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수요일

Posted 2013. 6. 6. 01:28, Filed under: Ex-Homepage/Diary2014

한국시각으로 2013년 6월 5일 수요일, 새벽 5시30분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미국에 계신 외삼촌의 부고소식.

전화기 반대편에서 이 소식을 전해주시던 어머니, 즉 외삼촌과 유난히 가까웠던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어차피 일어날 시간이긴 했지만 조금 더 차가운 머리가 될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운명을 달리하신 많은 환자들의 주치의를 해보았기 때문일까?

지난달 중순부터 본원 내의 암센터를 돌아다니며 구해왔던 팜플렛, 그리고 인터넷 검색 및 오프라인 검색을 통해 골랐던 3권의 책이 지금 태평양을 건너 LA를 향하던 시점에 외삼촌께서는 외숙모님, 지선이, 지연이  누나를 남기고 눈을 감으셨다.

일단 무엇을 해야할까 고민하다 얼마전 알아서 저장해둔 미국 지선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슬픔에 빠져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짧게나마 상심에 대한 위로와 슬픔을 공유하기 위한 말을 건네고, 흐느낌 이외에는 아무런 말도 못하던 지선이와의 오랜만의 통화는 끝났다.

3월달 바쁜 혈액종양내과의 주치의 시절이다. 집이 대천인 P아저씨는 식도암이 위장쪽 입구를 크게 막아서 식사를 점점 못하셨다. 설상가상 속쓰림증상도 심해져 palliative하게 stenting을 하였으나 크게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매번 마약성진통제 용량을 올려달라하고 속이 쓰리다하면서도 침대 곁에는 컵라면과 빵봉지가 널부러진채로 놔두었던 아저씨. 지금은 당연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시겠지만 그 당시 깊은 공감대와 rapport가 형성되어 있었다. 전임의 선생님은 아저씨의 '의지'를 탓하며 상당히 부정적으로 예후를 생각했고 결국 그 말이 맞았지만,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인생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며 난 그것에 지금도 만족한다. 난 최선을 다했지만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죽음'이니까.

지난달 수술 동의서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술 중 RLN기능저하로 쉰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10~15%이다'라는 문구를 설명할 때도 그냥 지나가면 되는 것을 난 꼭 이 말을 덧붙였다.

"100명중 90명은 괜찮은거지만, 10명이라도 그게 내가 포함이되면 큰일이죠"

난 쓸데없이 불안감을 부축인 것일까? 외래에서 실제 환자분들이 들어와 이런 complaint를 많이 한다. 수술 전에는 이런 가능성에 대해  설명을 잘 못들었다고 말이다. 이것이 일이 커지면 의료 소송이 될수도 있고 적어도 병원 외래를 웅성거리게 할 수는 있는 정도의 impact는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나오는 것이 부작용에 별표가 되어있는 동의서.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다'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좀더 현실적으로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진정한 informed가 되는 것이니까.

외삼촌과 직접 통화를 했던 5월 말의 일이다. 외삼촌께서는 반복적으로 최근 결혼한 나를 축복해주셨다. 그런데 정말 계속 축복만 해주셨다. 이미 조카의 말을 들으실 정도의 마음의 여유도 '암선고'가 짓밟아 버린 상태처럼 느껴졌다(이후 어머니와 통화를 하실때는 조금 나아지셨지만 말이다). 그리고 6월 초에 외숙모님과 전화를 하고 잠시 외삼촌과 통화를 했었는데, 이미 기력이 너무 떨어지셔서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내가 들을 수는 있었지만, 이제는 내가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말을 하셨던 것이다. 너무 슬펐다. 인간의 존재는 이렇게 질병에 무기력하구나.

작년 local 요양병원에서 근무를 할 때도 정말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사망선고를 했다. Terminal care가 주된 병원인지라 내 주된 job이 그런 것이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신체검진을 하고 사망시각을 선고하지만 사실 이미 베테랑 간호사들은 '그때'가 언제인지 대충 감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신체검진을 하고 친족에게 의학적인 사망시각을 알리면 내 일은 끝이고 총 5분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냥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당신은 죽음과 가깝게 지내고 있나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 몸속의 태엽시계는 언제 멈출지 모른다. 언젠가는 나의 시계도 멈추고 나도 죽을 것이다. 결국 그때까지 '잘' 살면 된다.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즐기고 말이다. 내가 할수 있는 것만 잘 하면 되니까 이런 것은 나이가 들고 그러면 알아서 잘 하겠지만, 문제는 '감정의 관계'가 황폐해지는 것에 있다. 나를 아는 그 사람에게 나의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건 어려운 문제다. 많은 동서고금의 철학자들도 정답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진행중인 난제다. '잘'살기로 마음 먹었으면 주변의 사람과 '좋은 감정'이 많이 생길 것이고 그것이 순식간에 단절되면 후폭풍도 클테니까.

결론적으로 이렇게 dry하게 글을 마무리짓고 싶지 않아서, 상심하고 있을 친척동생에게 쓴 메일을 덧붙인다. 감정에 충실하자. 그리고 가끔은 그런 감정을 드러내자. 그럴 때라도 살아있음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너무 각박하다.

+

사랑하는 OO이에게.

OO아, 오늘 새벽에 어머니(작은고모)로부터 외삼촌의 부음소식을 듣고 오빠는 너무 놀랍고 슬펐단다. 2010년 가을에 방문을 했을 당시만 해도 외삼촌께서 직접 우리를 공항까지 데리러 와주셨고, 며칠간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밤 늦게까지 보냈던 것이 기억에 선한데 갑자기 아프셔서 걱정을 많이 했었어.

이후에 작은고모를 통해서, 그리고 외숙모님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상황을 듣고 외삼촌의 상태가 많이 우려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외숙모와 OO이 네가 함께 외삼촌 곁에서 돌봐드리고 있다고 하여 우리는 여기 한국에서도 마음이 많이 놓였단다. 외숙모님의 꼼꼼하심과 섬세함, 그리고 네 효심이 이곳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오빠의 마음은 든든했어. 여기서 오빠도 마침 암센터 외과에서 파견근무 중이고, 또 지난 3월에는 혈액종양내과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 많은 암환자 분들을 보았고 외삼촌께서 얼마나 힘드셨을지 가늠이 되어 마음이 아팠단다. 종양이라는 것, 특히 말기암은 의학적으로도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고 환자 본인 뿐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많은 고통을 주는 것이기에 병원에서 그들을 돌보는 입장이 되어서도 감정을 절제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거든. 특히 음식을 잘 못 드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더욱 오빠는 너무 걱정이 되었어. 그럼에도 외삼촌께서는 항상 전화통화를 하실때마다 이곳의 우리가족들에게 축복을 해주셨단다. 아직도 오빠는 그때의 통화가 기억에 선하단다. 본인의 질환때문에 힘들다 하시는 말 보다는‘행복하게 잘 살아야한다’고 하시던 외삼촌의 말씀이 너무 감사했었거든.

결혼 후에 여건이 되면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는 많이 후회가 되지만 그것도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니더구나. 원래 예정은 가깝게는 올 10월에 어머니와 우리 내외가 휴가기간에 함께, 아니면 어머님께서라도 한번 미국에 다녀올 생각이 있으셨고 또 외삼촌의 급작스런 지병악화로 다음달 초에 어머님만이라도 가실 계획이셨거든. 사람일은 한치 앞길도 알 수 없다고 이렇게 금세 우리 곁을 떠나실 줄은 정말 몰랐기에 이곳에서도 많이 슬퍼하고 있단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너무 힘들어 하셔서 오빠와 우리 가족들이 위로해 드리고 있어.

우리가 어렸을 적에 OO동 외삼촌 댁에서 함께 지냈던 기억이 난다. 이모네집도 그곳 근처에 있었지만 그래도 외삼촌댁에 가끔 놀러가고 유치원에 다녔던 그 시절이 생각나. 외삼촌께서는 인자하시면서도 오빠가 무언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면 바로 잡아주셨었지. 그때는 잘 몰랐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외삼촌과 다른 많은 어르신들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처럼 자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어른이 된 지금에야 새삼 느낄 때가 많아. 그래서 오빠도 미진하지만 부모님께 더 효도하고 잘하는 아들, 그리고 사위가 되려고 노력중이란다.

외숙모님께도 다시 연락을 드려야하지만 지금은 경황이 없으실 것 같아서 일단 어느 정도 마음에 안정을 찾으시면 연락을 취할 생각이야.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가고 싶지만 이렇게 전화와 편지로 애도의 뜻을 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슬프고 안타깝구나. 그래도 외삼촌께서도 마지막까지 가족들과 함께 하셔서 편안하게 임종하셨을 것이라 믿는다. 오빠도 멀리서나마 항상 외삼촌을 위해 기도드렸고 또 무엇보다 통증이 덜하시기를 기도드렸었어. 지금 OO이 너도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무사히 장례를 마치고 슬픔에서 벗어나 밝고 환한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를 오빠는 진심으로 바란다. 외숙모님도 많이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OO누나와 너희 가족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오빠는 매일 밤 취침 전에 하나님께 기도드리는데 오늘 밤에도 하늘나라로 가신 외삼촌과 슬퍼하고 계실 외숙모님, OO이누나, OO이 너와 너희 가족을 위해 기도드릴게. 외삼촌께서도 이제 편안히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항상 우리를 돌봐주신다고 믿고 다시 힘을 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한국에서 OO오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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