 끈덕지게 해온 네가 이 여러 가지 문화적 사항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비판적인 눈을 견지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그렇다. 아직까지 몇 년에 걸쳐서 나름대로 행해오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탐구가 계속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과연 나란 사람이 어떤 다른 주제에 관해 수용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지금껏 제도화된 사회에서 살아오며 심하게 억눌려온 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한 학기 동안 그러한 것들을 타파하고 적어도 이 수업이 끝날 때 즈음하여 좀더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 강좌를 수강한 보람이 있을 것 같다고 여긴다.


 구체적으로 내가 미국 문화란 것에 대해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KATUSA라는 군 생활을 통해서였다. 입대하기 전부터 여러 가지 소문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또 나름대로는 군 생활을 통해서 좋은 경험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아는 미국문화, 나아가 공식적으로도 세계를 이끌어 간다는 거대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내 생활의 일부로써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수용’의 개념이 아닌 일종의 ‘주입’이었다 고나 할까? 더구나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그들간의  인종과 계급의 장벽은 미국이 기회의 나라일 수도 있지만 차별의 나라일 수도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나의 군 생활은 운이 좋게도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가지고 있던 미국문화에 대한 선입견에 새로운 내용들을 추가해 주었다. 흔히들 미군문화는 미국 사회의 최하위층 문화의 일부라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미군에 자원한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고, 그들과의 생활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점은 그들이 정말 풍문처럼 ‘쓰레기’들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언어란 것은 참 무서운 것이다. 그것과 관련된 수많은 속담과 격언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란 존재가 얼마나 그것에 휘둘려 왔는지 생각해보면 정말 참담할 뿐이다.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을 느낄 때 난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느껴 왔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사상들과 감정들, 그리고 얄팍한 지식들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온 것인가? 바로 말이다. 그것이 수단이 되어서 의도하지 않으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을 지배해오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교과서와 참고서로부터 읽은 내용, 그리고 인터넷과 소문으로 들은 내용들로 인해 은연중에 세계문화와 그 핵심을 차지한 미국문화에 대해 세뇌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의문이 든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맥도널드의 햄버거를 먹으며 잡다한 그들의 슬랭을 지껄이는 내 자신을 보면 부끄러울 때가 있다.


 문화란 것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음악, 문학 등의 어떤 분류에 의해서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그곳에 뛰어 들어 그들과 부대끼며 살아봐야 만이 진정 그들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속한 곳은 공과대학이란 곳이지만 나 역시 그들의 문화에 대해 호기심이 있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신입생도 아니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조금 쑥스럽기는 하지만 대학이란 곳이 자신의 전공만 공부하고 학점만 잘 받아서 취직을 잘 하기 위한 전초기지만은 아닌 것이다. 난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며 살았었던가...그리고 얼마나 그것에 무관심하며 살았었던가 지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번 강좌에 기대를 하며 다짐을 해본다. 내가 가진 생각들로부터 얼마나 벗어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나의 발전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대학에 와서 무엇을 배워갈 수 있을까? 단순히 컴퓨터의 작동원리와 작업을 배우고 싶었다면 좀더 저렴한 학원에 등록을 했을 것이다. 공과대학에 다니면서도 교양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종합대학인 연세대에 지원을 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실용 그 이외의 것에 대한 갈구에도 그 까닭이 있었다. 난 그것을 위해 이번 강좌를 수강한 것이며 내 스스로도 그것, 즉 내 자신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적용한 세계의 이해를 위해 고민해 볼 것이다. 지금껏 몇 년 동안 그래왔지만 이번 한 학기에는 좀더 집요하게 그것을 탐구해 볼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본다. 그리고, 내가 알아가는 것은 무엇인지도 또한 궁금하다. 나는 왜 사는 것일까? ‘행복해지고 싶어서’란 대답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답변일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나의 생활에 대해 행복하냐고 다시 물어본다.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 ‘나도 잘 모르겠다’란 어정쩡한 변명이 조심스럽게 나와 부끄럽다.

 나는 너무 모른다. 나는 부끄럽게도 친구 A가 왜 사회단체운동을 하는지도 잘 모르고, B형이 왜 조교를 하다 학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난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여느 대학생들처럼 내게도 몇 번의 기회, 즉 내 자신을 알아갈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이 있었다. 무엇을 알아간다는 것과 관련해 그 대상에 명확한 우선 순위를 매기는 것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름대로 나를 파악하려고 했던 첫 번째 시기는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해진 틀에서만 활동해오던 나에게 당시의 반장선거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의지와 그에 따른 행동들은 매우 딱딱했었고 그랬기 때문에 쉽게 부러지고 난 아팠다. 무언가 다른 방식의 가치관이 절실했었고 어느 정도는 개선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잠시 뿐이었고, 난 다시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 되었다. 입시에 대한 생각은 그 근본이 너무 강해서 어느 누구도, 또 어느 시기에도 그 위압적인 면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나름대로는 그 안에서의 문화랍시고 간간이 밴드활동이나 농구동아리 같은 소극적인 일탈행동들도 일으켰었지만 역시 ‘대학입시’는 자성이 매우 강한 자석과도 같았기에 난 나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이곳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한편 내 스스로에 대한 두 번째 고뇌는 고3 말에 찾아왔다. 이상과 현실의 자괴감, 그리고 이미 현실화된 사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아져버린 내 마음 등이 문제가 되어 98년부터 2년여를 내적으로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참 고마운 것은 그때 난 나름대로 많은 기준을 세울 수 있었고 그것에 맞춰서 쉽게 좌절하지 않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윤리시간에 배운 추상적인 선악의 ‘구별’이 아닌 개인적인 가치관의 ‘선호’가 많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또 그 와중에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

 군에 가기 전에 2가지 목표를 잡았다. 첫째는 나란 놈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자는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던 목표였고, 하나는 나중에 무엇을 업으로 삼을 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는 백미터 달리기처럼 딱 부러지게 끊어지지는 않는 것이란 걸 잘 몰랐던 탓일까? 예비역이 된 지금도 저 두 물음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2004년이 시작되던 날, 매년 초에는 늘 그러하듯 ‘올해의 목표’를 잡았다. 이번에는 ‘내 자신에 대한 탐구’를 뺐다. 대신에 HUP라는 고심 끝에 나온 프로젝트명 아래 야심에 찬 계획을 하나 세웠다. 그냥 나를 알아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 HUP의 지향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과거행적을 알아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자아탐구가 완전히 배재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이 수업도 그 계획의 여러 분야들 가운데 나의 군 생활과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폭, 새로운 문화에 대한 나의 입장과 반응 등에 관련한 파트에 대해 하나의 지침서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수강신청을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이 강의가 좀더 많은 부분을 포괄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A에게는 그의 입장에서 본 나의 겉모습이 너무나 안일해 보였었나 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남자란 성별을 가지고 태어나(그는 여자이다), 연세대‘씩’이나 다니며 왠지 경제적으로는 별로 쪼들리지 않게 살아온 것 같고, 그 편하다는 카투사로 군대를 다녀왔겠다..무엇하나 남부럽지 않은 편한 삶만을 살아왔다고 오해했던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그 속모습의 일치란 가치의 문제는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지만 난 이점 하나만은 인정한다. 나는 너무 정해진 길로만 다녔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시선을 돌려 주위를 바라보며 들판의 꽃들과 넓은 하늘, 때로는 죽은 고양이 시체 따위도 바라볼 수 있는 그 여유에 대한 의지가 내게는 거의 없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그러므로 올 한해, 특히 이번 한 학기동안에는 집중적으로 나를 공격할 것이다. 몽롱해진 머리 한 구석의 환각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다.



 286 컴퓨터를 가지고서 했던 오락 중에 ‘남북전쟁’이란 것이 있었다. 일종의 전략시물레이션 게임의 원조격인 오락인데 화면의 조잡함에도 당시에는 마땅히 할만한 게임도 없었고, 컴퓨터의 사양도 따라가지 못해 한동안 그것에 빠져 지냈던 기억이 난다. 게임의 진행법은 단순했다. 나와 상대방이 각각 남군, 북군의 진영을 차지하고 미국 지도모양의 게임 판에서 몇몇 기점을 기준으로 자신의 땅을 늘려 가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미 상대가 가지고 있는 땅(지도에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군 병력의 규모 따위가 ‘귀여운’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었다)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군사를 이용해 상대방과 전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 게임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그 정도가 어린 시절에 내가 처음으로 접한 남북전쟁의 전부라 할 만큼, 난 그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그 후로도 영화나 소설 등의 간접경험을 통해 북쪽의 사람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남부지방의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켜 준 것이 남북전쟁이라는 이미지 또한 어렴풋이 가질 뿐이었지 그 싸움의 본질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남북의 경제 주체사이의 이익 충돌이 깔려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남북전쟁은 그나마 조금 관심이 있던 것이었고, 서부개척하면 존 웨인의 이름도 모르는 영화의 장면들과 미국의 제국주의는 고등학교 국사시간때 배운 제너럴셔먼호 사건 밖에는 생각해 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역사에는 무관심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이란 나라가 급변하면서 겪은,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부작용들이 비단 미국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서구적 팽창 과정의 전형적인 모델일 수도 있는 ‘내적 개발과 과식, 그에 따른 외부로의 팽창 및 제국주의적 만행’에서 미국이 다르게 접근한 부분은 딱 한가지이다. 이번에 읽은 글에서는 그것을 ‘평화주의로 접근하여 간섭을 확대해가는 경찰력의 행사’라고 밝혔다. 사실이 그렇다. 조금 다른 방법을 썼다고 해서 제국주의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자칭하는 ‘후진국의 개발’이란 가면 뒤로 수많은 현지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이 억압되고 묵살되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경찰이 이미 존재해 있는 엄연한 한 나라에서 새로운 경찰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이라크에서 경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에 속했던 시아파에서도 요 며칠 사이에 들고 일어선 것을 보면 미국은 여전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제국주의의 블랙홀에서 그나마 일찍 비껴갈 수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인의 ‘전통적인 패배자에 대한 동정심과 내부적으로는 물적 풍요로움으로 인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한다. 매우 역설적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지금의 미국의 이미지를 만드는데도 그때의 여러 사건들이 한몫을 거둔 것은 맞는 말 같다. (한편으로는 ‘영토에 대한 적응도’의 차이도 미국식 제국주의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산업발달로 인한 경제적 부의 증가는 여느 나라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미국이 가진 ‘개척된 새땅’에 대한 관념과 ‘제2의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 싶어 혈안이 된 영국의 영토 개념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한발 앞서 제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자유와 평등의 나라가 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부적인 인종, 계급, 성별 등의 차별문제에 있어서는 은연중에 지배 세력이 굳어지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세계경찰’을 자임하고 있다. 마틴 루터킹 목사 사건과 LA 폭동, 그리고 ‘하이어 러닝’과 같은 몇몇 영화에서 비춰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20세기 후반부에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이 그들이 표방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있었던 일들을 사실위주로 그대로 보는 것과 현시대인의 주관이 개입되어 ‘해석된 사건’을 보는 것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주로 후자를 보고 배웠다. 세계사를 제도권 교육을 통해 피상적으로 접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상 다큐멘터리 보다는 드라마를 더 흥미 있어하는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영화, 음악, 문학 등의 대중문화로 포장되어 다가오는 ‘아름다운 나라’이야기는 의식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미국이라는 나라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문화의 수요자로만 머물었던 나에게 이번에 읽은 글은 그들의 피에 물든 초기 발달 모습을 알게 해주었으며, 미국의 본질과 미국인의 마음 한 구석에 깔려있는 속내를 조금 더 볼 수 있게 해준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물론 그때의 모습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들이 강대국인 것은 사실이며 비판받아야 할 점들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점이 더 많은 것도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부터 한 세기를 거쳐 오면서 미국도 내외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지금의 미국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또 냉전 이후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나라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는 건지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가지고 미국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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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HUP 2탄; 신앙생활에 있어

Posted 2008. 8. 21. 16:19, Filed under: Ex-Homepage/Essay

Q: 나는 원래 신의 존재를 믿었었던가?


  그렇다. 중고등학교의 생활 기록부에도 또 군

입대할 때의 문서상에도 난 모태신앙의 크리스

챤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항상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오직 그와의 대화 수단은 기도 뿐이라는

생각을 지닌, 한편으론 교회란 곳에 회의감을 느끼

는 사람중에 한명이다. 물론 내가 절실한 신자인

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나의 신앙 생활은 1기와 2기로 나눌 수 있다. 1기

는 그 시작이 언제인지부터 불투명한 옛날부터

대학 1~2년의 시기까지였다. 남들만큼 성경을 읽

고 찬송도 불렀으며 교회일에도 적극적이었지만

교회 생활이 일종의 사회활동의 의미 외에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진 못했다. 그때의 영향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윤리적 측면, 정서적 측면

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

다. 미숙했던 나에게 종교란 것 자체는 가슴으로

와닿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각 종교들은 너무나 배

타적이었다. 그나마 불교나 천주교가 기독교 보다는

나았었고...) 어느 종교를 신봉하더라도 결국 스스로

하는 질문의 귀결은 절대자와의 조우인데, 그때의 나

는 그런 일체의 것들은 인지하지도 못했고 인정하려는

마음조차 갖지 못했었지만 말이다.

 

  2번째의 변화는 그와 나 사이에서 모종의 계약이 끊

어졌을 때 일어났다. 그것은 사실 계약이라기 보다는 나

만의 독단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과의 관계란 것은 절대자와 복종자가 아닌 친구 사이의

그것과 다름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념과 관

련된 문제인데 내가 그의 발에 엎드리지 않는 한 내 마음

깊은 곳의 '나'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이건 최근에

와서 확실해진 것이다. 제 2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잘 몰

랐었던 것이기도 하며) 결과적으로 내가 입은 상처는 계

속 내 자신으로 인해 곪아갔고, '신=친구'라는 개념조차도

차 멀어져갔다. 물론 내 외양적인 생활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미 기본적인 프로그램은 제 1기에서 몸으로 익혔

었고 굳이 종교란 카테고리 말고도 삶을 조종하는 부분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2003년 말까지 나의 내면 생활에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찾아왔다. 98~00년 까지는 말이 별로 없었다. 약간은

회의적이고 시니컬한 생각을 가졌었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한 측면이 컸다. 난 믿었던 친구인 신에게 배신을 당했

었다고 혼자 믿었으며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험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일종의 조산이었는데, 나름

대로는 최선책이라 믿고 대응했지만 결과적으로 너무나 힘

든 시기였었다.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느낄 법만

한 외톨이가 된 느낌...(물론 친구들이 있지만 그들의 존재

란 당시의 내게는 진통제의 의미였을 뿐이다)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그 밑바닥부터 흔들렸었기에 나의 내/외부의

모든 것에 대한 어떠한 믿음도...확신도 가질 수 없었던

날들이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었다.


  다행히도 어떠한 거부에도 꿋꿋하게 남아있던 것은

내 머리 속의 잡동사니들이었다. 극단으로 가지 않고서

는 두절될 수 없는 바로 내 자신에 대한 애증이 그때만

큼 강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뒤늦

게 시작된 개똥철학이 나를 꽤나 괴롭혔지만 다행히

결과적으로는 좋은 방향으로 나를 만들어 가고 있어서

고맙게 여긴다. 여기서 '관람객' 사람들을 빼놓을 수는

없다. 99년 겨울에 모뎀 접속을 통해 접했던 네츠고의

여러 동호회들과 네츠고 관람객은 그 성격상 처음부터

달랐다. 컴퓨터를 배운다거나 음악을 다운받는다는 등

의 객관적인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모임이 아니었다. 그

저 우연히 시작되었던 것이다. 예전의 나를 아는 사람들

은 누구나 놀라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다. 심지어는 나의

어머니께서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실 정도이니까. 당시

의 내게 있어 관람객의 사람들은 진통제 이상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고맙다. 같은 선상에서 모두 다른 곳을

바라보지만 적어도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곳에 매달렸다. 어떠한 관계를 쌓음에 있어 초창

기에의 과도한 열정은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지만, 자칫 먼

지가 들어갈 만한 틈 하나로도 갈등이 생길 수 있는 것 같다.

결국은 모두가 사람일 뿐이니까...지금까지도 관람객은 좋

은 사람들의 모임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난 나름대로 그 지

속성을 최대한 길게 끌고 가고 싶은 마음을 항상 가지고 살

아간다.


  01~02년은 군대에서의 생활이었다....

그때의 삶은 나에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귀중한 교훈을 가르

쳐 주었다. 군대란 곳에는 나의 위가 있고 나의 아래가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위계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결

국 나의 기준으로 좁게만 아래쪽을 조절하려고 하기 때문이

다. 내가 잘하면 위에서 봤을 때는 훌륭한 하참이지만, 내가

나의 기준까지 일방적으로 아래 사람에게 요구한다면 나쁜

고참이 되어 버리는 곳이 군대인 것이다. 어쨌거나 군에서

의 외적으로 절제된 생활은 내적으로도 활기를 불어 넣어 주

었으며 상대적으로 많이 '밝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말

267 화학중대에서 나와 함께해준 이들에게 고맙다. 한편

이때 당시에 왜관교회란 곳에 잠시 다녔었는데, 그것이 내 종

교관에 영향을 준 것은 별로 없다. 청년부의 예배 방식이 신

선했고, 젊은 목사님의 설교 말씀도 상당히 '청년의 사회생

활'에 있어 유익했지만 여전히 종교의 핵심인 '신과 나'의

관계에는 별다른 자극이 없었다. 주보에 끄적인 잡다한

생각들은 나를 단련시켰지만 멀어진 친구는 보이지 않았

었다. (그러고보면 난 너무 어리석다. 그는 친구이며 친구일

수 없다. 주인이면서 친구인 것처럼...)


  03년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02년 12월 31일의 신년예배때

난 가장 현실적으로 기도드렸다. 분명 믿음이 있었겠지만 그

경중은 잘 모르겠다. 정형화된 기도란 완벽한 외형,즉 가식

만을 나타내줄 뿐이다. 그리고 작년 내내 신과의 교우는 그

가식조차도 거의 없었다. 애정이 식은 듯 했었다...

그러한 행위에는 결국 독단의 그늘이 지운다는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왜 A의 고통을 떨쳐 버리자고 은연 중에

그렇게 다짐하고 또 자신했으면서도 그와 비슷한 경로를

밟는 것인가? 난 그 이유를 '나와 신'과의 관계에서 구했던 것

이다....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 말부터 올 1월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많은

것들을 지웠다. 예전과 달리 눈물이 나지 않음은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겠지...무언가를 지운다는 것은 참 힘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후회없는 한판이었다. 한 대 맞기는

했지만, 또 게임은 그렇게 끝났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만족

한다. 그리고 다시 준비를 한다. 인생의 게임은 여러 종류가

있고 또 인간에게 평생 적어도 3번의 게임은 온다고 그렇지

않았던가...

 

  이렇게 내 신앙생활의 2기는 종교와는 거리가 조금 있는 그

런 탕자와 같이 바쁘고, 특이한 삶의 연속이었다. 내가

올해를 변화의 해라고 규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 좀

더 거창하게 말해 '절대자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인간의 삶

에는 매우 큰 문제가 생겨 버린다. 바로 '신념'에 대한 것

이다. 제 1기에서의 맹목적임도 일종의 신념이라면 신념이다.

일종의 '땡깡'의 의미가 강하긴 하지만. 제 2기에서도 각 시기

마다 한두 개의 마음가짐을 달고 살았었다. 그런데 절대자를

잊게되고 (단적으로 형식상이라지만 매일밤에 자기전에 했던

기도도 거의 않하게 되었다. 잊었던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니 무언가 너무나 허전하다. 또 조금은 두렵다. 내가 당

분간 맞부딪쳐야 할 게임은 그 단위가 점점 커지는 것들인데

거기에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들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2월초부터 검도장에 다닌다. 새벽반에 등록해서 조금은 육

체적으로 피곤하다. 차차 나아지겠지...A의 조언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고 싶어서 검도를 결심

했다. 그랬더니 더욱 절대자와의 관계 모색이 절실했다. 종

교에 대한 고민과 검도를 배움에 있어 뭐가 먼저인지는 중

요하지 않다. 나름대로 정의해보면 검도를 할 때 난 거울

속의 나를 직시하며 내 껍질을 파괴하는 것이다. 난 좀 맞

아야 한다. 흐릿한 먹물의 뭉치처럼 가슴 한 켠에 있는 못된

바이러스를 격퇴하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그렇게 해서 정화

된 나를 안정시켜 주는 것이 절대자이자 그에 대한 나의 간

구함인 것이다. 그러니 신을 나의 일부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과 검도의 연관관계에 대해선 심심할 때마다

생각해본다)


  제 3기의 시작은 작년 말에 내 머리 내부의 몇몇 기억을 지

울때 부터이다. 그리고 2004년 한해를 그렇게 멋진 해로 바꿀

생각도 그때 했었다. 이 결과가 언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

른다. 내년에는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기겠지만 올해의 HUP를

몸에 장착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나를 따라 다닐 것이다. 우

선은 실천단계로 이걸 생각해 보았다.


1. 매일 아침 Monthly Manna를 읽으며 오늘 하루를 위해 기

   도한다.

2. 매일 밤 오늘 하루와 내일을 위해 기도한다.

3. 주일에는 어느 성전이라도 가서 기도한다.


 ...1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잠깐 실행했었지만 여간해서는 열

흘을 넘긴 적이 없다. 그렇지만 검도와 함께라면 시간상 좀더

엄격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 2는 반성의 의미와 중장

기적인 의미에서의 기원도 포함한다. 3은 예배의 포맷보다는

내 자신과 신의 대면에 있어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의지한

다는 측면에 신경을 쓸 것이다.


  글을 써서 다짐해 보지만 내 자신은 너무나 약한 존재일 뿐

이다. 그러나 크눌프처럼 죽기 직전에 그것을 깨닫고 싶지는

않다. 어느 것을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정진하는 것처럼

그를 믿고 나를 다스릴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그것이 2004

HUP를 떠올린 계기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노력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고정화

되어있는, 분류되어있는 내안의 내가 너무나 많고 또 굳세다.

하지만 알은 깨고 나와야만 한다. 맛있는 계란을 먹기 위해

서는 반쯤 깨진 달걀, 그래서 내막은 찢어지지 않은 기분이

약간은 드러운 그런 과정들을 극복해야만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다 그렇고 그런거니까....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의

데미안 그룹의 리더를 '신'으로 설정했다.




07 Feb 04 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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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HUP 1탄; 인정에 관하여

Posted 2008. 8. 21. 16:18, Filed under: Ex-Homepage/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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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 지구관찰자

Posted 2008. 8. 21. 15:58, Filed under: Ex-Homepage/Essay

만약에 지구를 관찰하는 제3의 무언가가 있다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누던 상대방이 갑자기 죽어버린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지하철을 타고 가다 옆에 앉았던 사람이 졸던 중에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상황을 생각해 보신 적은? 항상 육신은 존재하지만 영혼은 사라지는 것, 그것은 눈에 보이는 어떠한 것들 보다도 섬뜻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나'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나에게 의미가 있어집니다. 개인의 이기심이 작용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들은 결국 관계 이전까지는 단지 그 자체의 껍데기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의 '꽃' 中

<AM 0427 - 방>

 오늘도 어김없이 ㉠에게 아침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그가 물구슬같은 새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아직 등뒤의 땀을 닦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 무언가 심상치 않은 꺼리가 다가온다는 인간 본능의 경고 때문이었다. 벌써 열흘째 계속되는 악몽이다.

 BOX-I은 난감했다. 메뉴얼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분명히 했는데도 이번판은 클리어(clear)가 되지 않는다. 어서 다음 단계인 Ga-3 II 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Mi-e에서 제자리 걸음이었다. BOX-I가 여지껏 그래왔듯이 행성시-2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그 캐릭터의 아바타를 자신의 보관함에 정리하고 다음 무대로  캐릭터를 이동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어찌도니 영문인지 아바타를 조종하기가 쉽지 않았다. BOX-III와 경쟁 중인 그에게 이런 지체란 달갑지 않을 수 밖에...

 " 혹시? 이게 BOX-XI가 말한...?"

 그에 따르면, Mi-e에서는 아주 가끔 시스템 에러가 발생한다고 했다. 행성시-47G에 있었던 일명 '스테라크소'란 아바타가 일으켰던 사건이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캐릭터 이동의 전권은 분명 우리에게 있었지만 가끔, 아주 가끔씩은 아바타 자신이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된다거나 하면 게임 프로그램 자체에 오류가 생기게 되고 그 스테라크소때 역시 서버가 다운이 되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었다. 그때는 결국 행성시-1이 지났을 무렵 BOX-XI는 BOX-VI의 아바타의 도움으로 겨우 Mi-e단계를 끝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 제길...쉽지 않겠는걸?"

 그 사건 이후로 '체니, 르트르사'와 같은 다른 아바타들의 산발적인 랙이 걸리기도 했지만 그 빈도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TV/폭력/마약 등의 백신 처방으로 거의 대부분은 무난히 Mi-e지역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바이러스는 단순한 종전의 백신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었기에 BOX-I에게는 짜증나는 일이었다.

 " 결국 재부팅인가?"

<PM 2311 - 옥상>

 ㉠은 너무 멀리 와버렸다. 지난 열흘간의 삶은 고통이었을 뿐이다. 머리가 깨질듯 저려온다. 인간은 불완전한 현실로 인해 완전한 다른 상태를 그리워하는 존재이지만 ㉠에게는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불분명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있는거지?"

 그는 추락중이다. ㉠은 사라져간다.

              검증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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