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대생들의 이야기

Posted 2008. 8. 22. 02:13, Filed under: Ex-Homepage/Essay

 의대에 들어온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간다. 나에게는 여느 해와 다름없는 그냥 현실을 즐기고 또 주어진 역할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새로운 날들이었지만, 내 주위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나를 인식하는 모습에 있어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의 진로에 관한 이야기가 구체화되어 무슨 과를 전공하고 싶으냐는 앞서 나가는 질문에서부터 시체를 진짜 보았느냐는 사촌 꼬마동생들의 말까지 다양한 질문이 단지 내가 ‘의과대학’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추가되었다. 그 중 최근 결혼을 한 친척 형에게서 들은 농담이 가장 기억이 난다.



“우리 부장님께서 그러시는데 나중에 큰 문제가 있거나 그러면 꼭 의사랑 상담하란다. 의사들은 똑똑하고 판단이 정확해서 그러면 적어도 손해볼일은 없다고..”



 새롭게 맺은 인간관계 역시 낯설지만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치대와 함께 하는 고등학교 동문회나, 다른 의대 농구동아리와의 정기시합 등 의대 내의 활동에는 어떤 특정한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위에서 제반 행동이 이뤄지고 있다. 단지 의대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아니 수능시험에서 악착같이 그 선을 넘어섰다는 결과만으로 많은 보상이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모든 변화에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많은 고민들과 콤플렉스 등은 오히려 이 사회에 소속된 순간부터 더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예과생이라 학업적인 면에서의 부담은 없지만, 그 외에 인간관계나 주위 환경에 대한 고민들이 있다. 내가 의대생이기 더욱 명확해지는 그런 몇몇 사항들과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그런 일들이 이번에 읽은 책에 소개되어 있었다.



1. 의대생이라는 사회적 인식



 이 책의 공동저자들은 모두 미국의 의대를 졸업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우리처럼 의대란 특별한 곳임에는 다름이 없었다.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의대란 곳은 주위 사람들의 인식을 180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대생이 되는 순간부터 주위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입학승인이 떨어졌다. 그리고 막상 메디컬스쿨에 들어가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 같은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적어도 서로에게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로 보였다. 하지만 외부에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은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만이 메디컬스쿨의 학생이 되고 미래의 의사자격을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비범한 과학적 자질을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 고향 사람들은 어떻게 메디컬스쿨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를 매우 궁금해 했다.” p.105



 한 ‘가문의 영광’이란 법조계와 의료계에 한명정도씩 친척을 두는 것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사회 지도층의 핵심부에 위치하기 때문일까 의사란 직업은 추앙받는 전문직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이다. 의사가 되기까지 섭렵하는 전문 지식의 양과 사회와 소통하는 병원이라는 창구가 일반인들에게 ‘의사’에 대한 존경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렇지만 마냥 만족해 할 수 만은 없다. 그만큼 대중이 바라는 의사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언행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의사 역시 준 공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의대생의 입장에서 이런 견지를 갖기란 쉽지 않다. 의대생이란 의사와 의사 아닌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의대생은 일반인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와 같다. 본문에는 학부과정에서 배웠던 사회적 가치와 너무 상이한 ‘의학’이란 학문과 ‘의대에서의 삶’에서 그 안에 파묻히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고민하는 학생들도 등장한다.



 “의학계에 투신하는 사람들은 뭔가 이산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있으며 나는 여기에 쉽게 소속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 것을 사회적 소외감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의학이 제공하는 것에 내가 충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현재 의학도의 길을 걷고 있다. 검은 반점, 구불구불한 핵, 기타 빌어먹을 해부학 지식을 주입하는 것 이외에 나를 애초에 메디컬스쿨에 지원하게 만든 읽고, 쓰고, 토론하는 학구적인 동기들은 과연 충족될 수 없는 것일까?” p. 125



 하물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의대에 온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주입식 교육에서 국영수 위주의 공부를 해온 학생들에게 대학 신입생의 1~2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지금까지의 수동적인 태도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사회가 바라는 의사상과 내가 가진 모습에 아직 큰 차이가 있음을 느끼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학문의 양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사회가 바라는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에 내 자신의 현재의 모습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의사가 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어떤 의사가 될 것이냐에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들처럼 점차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해 봐야만 할 것이다.



2. 문화적 다양성과 대체의학



 예전에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인도의 한 사원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 인도 외곽의 유명한 사원은 ‘치유사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그 안에서는 명상과 식이요법을 통해서 병을 고친다고 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의 부제는 ‘대체의학’이었었다. 대체(alternative)란 중심에 비해 부수적이고 부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서양의학이 의료의 주류인 상황에서 기타 ‘비서구’적인 것들은 대체의학으로 불리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한의학이나 침구술, 카이로프락틱, 선, 향기요법 등이 있으며 그들 중 몇몇은 어떤 경우에 실제 효능이 있다고 여겨진다. 인도 출신의 한 저자 역시 고국의 전통요법을 매우 신뢰하며 그가 배우고 있는 서양의학과의 조화를 꾀한다.



 “나는 대증요법 중심의 서양의학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며, 서양의학으로 모든 환자를 다 치료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몇 년 동안 나는 대체의학, 특히 아유르베다에 흥미를 느껴왔다. 관련서적과 워크샵을 통해 지식을 쌓아 갈수록 대증요법인 서양의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서 아유르베다가 많은 효용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p.183



 나는 대체 의학이 서양의학보다 낫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꼭 효과가 없다고 보지도 않는다. 특히 내가 상대적으로 신뢰하는 대체의학은 침구술인데, 나 역시 발목이나 손목을 삐면 종종 침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그것이 정말 효과가 있다면 서양의학 쪽에서 그 작용 기전을 밝혀 의료 기술의 한 부분으로 체계화 시키는 것이 옳다고 본다.(몇 년 전부터 미국 의료계를 중심으로 서구사회에서도 침의 효능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란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치료 과정이 어떤 문화에 속한 것이라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제반 과정이 모두 치유의 과정에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각 나라의 고유한 전통 의료 방식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서구 의학이 가진 한계나 잘못된 대응 방식이 있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지만 더 크게는 그런 전통적인 방식과의 조화에서 환자에게는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차 나는 아유르베다와 서양의학을 통합해서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 아유르베다와 서양의학은 서로 다르지만 둘 다 인간의 건강 증진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 가지 의학 시스템으로 쉽게 치료되지 않는 병이 놀랍게도 다른 의학치료로는 쉽게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보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접근법은 강력한 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 두 의학 시스템에서 좋은 요소를 골라내 잘 조합시킨다면 치료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통합적인 접근은 인도계 미국인이란 정체성을 갖고 있는 나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서로 다르지만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 두 가지 측면을 잘 조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p.193



3. 의대 내에서의 개인적인 삶



 의대란 곳에 와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은 참 다양했다. 출신지, 가족사항, 취미, 외모, 집안내력 등 그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양했지만 같은 학교, 같은 과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친해질수록 그 안에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과의 특성상 오랜 기간 동안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본문에서는 개인적 콤플렉스(알콜 중독, 게이, 레즈비언, 비만, 강박장애 등)나 사회적 차별(인종, 여성, 종교 등)이란 부제로 차별당하는 많은 의대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수업 중에 교수님이 미국 인구의 약 2%가 강박장애OCD를 겪고 있다고 말씀하시자 교실은 금세 술렁거렸다. 학생들은 저마다 그러한 통계치의 의미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학생이 나에게 몸을 기울이며 이렇게 속삭였다. ”2%나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돼! 2%라면 우리 학급에서만도 4명이 그렇다는 뜻이잖아? 분명 잘못된 수치일 거야.“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4명 중 하나라는 사실을 그 친구가 알고 있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p.85



 “지금껏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난민이었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없다. 나를 따라다니는 난민이란 이미지와 낙인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난민이란 말은 내가 동료들과 다르다는 점을 각인시켰고 내가 진짜 ‘미국인’이 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을 일깨워 주는 듯했다. 미국의 주류 문화에서 배척당하고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을 것이란 생각을 들게 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결점을 숨기고 싶은 마음에 굵은 매직으로 사진 설명 중의 ‘난민’이란 단어를 덧칠해서 지워버렸다. 나는 겹겹이 잉크 칠이라도 해서 비미국인이란 나의 정체성을 숨기고 싶었다.” p.39



 "하지만 영어를 읽고 배운다고 해서 내 자신이 완전하게 백인들과 동화될 수는 없었다. 나는 미국 사회에서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으로 더 이상 스페인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미국 사회 주류의 일원이 되겠다고 결심했고 스페인어밖에 할 줄 모르는 이민자들을 놀리는 백인 아이들과 같은 편에 서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어떻게 발음 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마샤’라고 대답했고 내 형제들도 모두 비슷하게 행동했다. 우리들은 심지어 부모님에게도 항상 영어로만 이야기했고 모두 백인 아이들처럼 옷을 입었으며 라틴계 출신임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p.72



 사실 책에 나온 이야기들은 우리나라의 의대에서는 흔하지 않거나 있을 수 없는 일(인종차별 등)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어떤 의대생도 자기가 속한 이곳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오히려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 가진 정체성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 개인이 살아온 환경이 지금까지의 나를 만든 것이며, 의대란 사회는 그러한 정체성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냥 포기하거나 바꾸는 것이 아닌 조화롭게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거기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자기의 주체성과 개성을 상실한 오직 ‘병’에만 유능한 기술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긴 학업의 과정 중에서 비교적 시간에 여유가 있는 예과생 때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 바로 이점이라 생각한다. 의사가 가진 이상적인 위상에 부합하려면 실력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의 인격 수양 및 가치관 확립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기본 테마는 미국 사회의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후기에 나온 미국 의과대학의 커리큘럼 변화에 대한 조언처럼 이 책은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말은 곧 현실적으로 상황이 많이 다른 우리나라 의대생이 읽기에는 쉽사리 공감이 안가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저자들처럼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의대 입학의 기회조차 차단해 버리는 모습이 많다. 아마 수험생이던 작년에 이 책을 읽었었다면 더욱 공감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의대에 다니고 있다. 그랬더니 이 책의 내용은 그 동안 내가 회피하고 있었던 고민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고민들을 여과 없이 보여 주었다.



 “..나는 메디컬스쿨에 와서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변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디컬스쿨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하고 생각의 차이가 큰 이유는 무엇일까? 메디컬스쿨에 다니면서 그토록 외롭고 고독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걷고 있는 길은 진정 내가 좋아하는 길일까? 나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가? 과연 내가 원하는 의사가 될 수 있을까? 애초에 의학계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이러한 질문들은 더욱더 다원화되어 있으며 주변의 권위주의적인 환경에 쉽게 동화되지 않는 신세대 의학도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p.102



 그러한 많은 내용을 통해 내가 받을 차별과 내가 가진 콤플렉스를 극복하여, 환자를 대할 때는 의사로서의 실력 못지않게 인간적인 배려와 뜨거운 가슴 또한 가져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었다. 자신의 사진과 이름을 떳떳하게 밝히며 의대생으로서 그들이 겪은 애로사항과 대처 방안을 담담히 서술한 저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번 독서는 의대생이자 예비 의료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던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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